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계절, 초봄에 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집 옆 모퉁이 취 밭에서부터 뒤란의 머위 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천나무 울타리 밖 매실나무 밑을 누비며, 그것도 부족해 어디에 또 없을까 희번덕거리며 그 새싹을 뽑아냈다. 그것도 한 주간을 사이에 두고 두 차례에 걸쳐. 그 여린 새싹에 무슨 원한이라도 맺힌 양, 떡잎과 겨우 두어 장의 속잎이 돋아 무순보다 더 여린 싹들을 몇 토막을 내어 두엄자리에 던져버렸다.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 밤중에야 희미하게 소리 들리네.
눈 녹아 남쪽 개울물이 불어 났겠거니 / 풀싹은 얼마쯤 돋아났을까?
‘춘흥(春興)’이라는 정몽주의 시다. 나 또한 선암리의 긴 겨울동안 이 시를 생각하며 새 봄을 기다려온 터였다. 구성산에 오르며 눈 덮인 산등성이에서 춘란 한 촉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던가. 그리고 나뭇가지의 잎눈을 보며 새봄을 맞을 설렘으로 얼마나 부풀었던가.
그런데 이제 막 떡잎을 피워낸 그 여린 싹을 사정없이 뽑아낸 것은 그게 ‘한삼덩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위의 모든 것을 감고 올라가며 수액을 빨아먹고 자라기 때문에 견뎌내는 곡식과 나무가 없다. 생명력이 어찌나 강한 지 돌 틈에서도 살아나며, 며칠만 지나면 덩굴이 저만치 뻗어나 있다. 이래서 나는 눈에 띄기만 하면 한삼덩굴을 뽑고야 만다. 남의 밭, 길가를 가리지 않는다.
모름지기 악의 근원은 힘을 못 쓸 때 제거하는 것, 내 맘 속 악의 싹을 뽑아내려는 듯하다. 뒤돌아서면 금방 다시 돋을 줄 알면서도.
그러나 항상 이렇게 잔인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무언가를 가꾸기 때문에 울안은 그야말로 풀과 곤충의 천국이다. 이른 봄, 햇살이 채 따뜻해지기도 전에 앙증맞은 꽃 모양에 비해 이름이 좀 그런 개불알꽃, 줄기를 꺾으면 나오는 노란 진액이 아기의 그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애기똥풀, 보라색과 하늘색이 조화롭게 꽃 색깔을 이룬 현호색, 민들레 등이 잔치를 이룬다. 게다가 꽃밭에 심은 며느리바랑꽃, 진안 마이산 밑에서 두어 포기 옮겨왔는데 지금은 수십 포기의 무더기가 되어 등불이 된 하얀 색의 은초롱꽃이 시나브로 피고 진다. 문제는 화단의 경계를 넘나들며, 채소와 더불어 자라고 피고 시드는 것.
또 다른 문제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 때문이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 속에서 추위를 이겨 내고 싹이 튼 생명인데 어느 꽃은 내가 좋아하는 색이라고 먼 데서 옮겨다 심고, 어느 꽃은 좋아하면서도 흔하기에 뽑아 없애야 하는가? 같이 무리를 지어 피어있으면 어울리니까 아름답다 하고 외따로 피어있으면 조화를 깬다는 것은 누구의 관점인가?
모든 것은 크고 작고 간에, 귀하고 흔하고 간에, 나름의 중요함이 있어서 서로가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긴 고민 끝에 나름의 원칙을 정했다. 어느 풀이든 꽃이 피었을 때는 뽑지 않는다고. 그간 추위를 이겨내고 싹을 틔워 꽃까지 피우느라 애쓰고 힘쓴 것에 대한 예우로. ‘잡초’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죄를 주었을지라도 나는 면죄부를 준다.
한데 그 후 얼마 있다 다시 보면 그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 씨방을 활짝 열고 씨앗을 흩뿌리면서.
△수필가 황숙 씨는 익산 출신으로 지난 1991년 전북 여성백일장 수필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1996년 계간 〈시대문학〉(현, 문학시대)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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