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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분꽃

저녁나절 살랑대는 바람에 마음 자락이 헛헛하다. 어려서부터 이 맘 때 쯤이면 가끔 콧물을 훌쩍이곤 했다. 특별히 뭔가가 서러워서도 아니고 억울해서도 아니다.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막연히 허전하곤 했다. 그럴 때 위안을 받은 것이 있다. 화단에 핀 분꽃이었다. 온종일 입 다물다 저녁나절이면 봉긋 피어나던 분꽃은 꼭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큰 딸이면서도 어머니와 그렇게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다. 어머니로서는 맨날 병치레만 하는 딸이 그리 미덥지 않으셨는지 마음이 들지 않아 하셨다. 나 또한 그런 어머니에게 곰살맞게 굴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설라치면 자꾸 더 야단을 맞고 그것이 억울해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분꽃은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까만 씨 속에 하얀 분이 쌀가루처럼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 엄마 노릇도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에게 '너 같은 딸년 낳아서 키워보면 내 심정 알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딸이 없어서 그때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왜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리 서러움을 느끼곤 했을까? 어쩌면 내가 그렇듯 병치레로 마음고생할 것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머니와의 관계가 이리되리라는 암시였을까? 솔직히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시는 날은 왜 그리 눈물이 났었는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어머니와 나는 어떤 인연이기에 이리 묘한 감정만 돌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와 나는 꼭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꼭꼭 숨어있는 마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사이. 이제 그만 이런 술래잡기를 끝내고 싶은데 아직도 아닌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눈물을 흘린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아직도 나는 술래라는 것…. 요양원을 지척에 두고도 자주 가지지 않는다. 어느 땐 요양원 근처까지 갔다가 건물만 바라보다 오기도 한다. 주변만 빙빙 거리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온해진다. 어린 시절 저녁나절을 생각하게 되고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난다. 마치 어머니의 냄새 같기도 하고, 내 눈물의 흔적 같기도 하다. 어머니의 꾸중이 마냥 서럽기만 했던, 그 헛헛했던 날들의 기억이 왜 이런 감정으로 되살아날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감정이 그리 싫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일까? 자꾸 삭막해져가는 마음 구석에 오롯이 남아 촉촉함을 유지해 주고 있다. 사람의 감정이란 꼭 좋은 것만을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보다. 마음 아픈 상처도 나름대로 기억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아픔이 있었기에 다른 일들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고 살아갈 활력이 돋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베란다에 '분꽃'을 심은 것도 그 감정을 더욱 깊이 느끼고 싶은 것 아닐까? 어쩌면 이제 요양원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는 심정인지 모르겠다. 요즘, 저녁녘이면 베란다에서는 어머니의 젖내가 물씬 풍긴다. 향기로운 젖 냄새에 기분이 좋아지면 뇌에서 건강한 호르몬이 분비되어 기분도 좋아지는 것 같다. 엄마의 젖 냄새와 함께 엄마 품의 편안함과 익숙함을 평생 기억하고 싶다. △김재희 수필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됐다. 수필과비평을 통해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 장승이 갖고 싶다>, <꽃가지를 아우르며>, <하늘밥), <쉬어가는 물레방아> 등이 있다. 행촌수필문학상, 수필과비평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 전북문학 상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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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8 18:37

[금요수필]외할머니와 복숭아

큰아들 내외가 힘겨운 듯 끙끙거리며 들어왔다. 자식들이 가져온 것들을 보면 어느 계절인지 알 수 있다. 오늘은 상자 안에 볼연지 붉게 칠한 복숭아다. 수줍은 새색시처럼 예쁘다. 나는 복숭아를 보면 외할머니를 만난 것 같다. 복숭아는 과식을 해도 탈이 없어 좋아한다. 할머니는 복숭아 과수원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면 복숭아를 많이 먹으면서 자랐다. 복숭아 농사는 여름 한 철이라 온 식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늘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날 같다. 새벽에 일어나 복숭아를 따서 포장해 예쁜 상자에 넣어 동네 모정 앞에 세워둔 자동차에 실어 보내야 하루 일손이 끝난다. 잘 가라 손 흔들며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과수원 일이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바구니에 복숭아를 한 아름 담아 집집마다 나눠 주면서 우리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전화를 하셨다. “얘야! 복숭아 따는 날이니 아이들과 함께 와서 가져가거라." 세월은 흘렀지만 지금도 애틋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출가한 외손자까지 챙기시는 할머니셨다. 복숭아는 비타민A와 C, 펙틴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면역력을 키워주며 피로를 풀어주는 유기산, 간 기능 개선과 혈액순환 개선 및 피부미용, 기능 개선에도 좋아 여름철 과일 중 황제라고 불리고 있다. 그걸 많이 먹고 자라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나는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6.25도 외가에서 보냈다. 여름방학이 되면 책을 짊어지고 외가로 달려갔다. 온 식구가 과수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도 과수원에서 지냈다. 어느 날 저녁 밤하늘 별을 보면서 과수원 움막에서 지냈다. 외할머니는 모기장 안에서 심청전을 재미있게 읽어 주셨다. 그리고 「춘향전」의 이야기에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할머니는 부채질을 해주시며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는 노래도 불러주셨었다. 60년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어제인 듯 눈에 선하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시다 바스락 소리가 나면 멈추셨다. 그리고 내가 무서울까 봐 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아 주시고 한참 뒤에 손전등을 켜고 기침 소리를 내니 보자기를 든 사람이 도망치고 있었다. "할머니, 복숭아 도둑이지요?" "아니다. 동네 청년들이 저녁에 놀다가 배가 고프니 '서리'하러 온 것 같구나." 도둑이 아니라서 졸였던 가슴이 확 풀렸다. 할머니는 소탈하고 겸손하며 정이 많으셨다. 세월은 훌쩍 지나갔어도 할머니에게서 받은 따뜻한 정은 아직도 내 마음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언제나 다정다감했던 외할머니는 아직도 나의 가슴 속에 살아계신다. 지금은 그 '서리'를 '도둑'이라 한다. 그만큼 세상이 각박해졌다. '서리'는 전통 시대 풍습의 하나로 여름철에 가장 많이 하며 주로 밭에서 했다.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점에서는 '도둑'이라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도둑과는 성격이 다르다. '서라'는 행위의 주체가 여러 명이며 재미로 하는 것이고, 규모가 작은 먹을거리에 한정된다. 그러므로 장난끼 서린 일종의 놀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른들은 그 행위에 대해 묵인해주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다. 여름에 복숭아를 보면 틈틈이 동화책을 읽어 주시면서 자장가를 불러 주셨던 외할머니 모습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김금례 수필가는 <수필시대>를 통해 등단했다. 그는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가톨릭문학회, 한국미래문화회원 가톨릭 신앙체험공모 사랑상, 행촌수필문학상, 전주시 시민강좌시장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수필집 <꿈의 날개를 달고>, <꿈의 날갯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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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5 18:05

[금요수필] 내겐 모두 아름다운 빛

새벽녘, 산책을 하다 보니 물안개가 호수가의 새들과 속삭이는 풍경이 너무도 정겨워보였다. 초여름의 연초록 나뭇잎들은 손짓하며 아침인사를 나누고 또 다른 세상에 다시 태어난듯함을 느끼며 감사함으로 시작하는 하루이다. 내가 문학인이 되어 시와 수필을 만나게 되었던 날은 운명처럼 만난 선생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인생의 길을 안내해주는 그 분 덕분에 시야도 넓어질 수 있었다. 이런 세상을 인연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늘 감사한 마음이 앞서는 걸 잊지 않는다. 처음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시조와 마주할 수 있는 순간에는 자연 앞에 초라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소슬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느끼며, 감히 글로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에 절로 입에서 탄성을 부르고 놀라움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글의 표현에 대한 부족함에 목매이며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실망도 크게 다가오곤 했다. 부족함을 스스로 알아가는 나날엔, 단어 하나 하나에 모두 숨결이 있음을 매일 느끼며 겸손함도 배우게 되었다. 글의 소중함과 시인들에게 위대함을 배우게 되는 날이기도 하다. 시조는 시작부터 마음의 고통과 고뇌로 느끼면서 시작되곤 했다. 혼자만의 만족이 아닌,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의 길을 가기 위해, 욕심을 내어보는 내 자신이 부끄럽기 조차하지만, 그 어렵고 힘든 길이기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 누가 말했던가.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시조 쓰기란, 산모가 아이를 낳듯이 산고의 고통을 느껴야 좋은 시조를 쓸수 있다고. 시조를 쓸 때마다 원인 모를 슬픔이 다가오고 마치 한에 서린 듯 눈물이 나오기도 하는 등 감정의 변화는 이상하리만큼 목구멍이 뜨끈해지고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였으니까. 시조를 쓰면서 내 나이와 비슷한 시인의 고통스러운 호소에 위로를 받았다. 적어도 나 혼자 고통스럽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시조가 어떻게 위로가 되었는지, 어떤 시조들이 내 인생의 희망을 주었는지 말이다. 나만 힘든 것 같고 내 인생만 유달리 버겁게 느껴졌을 때 시조와 얼굴을 마주하면 언제부터인지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시조와 한마음이 되었다. 시조는 응축의 미로 진실을 표현한 거라면 수필은 나에게 산소 같은 숨구멍 이였다. 사람 사는 냄새가 인생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 좋아하곤 했다. 어렸을 때, 해질 녘이면 엄마 뒤를 종종 따라다녔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소소한 이야기들을 잊지 않고 일기로 쓰곤 했는데, 지금도 그 일기장을 볼 때마다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외로움에 숨죽이고 울 때 마다 꼭 껴안아주시던 어머니도 지난 봄에 돌아가셨다. 나는 이러한 순수한 내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고 싶었다. 여름날에 대나무로 만든 돗자리처럼 시원하고 담담한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수 있는 부드러운 글로 오래도록 펼쳐주고 싶다. 이러한 인생의 희노애락의 이야기들을 수필로 쓸수 있기에 또 다른 기쁨을 느낄 수 있어 늘 감사한 마음이다. 때론, 이러한 작은 아픔들이 감동을 받게 되고 글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렇 듯, 늘 나에게는 시조와 수필이 모두 아름다운 빛이 되었다. 순수한 표현들을 어떻게 살아 숨 쉬게 할 수 있을지, 또한 독자들에게 어떻게 공감이 될 수 있는 글을 쓸수 있을지, 많은 고민이 되기도 하다. 그래서 시조와 수필을 쓰면서 하나의 심장을 도려내듯이 조심스럽게 한 발, 또 한 발 씩 내딛으려 한다. 앞으로 인생을 마무리 할 때까지 따뜻한 표현으로 아름다운 시와 수필을 써 보려한다. △이종순 수필가는 문학박사이다. 월간 종합문예지<문예사조>와 <시조문학>을 통해 수필가와 시인으로 등단했다. 호원대 유아교육과, 우석대 교육대학원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창의 숲 프로젝트 연구소 대표와 아이가 크는 숲 예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전주 걸스카우트 연맹 부회장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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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1 17:27

