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는 백채라는 한자어에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나는 무우가 아닌 무가 표준어라는 사실을 얼마전에야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배추만큼 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그러나 무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다면 배추 뒤에 놓는 일이 미안해질 것이다.
요즘 면역성을 높여준다는 이유로 홍삼이 호시절을 누리고 있다. 무는 산삼에 버금가는 채소라지만 밭에서 나는 삼으로 대접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무의 활약상도 평범하지 않다.
무를 자박자박 썰어 설탕에 재어 두었다가 차로 마시면 기침이나 감기에 빠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무를 갈아 즙을 내어 마실 수도 있다. 무즙은 시험에 낙방할 뻔한 수십 명의 학생들을 구제해 준 저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즙이 엿기름을 대신하여 넣었을 때 엿을 만들어 내는 탁월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총각무는 잎줄기 모양이 머리를 갈라 땋아서 묶은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상투를 틀기전의 장가들지 않은 총각의 머리 모양을 닮은 것이다. 총각무의 무청에는 사과의 10배가 넘는 비타민 씨가 들어 있다고 한다.
무청 시래기를 말려 비행기에 실려 보내며 생계를 잇는 농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시래기 축제를 여는 마을도 곳곳에 생겨난다. 무 자체에도 비타민 C가 많으니 미용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무와 친해지길 권한다.무의 섬유질은 니코틴을 제거해 준다고 하니 금연이 어려우신 분들이 챙겨 드시면 좋을 듯하다.
무는 자신을 깍두기로 대하든, 무 밑동 같은 처지에 놓이든 굴하지 않는다. 깍두기는 그 옛날 궁궐 상에 오르던 귀한 음식이어늘 어이 깍두기 신세를 논한단 말인가.
김장철이 되어 배추가 100포기,200포기 줄을 지어 나서면 무도 질세라, 소수의 무리일망정 졸래졸래 배추 군단을 따라나선다.무채가 되어 양념 속에서 제 몫을 다한다. 도막 도막 잘려 배추김치 속으로 들어가 깊은 맛을 내는데 일조한다.
무김치는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만 담아 배추김치 대열 구석에 존재감 없이 세워 둔다. 동치미는 우리 선조들의 맛을 흉내 내기가 쉽지 않고 항아리를 땅에 묻을 수 없는 생활구조 탓에 아예 모습을 감추고 있다.
본디 제 모습이 드러나야 위대한 것은 진정한 위대함이 아니라 했다.자신은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주위를 더 유익하게 하는 무리가 있다.무도 그중 하나다. 무가 있으므로 배추는 더 빛이 나고, 무가 늘 곁에 있어 외롭지 않다.
무는 각종 생선 조림에서 오랜 가열로 인해 자신의 본성을 다 잃고도 마지막까지 우리의 미각을 충족시켜주는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최후에 때깔 잃은 모습으로 남아 우리에게 무의 진미를 누릴 수 있는 황홀한 순간을 선사한다.
무는 내 한 몸을 던져 주위를 구하지만 자신만이 가진 고유의 진가를 지킨다. 그런 고고함이야말로 무의 매력이자 저력이며, 내가 무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스스로는 김장김치로 대접받지 못한다 해도 다른 김치의 깊은 맛을 돕는 선의를 인정해주고 싶은 까닭이다.
△수필가 왕미선씨는 2013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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