△전라감사의 자기변명서 <동도문변(東徒問辨)>
1894년 동학농민군 제1차 봉기 전후 시기 전라감사로 재직하던 중 황토현전투 이후 파직된 김문현(金文鉉)의 군사마(軍司馬) 최영년(崔永年)이 쓴 동학농민혁명 관련 문답식 형태의 기록이다. ‘동도시맹변(東徒始萌辨)’ㆍ'부정척사변(扶正斥邪辨)'ㆍ'양병설세변(養兵設稅辨)'ㆍ'고부기요변(古阜起擾辨)'ㆍ'백산패적변(白山敗績辨)'의 다섯 조항으로 나누어 감사 김문현의 잘못된 행정으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게 되었다는 비난을 벗어나려는 변명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먼저 ‘동도시맹변’은 삼례집회와 금구집회를 설명하는 것으로 오래전부터 동학교도들은 은밀한 생각을 품고 있다가 1892년 임진년부터는 활동을 전면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 결과 교조인 선사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교당 설치를 통한 포교의 자유를 허가할 것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점점 불어나 무리를 이루어 재앙의 원인이 되어 1000여 명이 죽창을 들고 삼례역에 이르자 집회 다음 날 아침 감사가 효유문을 지어 전라도 각 군 방방곡곡에 걸어 수습하려고 노력하였다고 적었다. 같은 기간 금구에도 동학도가 거의 만여 명이나 운집하였다는 사실도 적시하였다.
‘부정척사변’에서는 동학도들은 모두 무뢰배들로 한결같이 들개와 같이 출몰하여 우매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미혹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휘파람 소리를 내어 모이고 흩어지는데 아침에는 얼음처럼 풀어지다가 저녁에는 다시 구름처럼 모이니 형세 상 위세와 무력으로 다 쳐 없앨 수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이에 대책으로 감사는 향약을 실시하여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는데, 각 군의 유생들에게 권유하여 향약(鄕約)의 조규를 세워서 덕업상권(德業相勸)과 과실상규(過失相規)ㆍ환난상구(患難相救)ㆍ수방상조(守防相助)를 곳곳에 실행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익산의 김태현과 김제의 이경재와 장성의 김재명 등 선비들이 함께 향약을 강구 연마하자 감사가 글을 지어 권장하면서 동학을 사교(邪敎)로 지적하고 배척하는 것을 하나의 큰 임무로 삼았다고 한다.
‘양병설세변’에서는 감사가 호남 53군에 백일세(1/100세)를 새로 개설하여 쌀 4856석 9두 3승과 4만 3200량을 얻었고 장시에 1년의 세액을 더하였지만 이는 3만 량에 지나지 않았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병사의 수는 난설대(攔設隊) 300 명 외에 장관(將官)과 잡역 700 명을 더하였으나 월급은 약소하여 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정부에서 총리영과 총제영을 새로 설치하여 각 군에서 걷는 세금이 많이 늘었다고 주장하였다. 새로운 세역을 설정하여 수세하고 군사를 증설한 것은 동학군 진압을 위한 감사의 부득이한 행정조치고 경비 대부분도 중앙군이 사용했다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고부기요변’은 동학농민군 봉기의 시초인 고부농민항쟁의 원인 제공은 조필영과 조병갑의 실정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여기에 안핵사 장흥부사 이용태의 탐학으로 확산이 되었음을 적기하고 있다. 예컨대 전운사 조필영은 강제로 세금을 매기고 함부로 징수하여 그 해독이 전라도 전체에 흘렀으니 백성들이 원망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어서 고부군수 조병갑이 피를 빨고 기름을 짜서 박해가 끝이 없자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간 사람들이 열 명 중 여덟, 아홉이 되어 근방의 읍이 흉흉하게 되자 감사가 크게 노하여 파직하라는 장계에도 불구하고 조병갑은 다시 보임하여 옛날의 악습을 고치지 않고 더욱 방자하였다 한다. 최영년은 “호남의 난리는 조필영에서 시작되었고, 조병갑이 그 중간이며, 이용태가 그 마지막이니 이는 만고에 바뀌지 않는 논의이다”라고 기술하였다.
‘백산패적변’은 백산전투와 전주전투 이후 동학농민군에게 전주성을 탈취당한 것을 초토사 홍계훈의 실책으로 돌리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호남의 동학도를 토벌하도록 조정의 명령을 받은 그는 전주에 이르러 3일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다. 전라감영에서는 소를 잡아 먹이고 전주를 지켜달라고 청하였음에도 홍계훈은 이를 듣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백산에 있는 비적들을 토벌하러 가지 않고 곧바로 장성으로 향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비적을 토벌하지 않고 빈손으로 서울로 돌아갔으니 그 연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관군은 백산에서 패하였고 이후 비적의 기세는 사납게 퍼졌고 관군은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반면 감사는 군과 읍을 단속하고 백성들을 불러 모아 밤낮으로 노력하자 비적이 틈을 타서 돌격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 감사의 힘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이후 비적의 무리가 전주성에 들어와 성은 함락되었고 정부에서 특명으로 김학진을 신임 감사로 임명했으나 그들에게 굴복하여 선화당을 양보하였다고 탄식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 향촌 유생의 동학농민혁명 관찰기 <봉남일기(鳳南日記)>
전라도 장성 장안리 유생 변만기(邊萬基)의 일기이다. 변만기는 자신이 거주하는 장성 일대에서 목격한 것과 나주ㆍ고창ㆍ흥덕ㆍ고부ㆍ태인 등 인접 지역에서 들은 내용을 일기에 적었다. 동학농민군 관련 내용은 제2차 봉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1894년 10월부터 농민군 활동이 종식되는 1895년 2월까지 4개월간 기록이다.
