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형매장을 갔었다. 꼭 무엇을 사겠다는 것보다는 둘러보는 눈요기를 겸한 나들이였다. 아내와 카트를 밀고 다니며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식품매장을 지나칠 때는 아내가 부지런히 맛보기 음식을 가져왔다. 점심 무렵 시장하던 참이라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이쑤시개에 찍어주기도 하고, 작은 종이컵에 담아주기도 했다. 처음이라서 어색하기도 했고 맛본 뒤에 그냥 돌아서기도 미안했다. 하지만 모두 다 그러는 걸 어찌하랴.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나의 생애는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조금씩 맛보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농구를 좋아했으나 그때뿐이었다. 축구와 배구도 해보았지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탁구와 배드민턴을 하다가 골프에 입문했다. 그런데 요즘 골프채 가방은 거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수영, 스케이트도 해보았지만 맛보기 정도였다. 여가에 장기, 바둑을 즐겼던 젊은 날도 있었고, 고스톱을 치며 날밤도 새웠다. 등산에 흠뻑 빠진 때가 있었고, 낚시에 미친 시절이 아스라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다방 레지가 건네는 모닝커피를 마셔보았고 비싸다는 루왁 커피 맛을 본 적도 있다. 요즘은 아메리카노 커피도 잘 마시며 봉지 커피도 즐긴다.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 마셨고 소주, 맥주, 양주, 마오타이, 보드카, 럼주도 마셨다. 물고기도 잡고 토끼사냥도 해보았다. 죽을 고비도 넘겨보았고 교통사고도 당했다. 이런 병도 앓아보았고 저런 병으로 입원하기도 했다.
영어, 독일어, 중국어를 배워보았지만, 지금은 도로아미타불이다. 독서를 유일한 취미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책을 멀리한 지 오래다. 한때 시를 쓴다고 끙끙댔지만 이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노래를 부르고 드럼을 배워보았건만 추억의 한 조각으로 남았을 뿐이다. 여행을 다니며 명승고적도 답사했다. 자전거, 전차, 기차, 자동차, 배, 비행기도 타보았다. 학창시절 이 학교 저 학교도 다녔고 교직생활 중 이런저런 학교도 근무 해보았다. 새마을운동에도 참여하고 데모 현장에도 가보았다. 야당에도 투표해보았고, 여당을 믿어보기도 했다. 후진국에서 시작하여 개발도상국, 선진국 문턱에서도 살고 있다.
개근상, 우등상, 훈장도 받았다. 좋은 사람도, 사람도 만났다. 세월의 풍상 속에 많은 친구들이 내 곁을 스쳐 갔다. 군대에서 예비군에서 훈련도 지겹게 받았다. 여자를 사랑해 보았으며, 결혼하여 자녀와 손자 손녀에 대한 사랑도 알았지만, 부모, 형제와의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다음 세상을 그리며 성당에도, 교회도 나간다. 불교학생회에 가입해 보았고, 신흥종교 교단에도 나가보았다.
10대의 풋풋한 삶도 맛보았고, 청년, 중년, 장년의 삶을 살아왔다. 농촌 초가집에서 대가족으로도 살았고, 지금은 도시의 아파트에서 부부와 조용히 노년의 삶을 살고 있다. 세상에 할 일이 너무 많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중 몇 가지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나는 무엇이든지 진득하게 몰두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맛보기로 살아온 것 같다. 때문에 무엇이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쫓기는 것도 아닌데 남은 생애 동안 깊이 파고들 것을 찾고 싶다. 수필에 입문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슬그머니 꾀가 나고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그렇다고 달리 몰두할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수필의 맛보기도 끝났다. 더 깊이 몰두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생각할 때가 온 것 같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을 노래한 천상병 시인도 세상 눈요기를 맘껏 하고 떠나지 않았을까? 나는 오늘도 못 다한 삶을 맛보기 위해 분주하게 나들이를 해야 할 것 같다.
△김현준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으며, 남원 한빛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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