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를 기점으로 하여 태양의 고도가 살짝 기울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폭염은 자리를 뜨고 산들바람이 밀려온다. 그 위풍당당 했던 초목은 기세를 접고 겸허히 옷깃을 여미며 결실을 준비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찬란했던 생을 한 개의 꼬투리에 고이 접으면서 오로지 자손 번성의 염원만을 안고 고개 숙인다.
오늘이 음력 칠월 이십이일인가 삼일인가. 하현달이 하얗게 빛나는 이 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데, 따끈한 국화차 한 모금 입을 축이고 친구가 카톡으로 보내준 노래 ‘가을 사랑’을 듣는다. “나는 가을 사랑은 싫어” 라고 답장을 보내고 생각하니 싫어도 여름은 가고 가을은 오는 걸….
나도 무얼 접어야 할 것 같아 가슴이 적막하기만 한데 귀또리 한 마리가 깡총 문덕을 넘어든다. 그 찬란한 여름, 마음껏 풍요를 만끽하고 이젠 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 안을 엿보는 귀또리의 신세가 가엽다 생각하니 “이 밤 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조지훈 님의 ‘승무’가 떠오른다.
내 심장을 휘어 감는 시,
나는 가을 이면 이 시에 취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바람 한 점 없는 밤,
하늘은 청명하고 별은 빛나는데 이지러진 하현달은 하얀 빛을 발하며 서쪽을 향하고,
황촉 불을 밝힌 조촐한 법당. 앞마당은 하얗게 빛나고 뜰 뒤뜰엔 오동나무가 큰 잎을 펼치고 있고, 까맣게 짙은 그림자는 동쪽으로 드리워 있고, 앞뜰에는 이러저러한 가을꽃들이 찬 이슬에 숨죽이고, 법당 처마 끝에 달려있는 조그마한 풍경, 댓돌엔 스님의 흰 고무신이 두어 켤레….
법당 안엔 빈대에 황촉불이 밝혀 있고,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얇은 사 하이얀 고깔에 감추오고 긴소매 도포를 입고 하얀 버선을 신고 춤을 추는 미모의 여승, 서럽도록 고운 빛이 흐르는 가냘픈 얼굴,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까만 눈동자를 어쩌다 한 번씩 살포시 들어 먼 하늘을 응시할 때 복사꽃 고운 뺨, 그 고운 얼굴에 맺힌 눈물 두 방울. 긴소매를 휘어 감았다 다시접어 뻗으면서 날아갈 듯 돌아서며 살포시 스치는 작은 버선 발.
세속의 번뇌를 긴 소매 자락에 실어 먼 하늘에 날려 보내고 온몸을 휘돌려 대자대비의 은총을 염원하는 여승의 춤사위는 미의 극치를 넘어 천상의 향연으로 펼쳐진다.
이 시는 이 밤을 정적으로 몰아넣는다.
산천의 잎 하나 흔들리지 못하게 한다. 그 큰 오동잎도 움직이지 못하고 소리 없이 한 잎 수직으로 떨어뜨린다. 법당 추녀 끝의 풍경조차 울리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법당 안 황촉불도 말없이 녹게 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잠들게 하고 오로지 승무를 추는 여승의 춤사위만을 펼쳐낸다. 한기에 몰린 귀또리도 울지 못하고 온밤을 지새울 뿐 오로지 여승의 춤사위가 바뀔 때 마다 옷깃 스치는 소리만 은은할 뿐이다. 온 세상을 잠들게 해야 승무의 옷깃 스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그 어떤 소리도 용납하지 않은 시인의 시적 기교에 감탄하면서 깊어가는 가을밤을 지새운다.
적막한 이 가을 밤, 세상이 잠들어야만 들을 수 있는 춤사위의 옷깃 스치는 소리를 듣노라니 조촐한 법당 앞마당에 진하게 드리운 오동나무 검은 그림자가 달빛이 희면 그림자는 더욱 검고 짙어지는 이치를 가르쳐 준다.
번뇌가 클수록 대자대비의 은총이 더욱 두터우리라는 깨달음으로 고요한 이 밤 춤추는 여승의 옷깃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조지훈 님의 시 ‘승무’를 읽는다.
△송영수씨는 전주MBC 친절생활수기 대상과 전북여성백일장 수필부 장원을 차지했다. 한국문인협회 진안지부 4대 지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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