[금요수필] 마음의 풍경

어제부터 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풀과 나무들은 가뭄의 단비를 만났으니 마냥 반가울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등산을 하니, 시원한 공기가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멀리보이는 모악산 능선에는 안개구름이 자욱이 펼쳐져 있었다. 먼 산의 안개 속에서 고향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싱그러운 계절을 맞이하니 새삼 사색에 잠기게 된다. 산에 올라오니 산새의 푸르른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건넛집 나무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있었다. 그 새들의 소리가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하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며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한동안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뒤안길을 돌아본다. 마음 한곳에는 항상 응어리로 남아있었던 것들이 메아리처럼 들려오고 그것들을 담아서 덜어내고픈 마음이 답답함으로 앞선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시간들 속에서 헤메이는 것이, 그저 한줌의 의미 없는 것에 대한욕심인 것을, 부질없는 세상살이를 부여잡고 허비하는 시간들, 이모두가 아쉬움으로 스쳐 지나간다. 내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고 싶다. 그 시간들을 되찾고 싶은 마음들이 저 깊은 곳에서 울려 펴지며 심금을 울리는 소리로 나에게 전율처럼 들려온다. 사람들은 때로는 외로워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때론 필요에 의해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무의미한 관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슬픈 만남일 것이다. 사적인 만남마저도 이익만을 추구하며 사람을 만나는걸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서로가 관심과 따뜻한 마음으로 애정을 가지고 관계를 맺는다면, 이 또한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아름다운 만남이 아니겠는가. 사람 때문에 아파하지 마라. 모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 마음을 도려낼 것도 애쓸 필요도 없다. 몇 사람은 흘려보내고 또 몇 사람은 담으며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 또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라며 ‘김 재선’ 시인님은 마음을 달래주었다. 인생길에 곳곳에 숨어있는 인간관계들, 살포시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 돌려주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인생이고, 결국에는 모두 지나간다. 어떤 기쁨은 내 생각보다 빨리 떠나고 어떤 슬픔은 더 오래 머물지만... 기쁨도 슬픔도 결국에는 모두 지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로운 삶을 배우게 되는 시간에 감사한다. 인간을 품어주던 자연도 때로는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 한다. 정신없이 마구 달려가다 주위를 둘러보면 허망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고, 그 무엇보다도 삶의 여정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다. 지금 살고 있는 여기. 그날이 그날 같은 보잘것없는 일상이지만 곁에 있는 이들과 눈 맞추고 보듬어주고 마음껏 품어주는 지금 현재의 만남들이 축복인 것이다. 저 멀리에서 풍경소리가 내 귀가에 잔잔하게 들려온다. 이 또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유월 첫날, 시작된 햇살이 내 마음을 향해 정원에 핀 수국꽃들이 설레임으로 다가와 바람 과 함께 사라진다. 긴 하루가 지나고 서쪽하늘로 붉은 노을빛이 물들다. 바다도 덩달아 일렁인다. △이종순 수필가는 문학박사이다. 월간 종합문예지<문예사조>와 <시조문학>을 통해 수필가와 시인으로 등단했다. 호원대 유아교육과, 우석대 교육대학원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창의 숲 프로젝트 연구소 대표와 아이가 크는 숲 예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전주 걸스카우트 연맹 부회장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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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6 16:59

직박구리 부부

우주의 생태계는 만물이 거의 암수로 나누어져 짝을 이루며 살아간다. 하찮은 미물에서부터 큰 동물에 이르기까지 아침이면 까치가 요란하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까치 두 마리가 짝을 지어 날아다니면서 짖어대는데 그것도 해가 동쪽에서 비스듬히 중천을 향해 올라가면 소리는 끊기면서 눈에 잘 띄지 않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지난번 문인화를 교습받으러 다닐 때 이야기다. 선생님 댁은 양옥 이층집이었는데 남향으로 앞에 잔디를 깐 정원이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정원수가 심어있었는데 아침이면 매일 직박구리 한 쌍이 날아와서 노닌다고 하셨다.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면 또 한 마리가 쪼르르 따라 날고 저쪽으로 날면 또 쪼르르 따라 날면서 아주 금실이 좋아 보인다고 하셨다. 그해 초여름, 직박구리 부부가 키가 조금 큰 박태기나무에다 둥지를 짓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마음이 설렜다. 둘이 무슨 깃털 같은 것을 물어 오는가 하면 어떤 때는 지푸라기 같은 것도 물어 와서 동그란 모양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어느새 직박구리 둥지가 반도 더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퍽 가상하고 기뻤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부화시켜 대를 이어갈 요량으로 박태기나무를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해마다 여름이면 태풍이 불청객처럼 불어오는데 그들의 둥지도 비껴가지 않아 여지없이 피해를 주었다. 밤새 불어대는 강풍이 창문을 흔들어 대더니 둥지 주변의 우거진 나무들을 강하게 흔들어 대니 무성한 초록 잎들이 못 견디며 아우성을 치고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조금 두려웠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아침이 되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은 차분히 개인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그동안 연습한 그림을 지통(紙筒)에 말아 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그런데 우리를 맞이하는 선생님의 표정이 왠지 침울한 듯 느껴졌다. “선생님, 직박구리들이 둥지는 다 지었는가요?”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어제 태풍에 그만 산산이 부서져 잔디 위에 떨어져 있었어요”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보였다. ‘아 그래서 선생님 표정이 그렇게 어두웠었구나.’ 나는 직감하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아 고 귀여운 것들, 그 옆에 튼튼한 금목서에다 집을 지었으면 그런 낭패를 보지 않았으련, 쯧 쯧 쯧” 하시며 선생님도 혀를 차셨다. 그 뒤로 직박구리 부부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래서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었다. 생각할수록 가습이 아려온다. 그렇게 서운한 마음으로 여러 날을 보냈다. 직박구리는 봄이면 두세 개의 알을 낳고 암컷이 약 2주 정도를 품어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거의 완성되어 가던 둥지를 잃은 직박구리 부부는 어디로 떠난 것일까? 얼마나 실망했을까? 이 계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연의 섭리는 언제나 순환하고 진화하기에 그들은 또 다른 나무에 부지런히 집을 지으려 소재들을 물어 나르며 둥지를 지을 것이다. 한 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튼튼한 나무에다 둥지를 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두손 모아 기도한다. △배순금 수필가는 전주교대, 원광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지난 1975년부터 글쓰기를 시작해 ‘새교실 대상’을 수상했으며 전북여류문학회 회장, 전북시인협회 지역위원장, 지초문예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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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2 17:17

