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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주 안성사람

이재숙
이재숙

내 고향은 무주 안성면 금평리 궁대마을이다. 나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 궁대에서 태어났다. 다른 때 같으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동네 사람들 모여 삶은 옥수수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지만 그 해엔 완전히 세상이 달랐다. 지금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는 막내 작은할머니의 말씀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된다.

“아야! 하늘엔 쌕쌕이가 날고 불빛만 보면 폭격을 하니께 호롱불을 요강 안에 켜놓고 네 에미가 널 낳았다. 미역국도 못 먹고 낳아 농게 딸인디, 어찌나 울어대던지, 그도 잉 너 땜에 네 애미가 살았어 밤에 덕유산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오면 젊은 여자보고 눈빛이 달라져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머리에 얹고 산속으로 데려가기도 할 때잉게, 이제 막 얼라를 낳은 산모라 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단다. 네 할미가 대신 보리쌀이랑 산으로 이어다 주었었지.”

이렇게 말하는 게 대수롭지 않은 그 옛날 일이 실은 큰 변란과 슬픔의 이야기다. 밤에 보리쌀을 이어다 준 일로 빨갱이로 몰려 할머니는 둘째 아들을 잃었고, 밤엔 빨치산들에게 반역자로 몰려 아들 둘을 한꺼번에 잃었다. 많은 젊은이가 죽어 나갔고 휴전이 되자 아버지와 작은삼촌 두 명만 살아남았다.

궁대마을은 독특한 지형을 갖춘 동네다. 뒷산은 적당히 높아 땔감을 구하거나 산나물을 깨러 아낙들이 오르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앞산이라 불렀던 산은 뾰족하게 솟은 커다란 한 개의 봉우리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남자 상징의 앞산 때문에 우리 동네에는 남자아이들이 넘쳐났다 한다. 나도 아들 사형제에 외동딸이었고 아버지도 여자 형제가 없었고 할아버지도 4명의 남자 형제들만 있었다. 명실공히 삼대에 걸쳐 딸이 하나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나의 또 다른 이름은 양념딸이다.

지금은 사전 마을 옆으로 길이 넓게 나고 큰길에서 몇백 미터만 들어가면 궁대마을을 만날 수 있었지만, 예전에는 안성면 소재지로 나오려면 짱짱하게 10리를 걸어 금평리를 지나야 갈 수 있어 어린 나에겐 멀고 먼 길이었다. 찐 감자나 고구마를 손수건에 싸 들고 한없이 걸어야 했다. 유독 걷기 싫어하는 엄청 귀한 양념딸을 위해 아버지는 대처로 우리들을 내보내셨을 것이리라.

우리는 담력을 시험한다고 어둑해지면 앞산에 가려고 오랫동안 모의도 하고, 내기를 걸곤 했지만 나는 한 번도 아장터가 있는 곳은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장터에서 흘러오는 냇물은 너무도 깨끗하고 시원해서 여름엔 여자아이들도 목욕하곤 했다. 물론 서너 명 이상 모여서 말이다. 우리는 뻐꾸기 울음에도 깜짝 놀라 팬티만 입고 도망 오곤 했다.

지금은 칠현계곡 쪽에서 명천을 지나 우리 동네 뒤쪽으로 2차선 도로가 나 있다. 앞산에 살던 호랑이 부부는 덕유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양지바른 앞산 모퉁이에서 깊은 잠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대단한 교육열 덕분에 전주에 나와 공부할 수 있었다. 앞산의 정기인지 덕유산 치맛자락 끝, 그 바람 덕인지 우리 형제들은 잘 자랐고 일 년에 두어 번씩 안성 궁대 허물어지진 집터에 차들을 대고 동네 어른들을 찾아뵙고 성묘를 하곤 한다.

지금은 열댓 집에만 사람이 사는 궁대마을은 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조상님들이 나지막한 선산에서 지키고 계신다. 나는 어디서나 자랑스럽게 ‘무주 안성사람’이라고 말한다. 왼쪽 멀리 덕유산을 두어 따뜻한 그림자가 깊고 앞산의 봉우리는 힘이 넘쳐 자손들이 번성했다. 앞산을 싸고 흐르다 고인 작은 호수는 자비로움과 인정을 배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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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숙 수필가는 전주일보 신춘문예와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문입협회, 전북시인협회 등에서 활동 중이다. 열린시문학상, 국제해운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젖은 것들은 향기가 있다> 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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