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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빈 밑동

▲ 김형진

창밖에 펼쳐진 하늘이 아스라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 물결 잃은 대해大海 같다. 앞 동棟 옥상 가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환풍기도 까딱하지 않는다. 그 뒤 뾰족 선 안테나가 쓸쓸하다. 이런 날엔 열 마리도 더 되는 까치 가족이 몰려와 서로 어르는지, 다투는지 한 바탕 옥상을 휘젓다가 약속이나 한듯 안테나 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았으면 좋으련만.

 

옥상 바로 밑창에서 흘러내린 녹물, 남루한 벽이 보기 싫어 얼른 오른쪽으로 눈길을 옮긴다. 정문에서 시작한 철제 울타리 아래, 토담처럼 세로로 늘어선 철쭉. 지난봄 이 우중충한 아파트에 빨강, 하양, 노랑으로 환한 빛을 뿜어주던 것들이다. 그 뒤에 듬성듬성 서 있는 살구나무, 배롱나무, 감나무가 눈길을 붙잡는다. 지난여름 보는 것만으로 침샘을 자극하던 노란 살구,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계속하던 주홍색 백일홍 꽃, 지닌 가을 가지가 휘게 열려 있던 아기주먹 만한 감들. 지금은 꽃도 열매도 다 떨구고 거무죽죽한 빈 가지로 허공에 머물러 있다. 지나간 날들은, 그 날들이 설령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되살아난다고 하던데, 내게 지나간 날들은 하나같이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 우중충하다.

 

아파트 정문은 문이 없어 좋다. 벗겨야 할 빗장도, 끌러야 할 자물통도 없어 좋다. 경비실에 사람이 있다지만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 누구 하나 통제하지 않아 좋다. 허리 굽은 노파가 유모차 같은 보행기를 밀고 나가고 이어 검은 잠바를 입은 중년 남자가 활갯짓을 하며 나간다.

 

얼마 뒤 택시 한 대가 정문 앞에 선다. 택시 문이 열리고 내리는 사람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택시를 바라본다. 누가 찾아온다는 연락을 받은 것도 아닌데 반가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다. 택시에선 젊은 부부가 이제 막 걸음을 걷기 시작한 듯한 아이를 데리고 내린다. 그들이 내리자 택시는 빈차 표시등을 밝히고 사라진다. 허전한 가슴을 내버려둔 채 눈은 계속 정문에 멎는다. 과일장수 트럭이 정문 안으로 들어온다. 들어와 1동과 2동 사이 주차장에 서더니 “농장에서 직송한 꿀 사과가 한 보따리에 오천 원. 마트에서 만 원짜릴 싸게 싸게 파니 싸게 싸게 나와 가져가세요.”를 반복한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본다. 야트막한 산의 기슭, 앙상한 잡목들 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늙은 오동나무에 눈을 맞춘다. 몇 해 전 몰아친 태풍에 꺾인 중동 북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다. 태풍이 지나간 뒤 복구요원들이 톱질을 하기에 꺾인 가지를 잘라내는가 했는데 잔가지만 잘라 놓아 그 모양이 옷 다 벗은 늙은이의 삭신 같다.

 

몇 해 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앞 전나무 숲으로 가는 길을 걸은 적이 있다. 길가에 있는 거대한 나무통 안에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들어가 부둥켜안고 환희 웃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사방으로 벋은 어린이 몸통 굵기의 뿌리 위에 얹혀 있는 속이 빈 밑동이었다. 수령 육백 년이 넘은 전나무 고목이 지난여름 태풍에 부러진 것이라 했다. 속은 두 사람이 들어가 부둥켜안고 남을 만큼 넓은데 갓은 절구통 둘레만큼이나 얇았다. 밑동에서 우둠지까지 속을 단단히 채우며 나이테를 늘려왔을 긴 세월. 위의당당威儀堂堂했을 모습은 간데없다. 그 밑동 바닥에서 회색 바람이 일어 맴도는가 싶더니 이내 가슴 안으로 밀려듦을 느꼈다.

 

중동이 꺾여 불안하게 늘어져 있는 저 오동나무도 밑동이 비어 있을 것이다. 늙어 속이 비는 것이 어디 나무뿐이겠는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묵으면 묵을수록 속이 비어, 거기서 이는 바람이 갈수록 거세질 테니까.

 

△김형진 수필가는 〈계간수필〉에서 수필과 평론으로 등단했으며 '수필문우회' 회원이며 '토방' 동인이다. 수필집 〈종달새〉, 〈흐르는 길〉, 〈바딧소리〉와 수필평론집 〈이어받음과 열어나감〉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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