[금요수필]고향 이야기

나의 고향은 김제다. 어느 고을처럼 박사를 많이 배출했거나 그렇게 뭐 하나 제대로 내놓을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 고향이 심산계곡은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의 지평선을 보며 호연지기를 키우며 자라왔다. 역사적인 비골제, 새만금 등 많은 보물이 있지만 어느 누가 인내를 가지고 시시콜콜 남의 동네 자랑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여기서 접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내 고향의 빛과 그림자를 내보이려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있다. 맞는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경우에 따라 악이 양을 구축하는 모순도 존재한다. 1997년 어느 날 부산 교도소에서 도둑놈 하나가 탈옥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강도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영화에나 나올 법한 탈옥을 했다. 경찰은 처음 50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으나 잡히지 않자 5000만 원으로 인상했다. 당시 기록적인 이 현상금은 모두가 욕심을 낼 만한 거금이었다. 그 도둑놈이 바로 김제 금구면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신창원이다. 그런데 옛날 시골은 가난했으며 술 마시고, 노름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삼박자를 갖추었다. 신창원도 돈 잃고 홧술에 취한 아버지로부터 복날 개 맞듯이 맞고 자랐을 것이다. 배가 고프니 닭서리를 했을 것이고 이 발단으로 전과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시골에서 닭이나 과일 서리는 하나의 놀이 문화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신창원은 도둑놈의 기질이 풍부했던 것 같다. 도를 넘는 절도 행위를 어느 누가 고발하지 않았겠는가? 필자도 어려서 가끔 무지막지하게 매타작을 당하며 살았다. 나의 아버지는 술도 안 드시고 노름도 안 하셨다. 그런데 내가 쌀 퍼다 술 마시고, 학교는 안 가고 극장에 앉아있다가 정학당하고, 싸우다 입원시켜 놓기도 했으니 아무리 인내심 많은 목사라도 한계가 있을 터라 맞아도 싸다. 그래서 필자는 반항하지 않고 사랑의 매로 알고 겸허히 수용하며 반성해서 도둑놈의 길은 가지 않았다. 어쨌든 신창원이 709일 동안 홍길동 같은 도피 행각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고 6번에 걸쳐 경찰과 마주쳐 탈출한 장면은 국민들을 흥분시켰으며 탈옥한 도둑놈을 응원하는 팬클럽까지 생길 지경이었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추적 도중 발견한 일기장에서 고아원에 200여만원을 기탁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번번이 눈앞에서 놓친 경찰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심지어 신출경몰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도둑놈 하나가 김제라는 지명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셈이다. 어쩌면 부끄러운 흑역사이기도 하여 얼굴이 붉어진다. 이제 빛으로 넘어가 보자. 우리는 그 유명한 고름 우유 파동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진 목장을 운영하다가 1973년에 파스퇴르유업을 설립하여 기존 고온 살균 방식 기법을 저온 살균 방식으로 바꾸고 고름 성분이란 화두를 기존 우유업계에 던져 태풍을 몰고 왔다. 항간에서는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그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우유 산업은 놀라운 혁신을 가져와 국민들 건강을 증진시켰다. 특히 우리 교육계에 놀라운 그의 업적은 1993년 민족사관학교를 개교하여 최고의 선생님을 초빙하여 전액 무료로 최고의 인재를 양성했다는 일이다. 그가 바로 김제 만경 출신 최명재 회장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를 이끌어 나가다가 2022년 95세로 영면하였다. 수필의 덕목은 '겸손'이라 배웠다. 그래서 도둑놈도 하나 끼워 넣었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조건 수필가는 '한국 창작 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으며 현재 전북수필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행촌 수필, 꽃밭정이 수필, 은빛 수필, 전북펜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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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8 17:44

[금요수필]첫눈 오는 날 가족이랑

첫눈이 내린다. 목화솜 같은 함박눈이 수만 수천 개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겨울 풍경화를 그리며 겨울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은 순수함과 진실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계절의 끝자락에 하얀 눈꽃을 피운다. 첫눈이 내리면 달려가고 싶은 곳이 고향이다. 고향은 언제나 기억 속에서 아름답고, 고향은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어도 영혼 깊숙이 밀려드는 영원한 향수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만이 그리움을 안다. 코로나로 인해 삶에 지쳐있는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려는 듯,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면서 마을이 고요하다. 손자와 함께 불렀던 '동요'가 떠오르기도 하고, 전방에서 군 복무 증인 두 손자의 모습이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사이로 어른거린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곳에서 군 복무를 하는 두 손자가 왠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새벽이면 교회로 달려가 두 손을 모은다. 이제는 내자신이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이 되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아들도 고향이 그리웠는지, 아들 내외가 첫눈을 맞으며 선물을 한 아름 않고 들어선다. 고향의 안방처럼 절절 끓는 아랫목은 아니지만, 거실 카펫에 깔아놓은 따뜻한 이불속에 발을 묻어주며, 그동안 가슴 가득 서렸던 정을 쏟아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뒤 아들이 가지고 온 상자를 열더니 신발을 꺼낸다. 아버지, 어머니 눈길에 미끄러질까 봐 미끄럼방지 방한화를 구입했다며 신어보라고 한다. 신어보니 푹신하고 따뜻했다. 남편과 함께 신발을 신고 폴짝폴짝 뛰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아들이 어릴 때는 겨울이면 어린 아들이 미끄러질까 봐 걱정되어 새 신발을 사다 신겼는데, 어느 덧 세월이 흘러 이제는 아들이 부모가 염려되어 새 신발을 사왔다. 가족은 설렘과 감동을 주는 '첫 눈' 같은 사람들이다. 세월이 흐르 고 흘러도 언제나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사는게 가족이다. 부모는 자녀걱정, 자녀는 부모걱정, 서로를 보듬어 주며 산다. 자식에게 부모 는 영원한 본향이다. 전방에서 근무하는 손자가 안쓰러워 걱정하던 차에 제 아빠가 며 칠 뒤에 휴가를 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 오늘같이 첫눈이 내리면, 손자는 마냥 좋아했다. 눈을 흠뻑 맞으며 손을 호호불면서도 눈사람을 만들어, 머리에 모자를 씌워주고 눈, 코, 입을 그려 화단 앞에 눈사람을 세워놓고 자신이 대견스러운 양 좋아했었다. 그렇게 놀다가 피곤하면 쓸어져 할머니 품에 얼굴을 묻 고 스르르 잠이 들던 손자! 그 손자가 내 가슴에서 이야기하는 소리 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가족은 첫눈 같은 사람들이다. △소종숙 수필가는 대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전북문협, 행촌수필, 은빛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수필집으로 <가을을 그렸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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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28 17:24

[금요수필]오디의 추억

아직도 봄인데도 초여름으로 치닫는지 이른 더위가 피어난다. 아파트 철책 담장에 널브러지게 핀 개량종 장미가 요염한 미소로 행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놀러 가는 건 즐거운 일이다. 더구나 코로나19도 다소 진정되었고, 마스크 착용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되니 살 것 같다. 이렇게 모임도 무시로 가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우리가 가는 곳은 정읍에 자리한 농촌 마을이었다.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숲속에 집을 짓고 취미생활을 즐기며 사는 지인이 우리 일행을 초대했다. 승용차가 전주를 출발해서 국도를 따라 교외로 삐지니 신록의 계절이라서 산도 가로수도 녹음이 짙고 풋풋한 내음이 상쾌하고 싱그럽다. 한참 신나게 달리니 들녘이 나오고 낮은 야산에 자리한 마을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동리 이름이 대산리라서 큰 산 밑에 있을까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다. 좁다란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니 얕은 산자락 숲속에 지은 아담한 집과 넓은 마당이 나왔다. 이름하여 '행복제작소'란다. 마당 주위엔 각종 나무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주차장으로도 쓰고, 캠핑 장소로 이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낮이라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니 야외 취사 설도 갖춰 있고, 불판과 장작도 가지런히 놓여있다. 내 짐작이 들어맞은 거다. 의자에 앉아 모처럼 느끼는 여유로움을 만끽하는데, 동료 하나가 나를 부른다. '오디'가 익어 한창이란다. 귀가 번쩍 띄어 가보니 마당 한쪽에 뽕나무가 몇 그루 있고, 검게 잘 익은 오디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얼마 만인가! 20여 년도 넘지 싶다. 대수술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부터 시골가는 일들이 멀어진 탓이다. 하나씩 따먹으니 양이 차지않기에 한주먹씩 따 서 털어 넣어도 시원찮았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따먹었더니 이러다간 점심을 못 먹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내 입술이 흡혈귀 같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거울 속의 나는 영락없는 '쥐 잡아 먹은 고양이 입처럼 검붉었다. 완전 동심에 젖어본 순간이었다. 문득 7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일요일 오후에 여느 때처럼 백구를 데리고 백화산 자락으로 놀러를 나갔다. 앞서가던 백구가 짖어대 굽어보니 어린티를 갓 벗은 멧돼지와 싸움이 붙었는데, 멧돼지가 개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나는 순간 옆에 있는 오디나무로 얼른 올라갔다. 그랬더니 멧돼지가 오디나무를 떠받는 바람에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휘청'하고 나무가 흔들리니 생 땀이 났고 정신이 아찔했다. 그때 개가 멧돼지 목을 물고서 뒹굴었다.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가 멧돼지가 줄행랑을 쳐 싸움은 끝이 났다. 그제서야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고, 난 백구를 끌어안고 눈물 바람을 했었다. 개는 영특하고 의리가 있어 주인을 버리고 도망치는 법이 없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걸 이후에도 본적이 있다. 비록 지금은 개를 키우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까닭이다. 그때, 산을 내려오기 전 검게 익은 오디를 한참 동안 따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던 일은 평생 못 잊고 산다. 오랜만에 검게 잘 익은 오디를 따먹으며 지난날의 추억도 돌아보는 행복한 시간을 대산리에 자리한 행복제작소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문광섭 수필가는 2014년 대한문학 여름호에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표현문학, 가톨릭문우회, 전주문인협회 회원과 전북수필,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 이사, 꽃밭정이수필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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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3 18:49

