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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생] '우리말 전도사' 부안주산교회 김명수 장로

붓으로 쓴 '할렐루야' 작품 50개국에 12만장 보내..한글사랑 남다른 열정

'우리말 지킴이' 김명수 부안주산교회 장로가 붓글씨 작업을 하며 활짝 웃고 있다. (desk@jjan.kr)

"나랏말씀인 한글의 소중함을 요즘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까워…. 한글사랑이 곧 나라사랑인데 말이여. 외국 사람들도 한지에 붓글씨로 '할렐루야'라고 써주면 감탄하면서 한글의 아름다움에 놀라는데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모른당 게”

 

'할렐루야'를 직접 붓글씨로 써 그리스도의 복음과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는 한글 복음서예가인 샘물 김명수씨(71·부안주산교회 장로). 그는 언제가 부터 한글이 영어에 가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난 2004년 10월 한글날 문화관광부장관과 한글학회장 공동 명의의 '우리말글 지킴이'란 상을 훈장처럼 받을 만큼 한글사랑이 남다른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에 가든 늘 한복차림으로 다닌다. 교회에 갈 때도 중요행사에 나갈 때도 어김없이 한복차림새로 나간다. 심지어 해외에 나갈 때도 그는 한복과 흰 고무신을 신고 나갈 정도다. 그러다 보니 한복과 백발의 단발머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되어 버렸고 그 모습은 마치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보다 그를 더 한글지킴이와 선교사로 각인시켜준 것은 '할렐루야'를 직접 붓글씨로 써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할렐루야 문구를 자신이 개발한 붓글씨 서체인 '태극체'로 태극모양과 십자가모양, 부채모양 등으로 완성한 작품 12만장을 국내외 교회와 기독교단체, 선교단체 등에 전하는 등 복음을 전파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복음을 전할 때 한글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때 한지에 붓글씨로 쓴 할렐루야 작품을 세계 각국의 선수단에게 기증하면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렸을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호주 멕시코 브라질 등 해외 50여 나라에서 한글 전시회를 여는 등 우리말 알리기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그의 '한글과 할렐루야' 사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40여년이 넘는 세월을 몸담아 그의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난 시골우체국에서 매일 10시간 넘게 붓글씨 작업에 정열을 쏟았으며, 이를 토대로 함석헌선생께서 새로운 서체로 인정한 '태극체'가 탄생했다.

 

그는"나의 서체를 놓고 함석헌 선생께서'태극체'라는 새로운 서체를 하나 지어주었어요. 왜 그랬느냐하면 자음에서 'ㅇ'은 태극으로 했고, 'ㅎ'이나 'ㅊ'은 십자가로 형상화 시켰지요. 'ㅅ'은 산으로 그리고 모음에서 'ㅏ'나'ㅑ'는 새싹이나 나무순으로 모양을 내는 데 어느 것이나 '태극체'를 인용하게 됐어요”

 

그의 고희 기념문집인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다'를 엮은 양규태시인은 "그의 붓글씨 서체는 한글고체와 추사체를 기반으로 연구된 서체로 독특한 선의 흐름 속엔 예수사랑과 나라사랑 정신이 담겨져 있다”고 말할 정도로 할렐루야를 쓴 '태극체'는 독특하고 아름다웠다.

 

그가 한글사랑과 할렐루야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지난 1975년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연수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채소원예의 육종관계를 연구하던 중 생각지도 않은 '급성간염' 판정을 받게 된다.

 

당시 그가 병마와 싸우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요코하마 호도가이 순복음교회에서 재일교포 전도대가 심방을 와 기도하던 중 놀랍게도 "외로운 아들아, 네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나를 아버지라 부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 내가 너를 살리노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렸다는 것.

 

기적적으로 예수를 만난 그는 이때부터 친구가 선물로 준 성경을 읽으며 맘을 달래며 틈틈이 한글서예습작에 열중했다.

 

그는 귀국 후 그가 관계했던 4H 회원과 흥사단원에게 성경말씀을 적은 편지를 전하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 무렵 전주에서 열린 최자실 목사 부흥회에 참석하여 '할렐루야'를 외치는 최 목사를 보고 '할렐루야'를 붓글씨로 써 복음을 전달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그때부터 '한글사랑, 할렐루야 인생'이 시작돼 지금의 '우리말 글 지킴이'로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그는 마을문고 운동 보급에 심혈을 기울여 전북지역은 물론 강원도 산간벽지까지 찾아다니며 수많은 책을 전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때 그가 평생 업으로 삼고 있는 주산우체국을 개국키도 했다. 그는 부안 주산면에 우체국이 없음을 깨닫고 전 재산을 털어 1964년 별정우체국을 신설하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우체국장으로 취임해서 지난 2005년까지 무려 42년 동안 우체국장을 엮임 했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흥사단원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1980년 어느 날 그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혐의자로 연루돼 서울 남영동 보안대로 넘겨져 갖은 고문을 당한 것이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등 고문 후유증은 상당히 컸지만, 얻은 것도 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님을 비롯해 온가족이 불교를 믿었는데 갖은 고문 등의 공포를 기도로 이겨냈다고 하자 가족들 모두가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맘도 커지고 '할렐루야' 글씨에 영력이 더해져 글씨마다 운동력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

 

그는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에 참가한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일일이 '할렐루야' 글씨를 전했으며, 이후에도 자비를 들여 미국 등 해외 50여 나라에서 '태극체' 전시회를 갖고 한글로 쓴 할렐루야 보급에 전념했다.

 

간 질환을 앓고 있는 그는 병환 중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할렐루야'를 자신의 서체인 태극체로 정성을 바쳐 쓰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의 '할렐루야'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40년간 4H운동을 펼치며 4H전북도자원지도자회장을 지냈으며, 전주 군산 이리 흥사단 아카데미를 창립 지도했고, 말씀자랑 한글 붓글씨 으뜸회원으로 세종문화회관 전시를 비롯 '할렐루야'를 12만장 보급했다. 전북경실련 공동대표, 부안군 초대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전북인권선교회 평화통일위원장, 주산우체국장, 주산교회 시무장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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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준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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