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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 한 그릇, 정 한 그릇

▲ 최정순
애호박과 감자를 빚어 넣고 뜨끈하게 끓인 수제비는 새큼하게 익은 열무김치와 먹으면 찰떡궁합. 땀 흘리며 코를 훌쩍이며 정신없이 먹던 시절이 아련하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워 씹을 사이도 없이 목줄을 타고 넘어가는 그 맛이야말로 어떤 음식에 비할까.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속이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찔레꽃이 만발한 5월의 언덕엔 밀밭도 덩달아 누렇게 익어갔다. 찔레꽃 우듬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손바닥에 비비면서 ‘쓴 것 줄게 단 것 달라’는 주문을 외우면 우듬지는 거짓말같이 달달했다. 그리고 심심하면 밀밭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깐깐한 주인 할아버지의 말총머리 같은 밀 까끄라기가 두렵지도 않았나 보다. 악동들은 겁 없이 이삭을 뽑아 껍질을 비벼 버리고 입안 가득 밀알을 털어 넣고 씹었다. 뜨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잘근잘근 씹었다.

 

말총머리 할아버지 눈을 피해 내달리다 보면 신기하게도 ‘껌’이 만들어졌다. 껌을 만들다가 까끄라기가 목에 걸려 맨밥 한 숟가락을 씹지도 않고 삼켰던 일도 있다.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고 깩깩거렸던 그 동무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밀껌’의 추억이 새삼스럽다.

 

익어 갈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인데, 통통히 여물어가는 밀 모가지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고집쟁이 동생이 밀 이삭을 닮았나 싶다. 어머니의 회초리 앞에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고개를 쳐들고 말대답을 하여 매를 벌던 동생이었다. 엄동설한을 살아낸 까끄라기가 밀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일까. 아니면 하늘을 향하여 한없는 겸손을 더 내려주시라고 우러러보는 것일까? 이 순간 나도 밀 이삭처럼 하늘을 우러러본다.

 

밀 수확이 끝나고 나면 밀이 밀가루로 변신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밀이 밀가루로 변신하는 날이 왔다. 맨날 허기진 배를 채워준 보리밥은 안중에도 없다. 수제비, 부침개, 칼국수, 막걸리를 넣어 만든 찐빵 등을 생각하며 방앗간에 가신 아버지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지게에서 내린 밀가루는 아직 뜨뜻했다.

 

동생과 나는 밀가루 포대에 들러붙어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도 하고, 강아지도 코를 킹킹대며 토방에 떨어진 밀가루를 핥기도 했다. 막 알을 낳은 암탉이 몇 번 쪼아보더니 이내 부리를 제 겨드랑이에 닦아버렸다. 지금 같은 세상에 밀가루 타령이라니, 그래도 그때가 그립다.

 

수제비를 끓이는 날은 어머니가 밭에 나가 일을 할 수 없는 비 오는 날이 제격이다. 밀가루에 물을 조금씩 주어가며 반죽을 한다. 뽀송뽀송한 밀가루가 물을 만나면 찰기를 드러내며 엉겨 붙는다. 입 안에 털어 넣은 밀알이 씹히고 씹혀서 껌이 되듯이 손아귀에서 주물러지는 밀가루는 주무를수록 부드러워 진다. 마치 어릴 땐 손이 맞아 찌그락 짜그락 싸우던 형제들이 커가면서 형제애를 알아가듯이 밀반죽이 잘되면 손바닥에 달라붙지도 않는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멸칫국물을 끓인다. 그러면 눅눅한 방바닥도 모처럼 고슬고슬해진다. 솥 가득 수제비를 끓이는 날이면 이 집 저 집 굴뚝에서도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멸칫국물 냄새가 사방으로 소문을 냈다. 수제비 한 그릇이 정과 함께 토담을 넘어 친구 ‘말례’네 집으로 넘어가면 부침개 한 접시가 정과 함께 우리 집 밥상에 올랐다. 또 뒷집 ‘응구’네 집에서 찐빵이 정과 함께 뒤란 담을 넘어왔다. 수제비뿐만 아니라 농기구며 잔돈푼까지도 빌려 쓰고 빌려주면서 서로 정을 나누며 살았다. 이렇게 사는 모습이 이웃사촌이 아닌가. 점심에 수제비나 떠볼까?

 

△최정순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속빈 여자> 를 출간했고, 제7회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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