천리향

아파트 정원에 천리향 한 그루를 심었다. 세 번이나 생명이 날아간 나무를 버리면서 다시는 사 오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또 사 온 것이다. 늦은 봄 대추나무 묘목을 사러 갔다가 없다기에 엉뚱하게도 생각지도 않은 나무 몇 그루를 사 왔다. 그랬더니 주인은 뿌리가 없는 대추나무 두 그루를 덤으로 주면서 잘하면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받아놓고 '천리향은 없느냐?' 물었더니 있긴한데 키는 좀 크지만, 잎이 한쪽만 나와 반값에 주겠다고 해서 가져온 것이다. 천리향은 중국이 원산지로 원래 이름은 '수향나무'인데 향기가 천 리까지 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어느 스님이 잠결에 발견한 향기로운 나무라는 뜻으로 '수향'이라고 불렀다가 풍기는 향이 상서로워 '서향(瑞香)'으로 바꿔 불렀다는데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나무다. 아무튼, 이번에는 이 나무가 잘 자라서 내년 3월이면 집안을 온통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채워줄 거라 기대하며 사랑과 정성을 쏟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2~3주 정도 지나자 잎이 마르고 점점 생기가 없어 보였다. 잘못했다가는 또 죽일 것 같아서 꽃가게에 들러 어떻게 해야 나무를 살릴 수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천리향 뿌리는 습기에 약해서 너무 습하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곰곰 생각해 보니 부모의 과잉보호가 아이를 망치듯, 지나친 관심으로 물을 많이 줘서 역효과가 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화분을 뒤집어 보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흙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어서 얼른 마른 흙으로 바꿔주었다. 하지만 좋아지기는커녕 잎이 날마다 누렇게 변해가더니 이윽고 까매져 말라붙었다. 이제 더는 살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 뽑아버리지 못하고 화분을 아파트 화단 철쭉꽃 사이에 끼워 놓았다. 그리고 밖에 나갈 때 수시로 들여다보며 이제는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던 어느 날, 아니 이게 웬일인가. 새까만 나뭇가지의 마디마다 볼록볼록 파릇한 생명을 물고 있는 게 아닌가? 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줄 알았더니 이렇게 기사회생을 하다니? 화단에 내다 놓은 지 한 달쯤 되었을까? 홀로 더위와 장마를 견디며 사투를 벌이더니 가지 끝에서부터 싹을 틔우며 푸른 잎이 하나둘 돋아나서 바람에 나풀거린다. 신통하고 기묘한 그 모습이 예뻐서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마터면 한 생명을 버릴 뻔했는데, 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슴 벅찬 일인가? 순간 나는 생명이란 쉬 단정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향나무에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릴 수 없다고 포기했던 천리향이 자연의 품에서 삶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니, 자연의 힘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 속에서 삶을 배우며 오랫동안 잘 참고 견뎌준 천리향의 강인한 생명력과 자연의 경이로움에 새삼 고개가 숙어진다. 어느 시인은 '그 어떤 소리보다 아름다운 언어의 향기...천리 밖에 있어도 가깝게 느껴져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말 없는 말을 천리향의 향기로 대신 한다'고 예찬했다.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아주 작은 꽃들이 모여 있지만 어느 꽃보다도 향기로움이 맘을 사로는 천리향, 베란다에서 월동하며, 하루에 2~3시간 정도의 햇빛만 들어와도 자라고 꽃피는 데는 문제가 없는 천리향, 오늘도 그대가 있어 행복하다. △한일신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협, 영호남수필문학회, 전북수필 회원이며 수필집 '내 삶의 여정에서', '징검다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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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3 17:45

긍정으로 산다는 것은

어느 기업 사장이 모처럼 직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성공담(자랑)이 포함된 여러 훈시와 덕담을 늘어놓았다. 백여 명의 직원들 대부분은 건성으로 듣거나 냉소적으로 말꼬리나 잡으려 듯 비난거리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사장도 썩 존경 받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작위로 몇몇 직원들을 손가락으로 지목 훈시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대부분 어설픈 답변을 했는데 젊은 한 사람만이 사장의 신조나 성공담에서 귀감이 될 문구를 들며 소감을 정확히 피력했다. 이 직원은 사장의 눈에 들어 승진과 함께 나중에 사위가 되었다. 황희 정승이 공무 중에 잠깐 짬을 내 집에 와있을 때의 일이다. 집의 여종 둘이 서로 시끄럽게 싸우다가 한 여종이 와서는 “아무개가 저와 다투다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하였으니 아주 간악한 년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러자 황희는 “네 말이 맞다”고 하였다. 또 다른 여종이 와서 꼭 같은 말을 하니 황희는 또 “네 말이 맞다”고 하였다. 마침 옆에서 지켜보던 황희 정승의 조카가 답답해서 말했다. “숙부님 판단이 너무 흐릿하십니다. 아무개는 이러하고 다른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 아무개가 옳고 저 아무개가 그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황희 정승은 “네 말도 맞다” 말하고 독서를 계속하였다. 세상을 긍정으로만, 부정으로만 보는 사람도 없겠지만 긍정적 마인드로 살기는 더욱 쉽지 않다. 세상이 만일 그런 사람들로 가득하면 어찌될까? 느낌상 잘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세상의 변화는 오히려 뭔가 불편, 부당, 부조화를 강하게 인식, 저항하는 사람들에 의해 문명의 발전이나 자유, 정의, 평등, 독립 같은 인류의 정신적 가치가 유지, 고양되었다. 사전에는 긍정의 뜻을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인정하는 일. 또는, 적극적으로 의의(意義)를 인정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누군가의 의견, 어떤 사회적 현상에 동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주장, 수용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뭔가 바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 문제들을 기피, 회피, 묵인, 방조하는 점을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우회적이거나 더 고양된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는 훌륭한 사람도 있다.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이라던가 ‘내게 불이익, 불편하기 때문에’라는 것이 지배하기도 한다. 어찌했던 이런 생각으로 세상의 문제를 기피, 회피, 묵인 내지 방조한다면 세상은 어찌될까? 이런 기피, 방조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힘이 강해질수록 그릇된 쪽으로 사용하려하기에 이에 저항하지 않고 방조, 묵인해주는 것은 그들에겐 대단히 고맙고 감사한 일이리라. 부정부패는 그런 사회 속에서 활개를 치며 성장한다. 묵인, 방조하면 될 남의 일, 그래서 내겐 조용하리라 생각했던 그런 일들이 어느새 자신의 영역에 문틈의 바람처럼 조용히 엄습해 들어와 자신을 지배하고 이익을 침해하며 급기야 뗄 수 없는 계약관계까지 만들게 한다. 세상의 모든 것(사람 포함)에는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고 그러기에 긍정적으로만,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리라. 하지만 명심해야 할 점은 긍정은 자신의 이익에만 중점이라면 부정에 대한 저항, 불편에 대한 개선의지는 세상과 더불어 나아가는 모티브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나를 위한 긍정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부정에 소홀하지 않고 귀 기울여 개선하는 일에 손을 놓지 않아야 하리라. 그게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일이 될 테니까! /홍문기 수필가 *수필가 홍문기 씨는 2002년 수비문학회 신인상 수상과 한국예총 문협 추천 작가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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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0 18:35

