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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들의 외침을 따라서

▲ 정요순

무지의 소치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법을 모르면 답을 얻기가 힘들 땐 옆 사람의 의미 없는 듯한 중얼거림도 되새겨보면 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몇 해 전 빠듯한 주말을 쪼개어 수원에서 정읍으로 나를 만나겠다고 친구가 기별을 보내왔다. 가을이라 내장산 단풍 구경 차 북적대는 대기실에서 사람 사는 맛을 느끼는 것도 괜찮았지만 상쾌한 바람을 쐬고 싶어졌다. 광장 한 켠 우뚝 선 전봉준 동상 중앙 원 안에 크기가 다른 분명 한글들이 새겨져 있었다. 한자였으면 애초 시도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한글이라 좌우상하 대각선으로 읽어도 의미 없는 글자들이었다. 나폴레옹이 로제타석 글자를 봤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반갑게 친구를 안았다. 모르는 것을 물으면 순간의 창피지만 아는 척 넘어가면 평생의 창피라고 여겨온 지라 궁금증을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겠는가? 갸우뚱하던 친구의 중얼거림은 가운데로? 바깥쪽으로? 오! 분명 수업시간에 배웠으련만 배운 것의 절반을 이해하면 제대로 된 제자이고 그것의 반을 기억하면 우수한 제자라는데 나는 그걸 배웠는지조차 모르는 사발통문이라는 것이었다. 내친 김에 우리는 황토현으로 갔다. 전시장 초입에서 만난 그림 속 농부들의 모습은 무서웠다. 하늘을 알고 땅을 알아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순박한 농부들이 오죽이나 삶에 지쳤으면 투박한 손에 그들의 혼이 담긴 농기구를 무기로 들고서 저리도 눈을 부릅뜨고 있을까?

 

세월은 흐르는 것. 또 모든 것은 잊혀 지고야 마는 것. 그러나 기억은 되살아나는 것. 올 여름, 점심을 먹으러 이평에 가게 되었다. 말목장터길? 한 여름 땡볕아래 호기심을 채울 수 없었다.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 여름 휴가에 또 나를 찾은 친구에게 박장대소하게 만들어준 동상과 황토현을 상기시키며 말목장터로 향했다. 5일 장터였던 사거리 이름이 말목장터였고 그 곳이 동학 농민 혁명의 최초 집결지였다고. 사람 사는 맛이 물씬 풍겼을 장터. 거둬들인 곡식을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달구지에 싣고 한 푼 더 받고자 시끌벅적 흥정하는 장터 풍경에 눈에 선했다. 내 엄마도 그렇게 우리를 키워 냈으니까.

 

물 없이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일. 내 아버지도 모내기 전부터 벼를 거둘 때까지 매일 새벽 여기저기 흩어진 논에 물꼬를 보러 한 바퀴를 빙 돌고서 우리가 학교에 갈 때쯤 소에게 줄 풀을 한 가득 지게에 얹어 돌아오시곤 했었다. 농부들의 심장을 찢어낸 것은 하늘이 값없이 내려 주는 물이었다. 멀쩡한 보를 다시 쌓고는 물을 가두어 물세라는 명목으로 농민들의 피를 빨아댄 만석보를 찾아갔다. 사적비로 대신하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풍요로운 배들평야 둑에서 ‘만석보’ 시를 읽어가는 내내 절규하는 농부들의 외침이 심장으로 몰려왔다. 그 시절 저 벼들이 변신한 쌀로 식구들이 몇 끼나 배 불리 먹었을까? 곳간에 나락을 쌓을 겨를도 없이 물세로 뜯기고 다시 또 계속되는 배곯던 삶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우리나라 한 해 음식 쓰레기 500만 톤, 처리비용은 9000억 원, 달콤한 간식에 치어서 한 끼 밥을 안 먹으면 안 되냐고 되묻는 아이들이 끼니 굶기를 밥 먹 듯 했을 날들을 상상할 수가 있을까?

 

우리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태풍을 내세워 흠씬 뿌려대는 장맛비였다. 값없이!

 

△수필가 정요순 씨는 지난 2007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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