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12 03:46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금요수필
일반기사

너를 떠나보내며

▲ 이순종

너는 하얀 시트 위에서 나신으로 떨고 있다. 너의 몸 이곳저곳엔 봉숭아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할딱이는 몸짓만 있다. 이제 이것으로 우리의 인연은 끝나는 것일까. 너는 지금 이 이별의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우리의 만남은 길었지만 헤어짐은 이렇게 한순간인 것을. 나 또한 아무런 말없이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다. 무슨 말을 하랴. 우리의 젊은 날, 20년간의 불편한 동거생활이 참혹하게 끝나가고 있는 판에…. 너는 어느 해인가 봄에 나에게 찾아왔었다. 너를 처음 대하였을 때, 그냥 그저 일상의 그렇고 그런 대수롭지 않은 만남으로 여겼다. 미모가 뛰어났는지, 성격이 좋다든지 따위에 무심하였다. 나의 현실이 너를 염두에 둘만큼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의 모든 관심사는 이놈의 딱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죽어라고 아등바등하던 때였으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처음부터 살을 섞는 사이가 되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면 너는 애초부터 도덕이니 윤리 따위에 초탈해 있었다. 그런 점에선 나 또한 누구를 비난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을 안다. ‘너와 나’에서 우리가 된 이후, 너는 마치 당연한 양 많은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산으로, 바다로 바람을 쐬러 가자고 하질 않나. 운동해야 한다고 강권을 하질 않나. 끼니때마다 기름진 음식을 버리라고 조르질 않나. 된장을 먹어라, 채소를 먹어라. 잡곡밥을 먹어라. 고기를 먹어선 안 된다. 나는 너의 넌더리나는 간섭이 싫었지만 너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산으로 들로 자연을 대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너의 강력한 요구로 시작된 일이라지만 나 또한 그런 시간이 좋기는 하였다. 간혹 ‘이런 게 행복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기까지 했으니 좋긴 좋았던 모양이다. 때때로 육모정 계곡에 가서 발을 담그고, 피톤치드 뿜어대는 산림을 찾고, 기도가 잘된다는 사찰에 기웃거리며 스님에게 차 한 잔을 청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너와 만남은 이런 삶으로 전환하라고 찾아온 인연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하든 원치 않든 나의 가치는 점점 바뀌어 갔다. 그러나 너는 점점 요구가 심해졌다. 급기야 한복을 입으라 하고, 시골에 한옥을 짓고 살자고 졸랐다. 나는 그 말이 가난한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아 여러 날을 불쾌해하였다. 누군들 좋은 것을 모르냐 이 말이다. 너의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나 해 줄 수 없을 때 그 현실적 고뇌를 너는 정녕 모르고 있었다. 너는 너의 요구가 묵살되고 나의 냉소적 반응이 계속되자 급기야 나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밤이고 낮이고 네가 저지른 횡포는 이미 도를 넘고 있었다. 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의 광란에 질식하여 죽을 것만 같았다. 치를 떨었다. 정말이지 극단적인 생각을 하루에도 골백번 해야 했다. 나는 너와의 이별을 꿈꾸었다. 원만한 이별.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고 소중한 추억만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이별을 꿈꾸었다. “이제 그만하자. 잘 가라, 그대여. 나는 네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너의 숨통을 조를 것이다. 너의 증오보다 나의 적개심이 더 붉다. 이것으로 훗날 또 나의 과보를 걱정할지라도. 나는 필시 너를 해하고야 말 것이다. 미안하다. 그대여, 용서해다오. 너의 목을 조르는 나의 팔이 떨리고 심장은 북처럼 요란할 것이다.” 너는 이제 희멀건 시트 위에 피를 토하고 널브러져 있다. 팔딱거리던 너의 숨도 끊어진 듯 정막이 흐른다. 너는 두 자식과 함께 처참하게 쓰러져 있다. 아~ 너는 새끼를 배고 있었구나. 네가 빠져나간 자리가 휑하다. 이제야 나는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나의 20년의 비후증수술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의사는 핏물처럼 빨갛게 물들인 솜을 네가 빠져나간 자리에 쑤셔 넣고 있다.

 

△수필가 이순종 씨는 2010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수필집〈내 마음속 99개 별〉이 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