[금요수필]시간을 이어 붙이는 바람

새만금 방조제가 완성되자 망해사는 더 이상 바다와 살 수 없게 되었다. 망해사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망해사(望海寺)를 '망해사(亡海寺)'로 불렀다. 망해사 앞바다 물고기들도 바다를 따라 떠나 인연이 단절되었다. 어느 날, 자그만 풀들이 망해사 앞바다에 자라기 시작했다. 점점 자라더니 커다란 '모래고래' 한 마리가 푸른 물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단절된 시간을 이어 붙이는 바람의 이마가 젖어있었다. '모래고래'가 제 등을 헐어 숲을 키우는 동안, 그 숲이 날마다 우거지는 동안, 사랑을 놓친 낙타의 영혼은 빠르게 사막이 되어가고 있었다. 낙타는 돌아오지 않는 뿔을 기다리고 있었다. 뿔을 돌려주지 않고 제 것이라고 호도하는 사슴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낙타의 끼니는 거친 모래 한 그릇과 날것으로 올라온 가시투성이의 하르간 한 접시였다. 오히려 낙타가 뉘우침을 강요받기도 했으나 삶의 여정에서 누구나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 결론짓기로 했다. 몽골에 갔을 때였다. 새벽에 일어나 사막으로 갔다. 신발을 벗고, 네발로 기어서 겨우 모래언덕에 올랐다. 걷고 눕다가 가만히 오래 앉아 있었다. 사막에서 묻혀온 모래를 털어내느라 게르 문밖에서 부산을 떨고 있던 때였다. 지나가던 통역이 주의말을 했다. '집 밖에서는 머리를 빗지 마세요' 무슨 말인지 몰라 재차 물었다. 그러자 통역은 '선생님의 머리카락이 새들의 발목에 감기면 족쇄가 될 수도 있어요' 라고 짧게 대답하더니 제 거처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언어가 거느린 허공이 그렇게 깊게 울리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나는 다만 모래언덕에 뉘었던 머리카락을 털고 머리를 빗어 넘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평선을 거뜬히 들어 올려 창공을 누비는 새들의 발목에 족쇄가 될 수 있단다. 발목을 감는다는 것은 새의 날개를 꺾는 것이다. 그 새를 세상 밖으로 더 이상 날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구나. 그가 나를 절벽으로 밀어버린 것도, 진물이 흐르는 내 상처도 상대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구나. 삽시간에 무언가가 쭉 빠져나갔다. 신념하나가 빈 자루처럼 허물어졌다. 모래더미 곳곳에서는 이름 모를 짐승들의 백골이 하얗게 빛났다.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아 장엄하기까지 했다. 두려움에 도망치려 몇 번이고 벗어던졌던 도마뱀의 허물도 순명하게 사막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몸통에서 잘려 나온 나뭇가지도 고요히 삭아가고 있었다. 라싸의 포탈라궁을 향해 가는 수행자 같았다. 필사적으로 무슨 말인가를 남기려는 전쟁터의 장수 같기도 했다. 나뭇가지가 모래더미에 온몸으로 쓰는 문장을 읽는다. 뼈만 추려낸 그림문자가 낙타의 마음속 폐허를 흔들었다. 사막화가 진행되는 낙타들의 마음이 나뭇가지의 푸른 전언을 새겨들었다. 신념이란 무엇일까? 서로의 관계 사이에 절대적인 교집합은 존재하는 걸까? 라싸로 가는 길은 결국은 신념을 털어내는 길이었다. 귀의하는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귀의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찌든 신념을 털어내는 일이 힘든 일이었다. 아침 햇살이 낙타 이마를 겨냥하고 있었다. 라싸로 가는 수행자들의 이마처럼 핏물이 붉게 배어 나오는 듯했다. 돌아보니, 좌표 설정을 위해 임의로 찍은 점 하나가 나를 끌고 다니고, 끝내 나의 신이 되었던 과거가 있다. 그 좌표를 생의 목표로 착각한 나는 늘 누군가와 부딪혔고 무언가에 골몰했다. 임의의 점은 아무리 오래 묵혀도 임의일 뿐인데 생의 절대적인 목표로 오독 했기 때문일까? 나는 관계에서도 자주 미끄러졌다. 다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처음 마음은 쉽게 얼굴을 바꾸었다. 악수했던 촉감과 외면했던 기억을 데리고 모래고래가 키우는 검은 숲으로 갔다. 낙타가 다가가는 검은 숲에서 물소리가, 물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김영은 <자유문학>에서 시로 등단했다. 김제예총 회장, 전북예총 부회장, 전북문협 부회장을 거쳐 현재 전북문인협회 회장으로 있으며 수필집 <잘가요 어리광> <쥐코밥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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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22 18:02

[금요수필]용돈의 먹이사슬

막내딸에게서 걸려온 전화벨이다. 웬 돈을 놓고 갔느냐는 것이다. 딸집에서 나올 때, 손자 성현이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을 건드리지 못하고, 지갑에서 배춧잎 두 장을 옆에 놓고 온 걸 뒤늦게 발견한 모양이다. 네 자식을 키우면서 용돈을 줄 때가 흔치 않았다. 어쩔 때 자식들에게 용돈을 주면, 손을 내밀던 어머니 손이 떠오른다. 필요한 것은 사드리면 되는데 굳이 용돈이 필요할까 생각하며 외면했다. 어머니의 마음도 읽지 못한 우매하고 불효한 자식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는 내 손자에게 용돈을 주면서부터 알게 되었으니 IQ는 70도 못되지 싶다. 자식의 학비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순이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40여리 길을 마다 않고 쌀 서 말을 머리에 이고 솜리까지 걸어와 지금의 인화동에 위치한 구시장 부근의 주택을 전전 했던 어머니. 동네 쌀가게에 내면 편하련만, 기어이 자식이 중학교에 다니는 솜리까지 이고 와서 먹을 집에 낸 어머니다. 친척집에 주는 넉넉하지 못한 하숙비가 맘에 걸렸을까? 통 크게 멸치 한 포와 오징어 한 축을 들여 놓고, 내 주머니에는 슬쩍 지폐 한 장을 우겨넣어 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먼 길을 걸어 오셨음을 알기에 가실 때는 버스를 타고 가시라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당할 수가 없었다. 꺾을 수 없던 고집은, 어머니의 진국이 묻어나는 사랑이었다. 불혹의 중반에 늦게 얻은 자식 하나가 바람 앞에 등불이었을 어머니. 가난한 살림살이가, 늙어가는 나이가 걸림돌이었을 게다. 그런 환경에서도 하숙에 수학여행까지 보내주셨던 과분한 사랑. 지천명이 넘은 당신들의 몸은 돌보지 않고 이웃집 일을 거들어주고 받은 품삯을 궤짝 농 깊숙이 차곡차곡 숨을 죽였다. 애지중지 숨죽였던 천만금은 자식에게만은 머뭇거리지 않고 선뜻 내주셨던, 손끝이 쩍쩍 갈라진 손이 흐릿해지는 눈에서 또 아른거린다. 간혹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지만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며 오늘도 죄스럽다. 농사일이 많은 여름이면 구멍이 숭숭 뚫린 삼베 적삼이 땀에 흠뻑 젖어 허기진 얼굴로 집에 들어오시는 어머니. 새까만 꽁보리밥 속에 숨겨진 하얀 쌀밥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물에 만 꽁보리밥을 숟가락으로 뜨시면서 고개를 들어 보이며 재촉하시는 어머니에겐 아버지도 보이지 않으셨다. 끼니마다 께지럭거리기 일쑤였던 철부지 아들. 애타던 어머니는 쌀 몇 됫박 싸들고 동산촌 친척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 집 밥상에만 앉으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이다. 맛있는 반찬도 아니었고, 하얀 쌀밥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때의 추억을 더듬으려 가끔 큰형 집에 들려 놀다온다. 아직도 형들의 사랑은 내 차지니까. 다행히도 네 자식을 두었고, 박봉이지만 공무원 신분이었기에 꽁보리밥은 아니었다. 다만 자식교육만은 소홀하지 않으려고 짠돌이 별명을 들으면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오로지 내 직업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지천명이 넘을 때까지 캠퍼스 생활을 견뎌냈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간직하고 지켜가기 위해 자신을 다그쳐야 했다. 지난 두 주말에 걸쳐 자식들이 다녀갔다. 고희를 넘긴 제 어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말이다. 지들이 준비해온 음식과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봉투까지. 날마다 이런 날이었으면 하며 속없는 욕심을 부려보며, 손자들 하나하나에게 용돈을 챙긴다. 용돈을 넣다보니 내 지갑이 훌쭉해진다. 어머니께서 원하셨던 용돈은 그런 깊은 뜻이었던 것을…. 이종희 수필가는 김제 난산초등학교장으로 퇴임했다. 전북문협 기획정책위원장과 영호남수필전북지회, 전주문협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하얀 90분'외 3권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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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5 16:56

