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11 18:52 (Tue)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금요수필
일반기사

장롱 속의 정장 - 이희근

▲ 이희근
대부분 장롱 안에는 낡은 정장이 몇 벌씩 있다. 철이 지나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사철 장롱을 지키는 것들을 말한다. 많이 입었지만 버리기가 아까워 그냥 보관하거나, 고작 몇 번 입었을 뿐인데 유행이 지났거나 나이 때문에 몸에 맞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데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냥 걸치고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 용기는 참으로 가상하다.

 

춘분이 지나고 연두색 애벌레 모양의 꽃으로 단장한 수양버들과 노란 입술연지를 바르고 입가에 방긋 미소 띤 개나리 산수유가 손짓하면 장롱 속의 정장을 걸치고 길에 나선다.

 

친구들과 함께 모악산에 오르던 어느 날이었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다른 때보다 등산객들이 많았다. 그런데 앞장서서 걷던 사람 중 하나가 길가의 벤치에 주저앉다시피 엉덩이를 걸치고 다리가 아파서 더 걷지 못하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이 옆에 와 앉더니 “어떤 놈이 건강에는 등산이 제일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네” 하며 다리를 뻗고 앉았다.

 

걷기운동이 최고라며 허리춤에 만보기를 찬 채 죽을 둥 살 둥 앞만 보고 걷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걷는 사람들을 보면 걷기 위해서 사는 것인지 아니면 만보기를 위해서 걷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한 친구는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점핑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참여하여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갑자기 헉헉거려 119 신세를 지고 병원에서 심장혈관 확장 시술을 받았다. 운동할 때 과욕은 금물이다. 나이가 들면 작년과 올해가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괜히 옛날만 믿고 강행을 하다가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수선되지 않은 장롱 속의 정장을 걸친 꼴이 된다.

 

건강에 좋다는 운동은 무엇이든지 즐기는 친구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골프도 치고, 거의 매일 헬스장에 다닌다. 등산도 즐기고 걷기운동도 하며 건강에 자신이 있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친구다. 그런데 그에게 이상한 증후가 나타났다. 밤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나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기고 개의치 않으려 했지만 개선되지 않자 큰 병원으로 갔더니 멜라토닌 부족으로 나타나는 불면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계속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야 현재의 의술로도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병은 자랑하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불면증 이야기를 호소하고 다녔다.

 

드디어 한 지인으로부터 발치기운동이 수면에 좋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 운동을 하면 발가락 끝부분의 모세혈관이 되살아나서 혈액순환의 개선은 물론, 시력 증진과 불면증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처음에는 그까짓 발치기가 무슨 운동이라고 도움이 되겠느냐고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알려준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허실 삼아 발치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 후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모처럼 숙면에서 깨어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에 급체했을 때가 떠올라 무릎을 쳤다. 손끝과 발끝이 오장육부와 통하는 기관이라는 사실도 그때야 깨달았다. 그때부터 친구는 발치기운동의 마니아가 되었다. 발치기운동은 격렬한 신체적 활동이 필요 없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운동이다. 특히 실외활동을 버거워하는 노인들에게 안성맞춤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몸에 맞게 잘 수선된 장롱 속의 정장이다.

 

△이희근 수필가는 정읍 출신으로 계간 ‘문학사랑’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원종린수필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산에 올라가 봐야> , <사랑의 유통기한> 등이 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