1894년 10월에는 4~5명의 동학도가 말을 타고 와서 군수전(軍需錢) 100량의 증표를 가지고 백씨의 집에서 군수미를 걷었는데, 그가 사람을 도소(都所)로 보내어 침범하지 말라는 증표를 받아 겨우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각 면과 리마다 량미(粮米)와 군수전을 내놓으라고 명령하고 사사로운 혐의로 침략하여 사람들의 원성이 들끓었고 하였다. 이 일기를 보면 동학농민군이 인접 지역을 넘나들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고창접이 본부(本府, 장성)로 왔는데, 본 마을에서 점심 4백 개의 밥상을 보내어 바쳤다. 봉연 선비 송성위가 와서 말하길, ‘군수전을 토색하는 일을 피하여 왔다’고 하였다. 각 면이나 리마다 소위 양식쌀과 군수전이란 것을 임의대로 내놓으라고 명령하고, 혹은 사사로운 혐의로 침략하는 폐단으로 인해 사람들의 원성이 들끓었다. 석양에 고창접 천진명이 진영을 황룡시(黃龍市)로 옮겼다”라고 기술하였다. 연이어, “월평의 도소에서 짚신 몇 켤레를 본 마을에서 압류하였다 한다. 어제 신평의 김주환과 이이로가 쫓겨나 광주의 대치로 갔다고 한다. 이날 오후에 고창의 신정옥이 손화중의 급한 기별을 듣고 월평에서 돌아갔다고 한다. 어떤 왜선(倭船) 여러 척이 법성포에 와서 정박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11월에는 북창에 진입한 나주의 수성군이 동학농민군 접주 집에 불을 지르자 나주에서 장성으로 들어온 접주 오중문은 피신하였고, 광주와 나주의 접경에는 연기가 구름처럼 깔려 있었는데 집을 태우는 연기라고 들었다. 나주목사가 영장을 보내 수성군이 불을 지른 죄를 다스리고 되돌아갔다고 한다. 정읍의 동학군인 등내접도 장성 북면에 도착하였는데 지역의 동학군들이 일제히 도회를 열고 밤이 이르도록 경비를 서는 등 분주하였다고 한다. 고창 칠암의 동학군도 장성 제암의 수백 명과 더불어 봉연에서 도회를 열었고, 여러 지역에서 온 동학군들이 황룡시에서 도회를 열었는데 1만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후 흥덕과 고창에서 온 1천여 명이 행군하여 나주로 갔다. 고부에서 온 3백여 명이 깃발과 장대를 자신의 마을에 세웠는데 그들을 먹이는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고 술회하였다. 정읍의 슬내접과 고창의 대성접 수천 명은 장성 읍내와 유탕리에 진을 쳤고, 고창의 신정옥은 황룡시에 도소를 설치하고 군량미를 각 면과 각 리에서 징집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다고 한다. 한편 태인에서 패전한 동학군들로부터는 “패전한 도인 수백 명 중 본읍을 지난 자들은 거의 모두가 경기ㆍ호중(湖中)ㆍ전주 사람들이었고, 탄환을 맞고 상처를 입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는데, 그들은 광주 덕산의 손화중 진영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성 지역에서는 오가작통제가 철저하게 시행되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약장(約長)은 향약 단체를 주도하는 우두머리이고 다섯 가구를 이끄는 통수(統首)와 다섯 통 즉, 25가구를 관할하는 연장(連長) 등 최말단 조직의 대표자를 차례로 구성하였다. 봉남일기 갑오년 12월과 을미년 1월 기록에는 약장과 연장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즉, 약장은 해당 지역의 인구성책(人口成冊)을 새롭게 작성하여 이를 베껴 적고, 각 면의 약장들이 모두 모여 규례와 호적대장 작성에 관해 상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령이 각 면의 약장과 향교의 유사들을 모두 모아 오가작통에 관한 절목을 나누어주고 낭송하는 절차를 거치기도 하였다. 이들은 수시로 회합하여 이후에도 면의 상유사ㆍ약장 등과 각 리의 연장ㆍ통수가 모여 동학농민군 잔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문하고, 3일 안에 다시 실상을 약장에게 고한다는 뜻을 각 리의 연장ㆍ통수에게 당부하기도 하였다. 면의 약장과 각 리의 연장이 날이 저물 때까지 약장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2월의 일기에는 향약에 입약한 사람들을 성책하였는데, 양반이나 상민이나 똑같이 기재하고, 다만 각자의 나이대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변만기는 경군이 체포한 3명의 동학군을 태워 죽이고 수성군이 돈을 토색하거나 6명의 동학군을 살해하는 장면도 목격하였다. 자료의 원본은 장성의 변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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