[금요수필]닭 알의 변

얼씨구! 저 공은 저렇게 잘 굴러가는데 나는 왜 자꾸 옆으로 굴러가지? 저 공은 뚱뚱해 100g도 넘고 난 겨우 59g밖에 안되는데...하기야 엉덩이는 방방하고 머리는 뾰족한 것이 어떻게 저 공처럼 굴러갈 수 있겠어?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만 닮아 봐. 모두 미인이라 할 걸. 견문이나 학식이 높은 유식한 분들은 나 같은 달걀과 우리 엄마 닭을 보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매일 궁리하지만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달걀이 자라지 않았으면 엄마 닭이 없었을 것이고 엄마 닭이 낳지 않았으면 나 같은 달걀이 없었을 게 아니야? 난 이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할 정도로 유명하단 말이야. 옛날 생각이 나네. 엄마 닭이 알을 낳고 힘들었다고 꼬꼬댁 꼬꼬댁 울어대면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이 몰래 다가와 살며시 알을 꺼내 갔었지. 엄마 닭들은 달걀을 잃고 서럽다 울어대지만 속없이 다음 날 또다시 달걀을 낳았지. 여행할 땐 삶은 달걀이 최고야. 삶은 달걀을 먹지 않은 여행은 운치도 없었지. 그런데 요즘엔 이상한 사람들이 참 많아. 달걀을 그냥 고맙게 먹을 일이지 흰자는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물질이 함유되어 아토피 원인이 되니 먹지 말라고 하더라고. 또 노른자는 콜레스테롤이 많아 고지혈증이나 고혈압 등 성인병이 있는 사람들은 먹으면 안 된다고 야단들이야.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다고 노른자만 쏙 빼고 흰자만 먹는 얄미운 입을 상상해 봐. 그래서야 되겠어? 또 살이 쪄서 다이어트에 안 좋다나? 그러다가는 오히려 영양실조에 걸리기 십상이지. 요즘 서양에선 다시 달걀이 비만을 방지하고 영양의 보고(寶庫)며 최고의 저칼로리 다이어트 식품이라며 주목하고 있다더군. 세계 여러 나라 중 달걀을 먹지 않는 나라가 있던가? 달걀은 지구상 어느 인종이나 모두 즐겨 먹는 1등 영양식품이란 말이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라면에도 달걀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나지 않아? 그리고 요리 기본재료의 으뜸인 간장을 담글 때도 달걀을 사용다는 걸 알기나 해? 소금물에 달걀을 동동 띄워 동전만 한 크기로 떠오르면 그건 간이 딱 맞는 거지. 혹시 달걀껍데기의 쓸모는 알고 있나? 주둥이가 긴 병이나 속 깊은 그릇을 씻을 때 그 껍데기를 넣고 짤짤 흔들어 봐. 얼마나 깨끗해진다고. 우리 주인도 새것처럼 변한 유리병을 들고 신기한 듯 황홀해 하더라니까. 속이 검은 사람들은 달걀 껍데기를 씹지 말고 삼키면 좋다고 해. 그런 뒤 마구 흔들면 깨끗해질 것 아니야? 부활하는 게지. 우린 가끔 정의의 용사가 되기도 해. 불의를 일삼는 나쁜 사람들을 보면 떼로 날아가 얼굴이며 머리 그리고 고급 양복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그래도 맘씨 착한 우리는 그 사람들의 옷을 영원히 못쓰게 하진 않아. 물로 씻으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니 반성기회를 만들어 주는 셈이지. 아, 이제 난 봉사활동을 하러 가야겠어. 글쎄, 우리 주인집 예쁜 딸이 달걀 마사지를 한다네. 야호, 예쁜 주인집 아가씨의 얼굴을 많이 많이 만져줘야겠어. 난 역시 행운아지 뭐야? 그러나 나보다 운이 더 좋은 놈이 있어. 엄마 닭의 품속에서 스무하루 동안 따뜻하게 안겨 있다가 병아리로 태어나서 귀여움을 한 몸에 받는 털이 보송보송한 노랑병아리들 말이야. 아, 부러워라. 지금쯤 그 병아리들은 노란 개나리 울타리 밑에서 엄마 닭을 졸 졸 졸 따라다니겠지.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서 ♪ ♫ ♬ 노래를 부르며..... △양영아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표현문학> 시 등단, 행촌수필문학회장, 전북문인협부회장, 전북여류문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슴베>, <불춤>있으며 전북수필문학상, 완산벌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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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8 17:50

[금요수필]감꽃

하늘은 맑고 푸르다. 남편을 따라 수덕사에 올랐다. 초록으로 펼쳐진 산야가 한 폭의 거대한 동양화를 펼쳐놓은 듯 눈부시다. 오르는 길이 번뇌를 상징이기라도 하듯 108개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어서 걷기가 쉽지는 않을 거라는 소리에 내심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숨이 거칠어지려 할 무렵 길가에 흩어져 있는 감꽃을 발견하고 눈을 들어 보니 커다란 감나무가 푸른 하늘을 우산처럼 가리고 있다.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감꽃 하나를 주워든다. 꽃은 내 안에 잠들었던 유년의 기억들을 일깨웠다. 고향 집 마당가에 감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그는 정이 많아 우리 집 나무라고 빼기는 나와는 달리 동네 모든 친구들에게도 언제나 가슴을 열어 주었다. 봄이면 지천으로 떨어진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에 걸기도 하고 시곗줄을 만들어 손목에 차기도 했다. 감나무는 가지가 사방으로 낮게 뻗어서 아이들이 오르기에 편했다. 겁이 많은 나는 보통 때는 그중 가장 낮은 가지를 차지했지만, 간혹, 용기를 내어 두어 가지 더 높은 곳까지 오르기도 했던 이유는 장에 간 엄마가 돌아오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저 멀리 탑 거리 언덕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이면 한달음에 달려갔고, 어머니는 마중 나온 내게 알사탕과 먹거리를 안겨주곤 했다. 가을이면 어머니는 상처가 난 감은 삐져서 광주리나 채반에 널어놓았다가 감 껍질은 곱게 빻아서 제사떡 고물로 사용했다. 곶감이 반쯤 건조되어 말랑말랑해지면, 그 달콤한 향내의 유혹에 못 이겨 살그머니 장독대에 드나들기 일쑤였으며, 한겨울엔 장독대 항아리에서 꺼내 먹던 설정설정 얼음이 든 홍시의 맛은 세상의 어떤 과자와도 바꿀 수 없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아버지는 감나무 둘레에 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넣어주거나 뒷간에서 거름을 퍼다 주며 정성을 들였다. 감나무가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들인 정성이었다. 나무가 강추위를 견디고 있을 때 우리는 그를 까맣게 잊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또 다른 놀이에 빠져 긴 겨울을 지냈다. 또다시 봄이 오고 감꽃이 필 때 서야 우리는 다시 그를 반기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무더위엔 감나무 그늘에 멍석을 깔아놓고 누워 있으면, 때맞추어 한꺼번에 울어대던 매미의 울음이 소나타처럼 달콤하게 들렸다. 감꽃이 불러온 어린 시절의 추억에 흠뻑 젖어 느릿느릿 걷다 눈을 들어 보니 계단 위에 올라선 남편이 혼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진다. 나도 웃음으로 화답하며 남편 앞으로 다가간다. 남편은 내가 여느 때와는 달리 왜 느리게 올라왔는지 훤히 알고 있는 눈빛이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무슨 예불을 드리고 있는 것일까. 바람 타고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해탈의 음향인 양 가슴에 와 안긴다. 황점복은 '문예연구'에서 등단, 시흥문학상, 맥스웰 커피문학상, 전국공무원 문예대전 <수필>행정자치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수필집 <빈손의 미학>, <아름다운 간격>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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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1 18:07

[금요수필]봄나들이

봄비가 지나간 자리에 어느덧 새 생명들이 자리를 잡는다. 엊그제 개나리와 매화가 모습을 보이더니 오늘은 진달래와 산당화가 고개를 내민다. 언제 피었는지 동물원길에 벚꽃이 만개하고, 백목련의 자태가 해맑다. 눈길 가는 곳이 꽃이다. 이곳저곳 물감으로 찍어놓은 듯 훤하게 피어오른 건지산의 꽃무리도 시선을 당긴다. 불꽃놀이가 시작되는가 싶다. 여기저기 툭툭 터지는 하얀, 노랑, 빨강 불꽃들의 아우성, 혼자서는 결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 4월,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을 누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꽃에 홀리고 바람에 취하고 대지의 용틀임에 정신이 몽롱해지기 때문은 아닌지, 몸이 근질거려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그래, 나가자! 발길 닿는 곳이 봄이고, 꽃이고, 인연이 아니겠는가. 차를 몰고 고산천을 들러 삼례 쪽으로 갔다. 봄내음이 향기롭다. 햇빛도 물빛도 하늘빛도 상큼하다. 차가 멈춘 곳은 비비정마을 전망 좋은 언덕, 이곳은 평범한 시골마을이 새로운 이색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언덕배기에 있는 야외공연장과 사방으로 뻥 뚫린 통유리집 카페가 이색적이다. 베란다 아래쪽으로 어느덧 땅심 받은 애쑥이 포르스름하게 자리를 잡았다. 가슴이 탁 트인다. 만경강과 호남벌이 품안으로 들어온다. 강둑을 따라 전주팔복동에서 목천포까지 이어지는 연분홍 벚꽃길이 행군하는 병사들 같다. 마침 익산에서 전주를 거쳐 여수로 가는 전라선 열차가 새로 난 철교를 따라 유유히 빠져나간다. 혹시 저것이 상춘열차가 아닐까. 요즘 상춘객을 위한 열차가 생겼다는데, 남쪽으로 가는 나들이객들이 차량 가득 몸을 맡기고 있는지 모른다. 비비정을 나와 삼례문화예술촌으로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맹꽁이 조형물이 오른손을 높이 들고 객을 맞는다. 한때 이곳은 습지여서 개구리와 맹꽁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술촌의 상징물을 맹꽁이로 정하고, 곳곳에 귀여운 배불뚝이 조형물을 세웠다. 이곳은 암흑의 역사가 예술 볕을 받은 곳이다. 일제가 호남평야에서 생산하는 쌀을 수탈해 가기 위해 지은 창고를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하마터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7개의 낡은 창고들이 제각각 창의적인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아트갤러리와 책박물관, 목공소, 디자인뮤지엄, 책공방북센터 등 얼핏 보기에는 낡은 창고건물에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있을까 싶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에 홀린 듯한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문화카페 '오스'에 도착한다. 옛 창고의 목재들을 그대로 살린 카페 역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정성스럽게 제조해 준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로 가면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흙탕물 둠벙이 또다시 옛 추억을 불러온다. 맹꽁이와 두꺼비, 개구리들에게 잃었던 고향을 찾게 해 주려는 것은 아닌지, 삼례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있다. 터미널 근처에 있는 허름한 국밥집, 잔인한 4월의 잔영은 여기에도 있다. 낮술에 젖은 여인들도 분명 봄 때문에 흔들리고있다. 60대 초반쯤 보이는 두 여인이 옆 사람들은 의식도 없이 말끝마다 욕설을 퍼붓더니 갑자기 노래를 한다. '마음 주고 정을 준 게 바보였구나.' 아픈 상처가 있을 정도로 애절하다. 그래 아픔만큼 흔들려라. 맺힌 한 다 풀어라. 소 키우는 걱정은 하지말고, 마시고 퍼붓고 실컷 가슴 두드려라. 봄이 당신을 다 용서하리다. 나도 순대국밥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서야 내 짧은 봄나들이에 쉽표를 찍는다 △백봉기 작가는 <한국산문>을 통해 등단했다. KBS 편성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전북예총 사무처장,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으로 있으며 전북문학상, 한국미래문화상을 수상.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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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7 17:30

