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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시간을 건너온 목소리, 지역문화에서 원로예술인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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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정(독립기획자, 전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처음부터 큰 기대를 품고 만난 자리는 아니었다. ‘원로예술인 인터뷰’라 하면 대개 정해진 질문과 정리된 연보, 미화된 회고가 오갈 것이라 짐작했다. 네 분의 원로예술인을 만났고, 각자의 분야는 서로 달랐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 예상은 빠르게 무너졌다. 나는 어느새 질문자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되었고, 기록자가 아니라 지난 시간을 탐색하는 여행자가 되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었다. 변산마실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부안에 예총이 어떤 경로로 만들어졌는지, 최초의 미술단체 청목회가 왜 당구장이나 다방에서 전시할 수밖에 없었는지. 70-80년대 밴드문화와 클럽문화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리고 그것이 독학으로 악기를 배우고 공연자로 성장한 1세대 예술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생태계였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낡아빠져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 말해지는 문화예술회관이나 문화의 전당, 석정문학관은 삼십여년 전 이들이 지역 내의 무수한 반대 의견을 뚫고 만든 최신식 문화거점이었다. 

즉, 지금 존재하는 지역문화의 구조들이 어떤 우연과 필요, 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미흡해 보이는 결정들조차, 그 당시 조건 속에서는 최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예산도, 제도도, 인식도 부족했던 시절에 무엇인가를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성취였다.

그래서 더 이상 “왜 그때 더 잘하지 못했나요?” 라는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앞선 세대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그들이 떠안았던 불확실성과 고립을 상상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지역문화의 토대는, 완성된 설계도가 아니라 시행착오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이들의 말이 증언하고 있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기억과 자료의 상관성이었다. 어떤 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분일수록 자신의 창작물도 잘 정리하여 갖고 계셨다. 그러나 어떤 분은 활동하는 동안 잦은 이주로 자료가 소실되거나 장르의 특성상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공연예술 분야가 특히 그러했다. 미술이나 문학은 작품집이나 도록이 그나마 남아 있었지만 국악이나 대중음악은 영상자료는 고사하고 사진 몇 장, 악보 몇 장이 다였다. 그러니 구술을 하는 과정에서도 정확한 연도나 정황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대부분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원로예술인들은 빛이 났고 청년이 되었다. 

지역문화에서 원로예술인의 위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가능하게 한 시간의 몸이다. 그들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기에 더 중요하다. 공식 문서나 자료로 남길 수 없었던 이유, 당시의 선택이 갖는 한계, 그리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문장을 증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로예술인을 예우해야 한다는 말은 자주 공허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는 일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지역문화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공동체는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다. 원로예술인은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의 깊이를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 위에서, 지금의 우리는 비로소 다음 선택을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전민정(독립기획자, 전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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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예술인 #지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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