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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가 피어 있는 시간

▲ 이현옥

재작년이었던가. 옥상에서 키우던 제라늄이 시들자 그 화분에 채송화 꽃씨를 뿌려놓았다는 친정어머니 덕분에 나는 채송화를 가꾸게 되었다. 옥상 뙤약볕이 무서워 한 이틀 물을 안 주기도 했지만 어김없이 꽃을 피워내는 생명력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고, 백일 된 애기입술 같은 꽃들 앞에서 나는 왠지 더 작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반복되는 일상 틈에서 도드라지는 하찮은 돌발상황 때문에 아쉬움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울 일은 더더군다나 아닌 기분을 잠시 달래고는 했던 것이다. 바쁘다, 쉬고 싶다, 위로받고 싶다, 나를 찾아 떠나고 싶다, ‘빨리빨리’란 단어가 싫다, 게을러터지고 싶다, 귀찮다는, 내 나이 오십 이후를 지배하는 문구들도 이 꽃들 앞에서 쓰다듬었다.

 

그 중엔 ‘누군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던, 내 속마음을 통쾌하게 터뜨려주었던 어느 심리학자의 글을 읽으며 울음을 쏟아냈던 한밤중도 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1997년 IMF가 났던 여름,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뀐 홀어머니의 마당에 흐드러졌던 원색의 색감을. 우리 핏줄들의 탯줄이 묻혔을 울타리 아래, 퇴색한 장독대들 사이사이, 발길에 밟힐 수밖에 없도록 무작정 피어 있던 채송화를 잊을 수 없다. 갓 낳은 둘째 아이를 안고 마지막으로 친정집 마당을 밟았던 그 해, 큰 오빠는 슬레이트집과 몇 뙈기 안 남은 홀어머니의 전답을 몽땅 날려버렸고, 망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나는 채송화가 피어 있는 시간에 끌리곤 했다. 아침을 준비하다 옥상을 바라보면 꼭 오무린 입술에 구슬구슬 이슬을 매달고 햇살에 반짝이는 꽃.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옥상문을 열어놓고 맞바람에 온몸을 맡기곤 했는데, 그 시각 노랗고 붉은 채송화는 한여름 뙤약볕을 맞서고 있었다. 때로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면 채송화는 입술을 꼭 오무리고 마른 줄기만 매달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와 눈 맞출 수 있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런데 갈수록 채송화에게 다가가는 시간이 짧아진다.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오후 6시 넘어 돌아오는 게 나만은 아닐 터인데, 딱히 노동조건이 더 나빠진 것도,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왜 이 꽃들을 자주 쳐다 볼 틈이 없는지 얼른 설명이 안 된다. 어쩌다 해질녘에 물을 주며 그새 돋은 풀이나 뽑는 게 요즘의 나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배배 꼬인 채송화 잎과 줄기에 자꾸 눈길이 간다. 나는 누구인가. 아내, 엄마, 며느리 이런 건조한 호칭에서 자유롭지 못한, 손에 쥔 것도 딱히 없고 그렇다고 이름을 남길 만한 일도 하지 못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매달고 빼빼 말라가는 채송화의 잎과 줄기 앞에서 나는 다시 작아졌다.

 

마당이 있는 집을 갖고 싶다. 이 말을 꺼내자마자 남편은 에구, 에구 이 앓는 소리를 할 테지만 더 늦기 전에 삶의 돌파구에 필요한 껀수를 준비해야겠다. 사람이 사는 데 돈이 들면 얼마나 들까. 애들은 나가서 살게 될 터이니 두 늙은이가 아웅다웅할 부엌 딸린 방 한 칸과 책을 읽을 만한 ‘궁극의 공간’ 둬 평이면 되지 않을까.

 

전원주택이란 호사스런 말을 하자는 게 아니다. 산자락 밑으로 기어기어간 길들과 거름냄새 묻은 논밭과 이름 모를 풀꽃을 닮은 사람들과 너나들이로 살고 싶은 것이다. 나만이라도 돈의 노예, 시간의 노예, 문명으로 가장한 기계의 노예로 살지 말아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집 마당에 발 딛을 데만 빼놓고 채송화를 심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낮게 살아갈 것이다. 한때 절망이었고 희망이었던 채송화가 저녁햇살에 빛난다.

 

△이현옥 씨는 완주 출신으로 〈우석대신문〉과 〈문화저널〉 등에 책과 관련된 다수의 산문을 발표했다. 현재 우석대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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