[금요수필]이런 실수만은 제발

어머니는 나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뒤 얼마 동안은 교실 뒤쪽에 서서 공부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산수 시험을 보던 어느 날, 가운데 분단의 맨 끝자리에 앉아있던 내 곁에 다가와, 무릎을 쪼그려 앉던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톡톡 문제를 가리키며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려 넣으라고 소리 죽여 재촉했다. 왼쪽에 제시한 숫자보다 동그라미 하나가 더 많은 시험지는 결국 백점을 놓쳤다. 나는 집에 돌아와 엄마 때문이라며 한참을 울었고 엄마는 무척 속상해하며 나를 달래느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머니의 욕심에 뼈아픈 실수였지만, 어쩜 내 소신대로 하지 못한 잘 못이었다. 중학교 시절, 나이 많은 물상 선생님은 말도 빠르고 성격도 몹시 급했다. 선생님의 두 눈이 늘 충혈되어 있던 것은 전쟁터에서 적군을 많이 죽여서 그렇다더라며 그 말이 사실인 양 친구들은 이야기를 퍼뜨리기도 했다. 판서를 하는 선생님의 분필 소리와 우리들의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 외엔 교실이 쥐 죽은 듯했던 그 날, 지우개를 빌리느라 두런거렸던 뒷자리의 친구가 이내 내 등을 쿡쿡 찔렀고 나는 지우개를 전해 주려 팔을 뒤로 올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휙 뒤를 돌아보던 선생님이 벼락같은 소리로 "너, 너, 너, 거기 네놈 이리 나와!" 하고는 나를 포함한 친구들을 찍어 불러내더니 우리를 무릎 꿇려 앉히고는 이유불문 없이 넓적하고 두꺼운 검정 표지의 출석부로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난생처음 당하는 모욕적 체벌에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억울함은 뒷전이었다. 이미 고인이 된 선생님이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 날 때면 아직도 원망과 분노의 마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새색시 시절의 여름, 외출을 준비하던 시아버지의 덜 마른 모시 두루마기를 어머님이 나에게 급히 다림질을 맡겼는데 하필 그때 검지손가락을 베어 동여매고 있었다. 그래서 거즈에 배어 나온 피가 어찌하다 하얀 두루마기 옷깃에 살짝 묻었다. 그래서 당황한 나머지 얼른 물수건으로 비벼댔더니 그 자리가 연분홍으로 번지고 말았다. 다시 물수건으로 비비고 마른 수건으로 두들겨대며 허둥지둥 물기를 빼 다림질을 해서 올렸다. 그런데 하얀 두루마기 옷깃에 설핏한 분홍자국은 슬쩍봐도 티가 났는데 긴장하고 있던 새 며느리의 눈치를 아셨는지 아무 말씀이 없었다. 칠칠맞고 조심성 없던 내 손에 땀이 흥건했다. 수 없는 실수를 이어가며 사는 것이 인생 아닐까. 말 실수든 행동 실수든 내 잘못에는 관대하면서 같은 실수를 이어왔다. 그러면서도 내 인격이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상대에게는 한 치의 이해도 없이 그 잘못에 화를 참지 못한다. 조금만 더 이해하고 더 신중하고 인내했더라면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후회를 한다. 그러면서 똑 같은 실수는 다시 하지 않겠다도 다짐하지만 아직 덜 익은 인생으로 남았다. 내 삶을 이어온 크고 작은 이런저런 실수야 지나간 이야깃거리로 세월에 씻겨 간다지만, 정작 내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앞으로의 실수가 큰 걱정이다. 냉장고 문을 열고도 한참을 멍하니 서서 문을 연 이유를 생각해 내느라 애쓰고, 현금 인출기에서 돈은 두고 통장만 빼오는 한심함에 내 머리를 쥐어박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더 두렵고 끔찍한 일은 가족의 인연과 정(情)마저 잊어버리는 치매라하니 제발 이런 일 만은 다가오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해보는 것이다. △김덕남 작가는 <대한문학>,<에세이스트>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회, 교원문학회 회원, 수필집 <아직은 참 좋을 때>, <여섯 교우의 분향> 한국수자원공사 전국 물 사랑 공모전 은상을 수상했으며 전주 기령당 충효(忠孝)양양 글짓기 공모전 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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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0 18:08

[금요수필]낙타풀의 교훈

중국 신강성 사막지대에 자생하는 낙타풀은 가시가 많은 콩과의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낙타들만 먹을 수 있는 풀이지만 낙타들도 함부로 먹지 않는다. 그만큼 가시가 억세 낙타가 이 풀을 먹으면 입안이 온통 가시에 찔려 피로 붉게 물든다. 그런데 낙타등은 그럴 줄 뻔히 알면서도 이 풀을 먹는 것은 갈증으로 아사 직전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흘린 피로써 갈증을 풀어 조금이라도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다. 낙타들 중에는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최후 순간까지 그 가시 풀을 먹는다고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만 뜯어먹고 중간에 멈추면 생명은 건질 텐데, 그러지 못한 낙타가 많다. 물론 곁에서 사람이 부리는 낙타는 그런 절박한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길을 떠나기 전 카라반은 낙타에게 충분한 물을 먹일 것이며, 도중의 오아시스에서 갈증을 해소시킬 것을 잘 알고 그 길로 끌고 간다. 낙타들이 낙타풀을 뜯는 것은 카라반이 유고되었거나 길을 잃을 때의 선택이다. 낙타들이 죽음이나 파멸을 선택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경우다. 따라서 낙타풀도 길 잃은 낙타에게 '이제 나를 그만 뜯고 네 갈 길을 가라'고 날카로운 가시를 세워 입안을 찌르며 경고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경우는 어떤가? 도박이나 마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법의 심판을 받거나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다. 어찌 보면 도박과 마약들은 인간에게 낙타풀이다. 따라서 그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투쟁이 요구된다. 또 술은 어떤가?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낙타풀 보다 더 지독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게 있어 낙타풀은 과연 무엇일까? 인생 황혼기에야 '과욕'이라는 답을 얻었다. 이제야 그 욕망을 내려놓고 모처럼 평안을 누린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어진가요?”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 자장이 더 낫다는 말입니까?” 이 말에 공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했다. 공자의 대답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로, 지나친 욕심은 모자란 것과 같으므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공자께서는 “올바른 도가 행하여지지 않고 있음을 내가 안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다. 올바른 도가 밝혀지지 않고 있음을 내가 안다. 현명한 자는 지나치고 못난 자는 미치지 못한다. 사람 중에 마시고 먹지 않는 이는 없으나, 맛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고 말씀하셨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은 곧 덕(德)의 실천이며 덕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중용을 선택하고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을 쾌락과 만족을 누리는 삶, 자유를 누리며 책임지는 시민의 삶, 연구하는 철학자의 삶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이 모두를 모자람 없이 채울 때 인간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 만이 가지고 있는 덕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지나침이나 부족함은 도덕에서 어긋나는 것으로 보아 경계를 해야 한다. △김현준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소설 등단작가이며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은빛수필문학회 회원으로 대한작가상, 행촌수필문학상, 은빛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아내와 아들의 틈바구니에서> 외 6권을 출간했다. 육경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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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6 17:31

