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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전주 전 낙수정 출토 고려 범종

산사의 아침저녁으로 잔잔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국립전주박물관 상설전시실 2층 미술실에 들어서면 이와 비슷하게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 왠지 경건한 자세로 관람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렇듯 길게 울려 퍼지는 범종의 장엄하고도 청명한 소리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주며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참회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범(梵)은 신성(神聖), 청정(淸淨)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교 의식에 사용하는 종을 범종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지옥에 있는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아무런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가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한다(극락정토, 極樂往生)는 것이다. 또한 불법의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의미도 있다. 보물 제 1325호인 이 범종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전라북도 부호 박영근이 낙수정(樂壽亭, 현재 전주시 완산구 교동)을 수리하다가 발견된 것이다. 당시 일본 총독 사이토오 마코도(齊藤實)에게 기증하여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이 범종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오던 다카하라 히미코(高原日美子)씨가 1999년 기증하면서 70여 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는데 의미가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중심으로 4명의 비천상이 구름 위에 꿇어 앉아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하고 있다. 이 범종은 문양 및 배치가 고려 범종의 요소인데 비해, 형태는 통일신라 범종과 비슷하다. 또한 범종의 시료분석 결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鐘, 725년)의 성분비와 같음이 밝혀져, 맑고 장엄한 소리를 내기 위한 전대(前代)의 전통 제작방법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이 범종은 신라 말~고려 초 범종의 양식변천과 제작방법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님과 동시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김혜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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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1 20:35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최석환이 그린 포도병풍

포도는 알알이 맺힌 열매, 넝쿨져 뻗어나가는 줄기의 속성으로 인해 다산과 번창을 상징하며 예로부터 시와 그림, 공예품에 애호됐다. 우리나라에서 포도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 처음 보이며 포도가 회화의 소재가 된 것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였다. 조선 말기에는 길상성과 장식성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인해 포도 그림의 수요가 증가하게 됐고, 그 가운데에는 전북의 화가 낭곡 최석환이 있었다. 19세기에 활동한 최석환에 대한 기록은 전북 옥구군 임피면(현 군산시 임피면)에 거주하며 포도를 잘 그렸다는 내용이 유일하다. 그러나 최석환은 1870년을 전후하여 많은 양의 포도병풍을 남겼다. 포도병풍(墨葡萄屛)은 1870년 전후에 형성된 최석환 포도병풍의 전형양식을 보여준다. 최석환은 포도넝쿨 줄기를 가장 중요하게 표현하였다. 포도 넝쿨의 힘찬 동세를 표현하기 위해 진한 먹으로 초서의 한 획처럼, 서예 기법으로 넝쿨을 그렸다. 포도알은 농묵과 담묵을 번갈아 채색하여 알알이 표현하였고, 병들어 상한 포도잎을 표현하는 등 더욱 사실적이고 자연스런 표현이 엿보인다. 이는 17세기에 활동했던 이계호(1574-1645 이후)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하단에는 을묘지납육일, 관지에는 낭곡, 최석환인이라 찍혀 있어 최석환이 1879년 12월 6일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방 화가였던 최석환은 이러한 연폭 포도병풍을 다수 제작했는데, 이는 19세기 중앙 화단의 유행을 따른 것이다. 동시에 당시 호남 화단이 수요자의 취향에 맞게 그림을 제작하고, 중앙화단의 서화를 소장하였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며 19세기 호남 화단이 중앙 화단과 긴밀한 교류가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박혜인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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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4 20:26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완산부지도(完山府地圖)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지도가 제작됐다. 범위를 가지고 분류하자면, 지역의 모습을 담은 지도에서 넓게는 세계의 모습을 아우르는 세계지도가 존재했다. 이러한 지도들은 대부분이 현재의 축척을 사용하지 않고 하늘에서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형태로 제작됐고, 이러한 지도를 회화식 지도라 부른다. 회화식 지도는 지역을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지도 안에 숨겨진 다양한 상징과 해석의 장치들이 담겨 있기도 하다. 고지도에 담겨진 이와 같은 상징체계들은 고지도를 연구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되기도 하며, 지역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19세기 전주의 모습을 그려낸 완산부지도(完山府地圖)는 지역의 지도이자 회화식 지도이다. 2015년에 보물로 지정된 이 지도는 수많은 고지도 가운데 어떠한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았기에 국가지정 문화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10폭의 병풍으로 제작된 거대한 지도. 지도를 길을 찾는데 사용한다는 지금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거대한 병풍지도는 그 쓰임을 알기 어렵다. 또한 이 지도는 방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배치를 하고 있는데, 풍남문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좌측으로 90도 회전된 형태로 지도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실제 산세보다 더 험준한 형태로 산들이 연이어 그려져 있으며 전주 성읍을 감싸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왕조가 발원한 땅 전주, 500년의 세월동안 그 이야기는 강화되고 전설이 되어 내려오게 됐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이가 보아도 산줄기와 물줄기가 안온하게 감싸 안고 깊은 내력을 간직해 주는 곳, 전주는 그 모습에 합당한 땅이었다. 아니 불완전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곳이 되어야 옳았을 것이다. 풍수에 비보풍수가 있듯, 불완전한 땅의 모습은 지도에서 붓터치와 함께 보완됐다. 그리하여 전주의 모습은 생기를 얻고 땅의 모습은 전설을 잉태한 곳으로서의 당위성을 부여받아 한 폭의 지도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정대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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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5 20:17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고창 봉덕리 무덤 출토 금동장식 신발

