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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사온

▲ 임상기

차에 눈이 한 짐이나 쌓여있다. 다행히 큰길은 얼어서 번들거리지 않고 녹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를 타고 나갈 요량으로 차창에 쌓인 눈을 쓸어내는데, 출입구 계단에 주먹만 한 눈 뭉치로 만든 눈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서 봤더니 잣나무 사이에서 병아리가 뒤뚱뒤뚱 날개를 파닥거리며 달려오는 듯하다.

 

철쭉 가지 끝에 달린 꽃눈이 날개를 파닥거리게 했을까?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휴대전화를 꺼냈다. 사진을 찍으려 이리저리 눈을 맞추다 보니 눈사람의 못생긴 얼굴에 생글거리는 미소가 담겨 있다. 걸림이 없는 둥글둥글한 것도 미소가 된다.

 

겨울에 눈이 쌓인 날에는 어지간하면 차를 운전하지 않는다. 미적거리면서 눈에 녹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눈이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미룰 핑계를 찾는다. 마치 길에 쌓인 눈에 공포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피한다. 차에 스노체인을 갖고 다니기는 하지만 한 차례도 쓰지 않고 겨울을 보낼 때도 있다.

 

물론 겨울을 지나면서 빙판이 된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미끄럼을 타다가 밭으로 구를 뻔한 일도 있었고, 눈길에서 브레이크를 밟다가 빙글빙글 돌았던 때도 있었지만 용하게도 차 문이라도 바꿀 만큼 세게 부딪친 적은 없었다. 겨우내 운전을 잘하다가도 눈길에서 사고 한 번 나면 말짱 헛일이라는 어느 택시기사의 말에 공감하고 어지간하면 눈길에 나대지 않는 조심성으로 사고를 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이 오는 날이면 운전을 피할 생각에 답답하기는 하지만 내가 운전하지 않는 날이면 어린 시절 추억에 젖기도 한다. 모정 올라가는 경사가 가파른 길에서 종일 눈썰매를 타던 일, 꿩을 몰아서 잡겠다고 동네 선배를 쫓아 이 산 저 산 뛰어다녔던 일, 모닥불을 피워놓고 젖은 나일론 양말을 말리다가 누르스름하게 태워 먹은 일, 손에 쥐면 물기 뚝뚝 떨어지는 눈을 뭉쳐 눈싸움하던 일이 떠오른다.

 

이제는 그 시절 눈 뭉치에 맞아서 아팠던 느낌도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손등이 터서 갈라진 자리를 파고 들어가는 안티푸라민의 싸한 냄새도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추억도 따지고 보면 그 순간을 현재형으로 재현하는 것이라서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손등 그 갈라진 틈 사이로 너무 많은 바람이 지난 탓인지도 모른다.

 

날씨도 세계 경제를 따라가는 듯하다. 경제가 불황이라고 추위도 불량해진다. 재수 없는 사람은 고스톱판이 끝날 때까지 피박 쓰는 것처럼 지붕에 닿을 만큼 눈이 쏟아졌는데, 쏟아진 눈을 치우자마자, 마치 치우기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퍼붓기도 한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들판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몽땅 깔아뭉갤 듯 마치 끝장이라도 볼 것처럼 퍼붓는다.

 

금수강산을 증명하던 ‘삼한사온’도 요즘에는 잘 맞지 않는다. 춥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겠다고 덤비는지 한 열흘씩 버티는 듯하다. 초등학교 다닐 때 단골 시험문제였던, 삼한사온이라는 단어도 고사성어의 수렁에 빠진 듯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배구경기의 중계에서나 쓰던 블로킹을 기상예보시간에 사용한다. 블로킹 현상이라고 사근사근 설명하는 예쁜 일기예보 진행자가 블로킹한 선수보다 더 심술궂어 보일 때도 있다.

 

약삭빠른 동장군들은 동네 수도 계량기 터뜨리기 경쟁이라도 하듯 이집저집 기웃거리며 담을 넘나든다. 간간이 악에 받친 할머니들이 다 식어가는 연탄재를 들고 나와 길바닥에 패대기치며 삿대질을 해댄다. 오늘은 낡은 신코에 먼지만 날리지만, 내일이면 눈구름 지나가고 햇볕이 다시 날 것이다. 저 할머니처럼 대놓고 삿대질만 잘해도.

 

△수필가 임상기씨는 지난 2001년 〈지구문학〉에 수필 당선, 2012년 〈문예연구〉에 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김제지부회장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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