고창 아산면 봉덕리 무덤군에는 길이 72미터, 높이 8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다. 전통적인 마한 양식의 무덤과 백제의 돌방무덤이 함께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5세기 중반 고창 지역 최상위 계층의 무덤이었으리라 짐작된다. 2009년 확인된 4호 구덩식 돌방무덤 안에는 금동장식 신발과 중국제 청자, 작은 단지 장식 구멍항아리, 청동잔과 잔받침, 칠기 화살통, 큰칼, 금귀걸이 등 무덤 주인의 권세를 말해주는 각종 고급품과 사치품이 고스란히 출토되었다. 이 중 금동장식 신발은 당시의 장례 풍습을 잘 보여주는 부장품으로, 우리나라 삼국 모두에서 유행하였다. 화려한 장식과 실제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내구성이 약해서 무덤에 넣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제지역에서는 현재의 경기 화성, 강원 원주, 충남 공주서산, 세종, 전북 익산, 전남 나주고흥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곳들은 당시 백제 중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덕리 출토품은 바닥에 18개의 작은 금동 못과 함께 발등과 뒤꿈치를 2개의 옆판으로 연결하는 등 백제 금동장식 신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옆면은 거북이등껍질 무늬 안에 용과 새 등을 새겼는데, 당시의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빈 공간 사이에 새겨 넣은 사람 얼굴 모양에서 백제인의 해학을 엿볼 수 있다. 신발의 형태는 나주 정촌에서 나온 것과 유사하고, 서산 부장리에서 출토된 금동 관모와 무늬가 거의 동일하다. 이처럼 수준 높은 금속 공예품은 숙련된 장인 집단이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백제 중앙에서 만들어 각 지역으로 보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 지배집단은 금동장식 신발 외에도 금동관, 금은장식 둥근 고리 큰칼 등을 제작하여 지방 유력자들에게 선물하였다. 이것은 유력자들의 권위를 인정해줌과 동시에 그 영향력 아래에 두려는 정치적 수단 중 하나였다. 봉덕리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장식 신발과 여러 유물들은 고창지역 집단이 마한을 비롯하여 백제 중앙, 일본,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맺으며 성장하였던 명실상부한 지역사회의 중심세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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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18 19:48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채용신이 그린 전북 인물의 초상화

옛 사람들의 삶과 예술, 세월의 향기가 배여 있는 유물들. 전북에 둥지를 틀고 있는 박물관의 소장 유물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선대에게 물려받았고 후대에게 전해줄 소중한 문화자산, 아끼고 지켜 나아갈 다양한 유물과 그것에 얽힌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차례,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유물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지난 1990년 10월 문을 열었고, 현재 소장품은 7만여 점에 이르고 있습니다. △채용신이 그린 전북 인물의 초상화 채용신 초상화. 19세기 말~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한층 더 사실적으로 인물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또한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주인공의 요청에 의해 금전적 대가를 받고 제작되는 시대가 됐다. 그런 변화의 움직임 한가운데에 바로 석지(石芝) 채용신이 있다. 그의 손끝에서 높은 관직을 역임한 인물 뿐 아니라,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지역 인물도 주인공이 됐다. 채용신은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나 칠곡군수 등 관직에 종사했으며, 1905년 전주로 내려와 익산, 남원 등지를 다니면서 우국지사와 문인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1941년 세상을 떠난 후, 1943년에는 서울의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유작전이 열리기도 했다. 그는 고종高宗 등 왕실의 인물에서부터 문인, 부부, 여인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물 초상을 그렸다. 권기수(權沂洙) 초상은 채용신이 그린 전북 인물의 초상을 대표한다. 흑립(黑笠)을 쓰고 두루마기에 은은한 옥색 전복(戰服)을 걸친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전신상이다. 왼쪽 발을 드러낸 채 앉아 있으며, 소매 밖으로 나온 양손에 부채와 안경을 들고 있다. 화면에 적힌 글을 통해, 권기수의 63세 모습을 정산군수(定山郡守)였던 채용신이 1919년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권기수는 언제 태어났는지, 관직생활과 업적은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이제 당당하게 초상화의 주인공이 됐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제1원칙은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일호불사一毫不似 편시타인便時他人)였다. 극세필의 붓질을 무수히 반복해 입체감과 표면 질감을 살린 권기수의 얼굴 묘사를 통해 마치 사진 속 인물을 보는 듯한 생생함을 전달한다. 이러한 채용신의 극세필 화법은 그의 호 석지를 따서 채석지 화법이라 불릴 정도였다. 이렇게 채용신의 붓끝으로 당시 전북에 살았던 인물들의 생생한 모습이 지금까지 전해져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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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1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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