<금요수필>안전 지킴이

나는 지난 3월부터 아동 안전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활동하는 지역은 전주 완산 경찰서 서학동 파출소 관내에 있는 교대부속초등학교, 남초등학교 주변 등지인데 2명이 1조가 되어 10명이 매일 3시간씩 활동을 하고 있다. 세상이 워낙 흉흉해지다 보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공사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재개발을 앞두고 모두가 떠나간 마을, 당분간 아무도 살지 않는 빈 골목을 통해 학교를 오가야 한다. 그 골목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인적이 끊어진 길이라 불안감이 배가된다. 그들의 무사 등하굣길을 책임지는 아동 안전 지킴이가 있어 집에 있는 부모들은 한결 마음이 놓일 수밖에 없다. 나의 아동 '안전 지킴이'의 주요 임무는 지역 경찰관과 협조하여 아동 상대 범죄 취약지역인 학교 주변, 놀이터, 공원 등지를 집중적으로 순찰하는 것이다. 주요 거점 지역에서 맞벌이 가정, 아동 안전 지킴이로 경호가 소홀한 평일(월~금) 위주로 활동하며 아동 외부활동이 집중되는 등하교 시간대는 통학로에 있는 아동 안전 지킴이집 등과 연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갈 무렵이면 학교 앞에서 학원차량이 대기하고 있거나 학부형들의 자가용차가 와서 데리고 간다. 그래서 요즘에는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을 보기 어렵다. 이처럼 기계적인 방과 후 스케줄을 보면서 한창 꿈 많은 어린이들이 좀 더 자유롭게 뛰어 놀지 못하고 어른들의 욕구에 억눌려 생활하지 않는가 싶어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 또는 골목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애잔한 생각도 들어 어깨가 무겁다. 비 오던 어느 날 등굣길 아침 초등학교 앞을 순찰하는데 문득 어린 시절에 불렀던 우산이란 동요가 생각이 나서 속으로 불러 보았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우산, 검정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동심은 그대로인데 몸과 정신이 늙어 가는가 싶어 서글픈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요즘 아동 안전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부터 건강에 활력을 찾고 자긍심과 보람을 느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학교폭력 현장을 발견해 신고한 적도 있고, 다리에 부상을 입은 학생을 집까지 바래다 준 적도 있다. 성주중앙초 근무 당시 자전거 체인이 풀려 오도 가도 못해 펑펑 우는 학생 1명을 발견하고 직접 체인을 감아 정리해줬다. 학생이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뿌듯함을 느꼈다. 아동보호를 위한 몇시간 근무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다고 생각한다. 현재 하교시간에만 지킴이가 활동 중인데 등교 및 점심시간에도 필요하다. 충분한 예산확보 후 인력을 보충해 학교당 6명이 3개조로 나눠 운영하면 아동도 충분히 보호할 수 있고 만일의 사고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아울러 노인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육심표 수필가는 경찰공무원으로 정년퇴임하고 아동 안전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전북대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 과정을 수료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수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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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09 17:50

금쪽같은 우리 쌀

작년에도 무더운 날씨와 대형 태풍이 있었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풍년이 되었다. 따라서 알알이 익어 고개 숙인 치렁치렁한 추수를 한 농민들의 마음도 풍족하다. 금색으로 물든 가을 들판은 언제나 농부들의 보람이었고 한해 동안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이었다. 알알이 튼실한 벼 이삭을 만져도 보고 세어도 보며 봄부터 흘린 땀을 잊고 꽃송이처럼 희망에 부풀었다. 이처럼 풍년이 들면 넉넉한 양식을 얻으니 큰 보람 속에 참 좋다. 온 가족이 배불리 먹고 남부럽지 않게 산다는 게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예로부터 우리 농촌에서는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지 않았던가? 흉년이면 한 톨의 알곡을 지키려고 종일 새를 쫓있고 곡간에 드나드는 쥐를 잡으려 온 마을이 '쥐 잡는 날'을 두었던 추억이 머리에 스친다. 세상 누구나 밥은 희망이고 생명이다. 밥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아니던가? 그런데 농민들은 잘된 농사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쌀값이 폭락하여 피땀으로 지은 금쪽같은 쌀인데 농비도 안나온다며 수확하려던 벼를 트랙터로 갈아엎고 있다. 물가는 치솟는데 쌀값은 점점 떨어지고 있어 농민의 시름은 커질 수밖에…. 더욱이 공산품 수출에 따른 쌀 수입량이 매년 약 40만 톤이 넘고 농민들이 한 해 생산하는 쌀도 약 350만 톤이라 한다. 여기다가 5년간 정부 수매 비축미도 약 350만 톤 정도가 되어 정부의 곡간도 가득 차 있어 수매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냥 농민들의 생계를 방치할 수는 없다. 또한 시대 조류에 따라 국민의 식생활 문화도 많이 변했다. 밥만 먹던 옛날과는 달리 육류와 빵, 국수, 라면 등 간편한 식품의 소비가 늘다보니 90년대에 1인당 1년에 122kg을 먹던 쌀을 이제는 61kg 정도 소비하니 하루에 500g도 못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원가로 따지면 하루 쌀값이 700원으로 생수 한 병값보다 더 싸다. 그리고 1년간 밀 알곡 약 240만톤과 밀가루 6만 톤을 수입하고 있다하니 1인당 1년 소비량도 34.2kg으로 쌀의 절반에 해당한다. 이처럼 식품 기호가 달라짐에 따라 우리도 밀 재배를 늘려야 하고 가루 쌀 육종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일인데, 문화적, 지리적, 교통의 취약지로 내몰린 우리 농촌을 그냥 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오래된 비축미는 가축사료로 쓰도록 하고 사료용 곡물 수입은 줄이는 한편, 농촌에서 어렵게 농사짓는 농민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농촌 인구는 차츰 감소하고 있고 거기다가 농업인구의 24%이상이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니, 앞으로 우리 농촌을 누가 지켜나가야 할 것인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노동력이 없는 농촌, 희망을 잃어가는 농촌으로 변하고 있으니 참으로 참담하다. 이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만일 곡물 유통이 막히고 세계가 점점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는 점을 생각해보면 식량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인간의 기본이 의식주인데 식량문제만큼은 우리가 스스로 지켜야 할 일이다. 따라서 젊은이들의 귀농 귀촌 환경을 만들고 소출 소득작목을 개발하고, 농촌을 살리고 농민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농촌경제를 재생시킬 특단의 대책이 절대 필요한 때다. 지난날 우리를 지켜온 생명의 쌀이 오늘날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음식문화에 밀려 다양한 농작물 수요가 늘어나고 있으므로 수요공급도 개선되어야 할 시기라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신팔복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은빛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진안문인협회장을 맡고 있으며 수필집 <마이산의 메아리>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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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02 15:58

[금요수필]달밤에

자정을 갓 넘긴 포근한 밤, 언덕길에서 바라보는 달이 유난히 밝다. 늦여름의 잔영이 남아 있던 얼마 전만 해도 달빛에 몸을 적시면 서늘해지곤 했다. 그런데 오늘 밤 달은 불에 달군 듯 붉은 기운을 품고 있다. 달은 가끔 지나는 구름에 몸을 숨겼다가 나와 나를 지긋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럴때면 한가롭게 달과 눈이 마주치며 생각 주머니가 열린다. 달을 바라보다 기억의 소실점에 이르면 그곳에는 언제나 고운 달빛을 맞으며 언덕길을 걸어가는 소녀가 보인다. 머리는 양갈래로 따고 군데군데 때가 낀 분홍 원피스를 입은 소녀다. 한 손에는 동냥 통, 나머지 손은 보따리를 들고 절뚝거리며 언덕을 걸어 간다. 소녀 뒤로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들 대여섯이 따른다. 이윽고 냇가에 이르면 소녀는 동냥 통을 내려놓는다. 달빛이 투영되어 반짝거리는 냇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신다. 뒤따르던 아이들이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다가가 소녀를 밀어 냇가에 빠뜨린다. 물에 빠진 소녀가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을 치자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겁먹은 소녀는 급히 물가로 나와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 소녀는 절름발이였었다. 나이는 우리들 보다 몇 살 위였지만 몸이 부실하여 넘어지면 자주 울었다. 그 소녀는 마을 외딴곳의 허름한 토담집에 동생과 함께 살았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세 살 때 도시로 돈 벌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돌았다. 소녀는 매일 마을로 동냥을 하러 다녔다. 나는 친구들과 그녀를 자주 놀렸다. 이사를 한 뒤 몇 년 뒤 가보니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녀가 섬유공장에 취직했다느니,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한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소문만 전했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귀몽(歸夢)에서 깨어나면 그 끝자락에서 그녀가 울며 서 있었고, 달빛에 젖은 대나무를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널찍한 이파리 매단 칡덩굴이 여린 대나무의 몸을 감고 있다. 소녀는 대나무처럼 여렸고 코흘리개 우리는 칡덩굴처럼 그녀를 감고 오르며 괴롭혔다. 엉엉 소리 내어 울던 소녀의 얼굴이 가슴에 와 박힌다. 그 아이도 이제는 지천명을 훌쩍 넘겨 눈매가 부드러워졌는지…. 커다란 벽시계의 오후 시침처럼 달은 서편으로 기운다. 내 삶의 시침도 저 정도쯤 지나고 있을까? 돌아보면 언제부터였는지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인간관계가 뻑뻑해진 느낌이 들곤 한다. 세월 따라 걷다 보니 세상에는 영원한 게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비록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아니어도 삶의 연륜이 쌓이면 나름 철학자나 사상가가 되나 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말에는 공감하면서도 때로는 사람에게 등돌려 멀어지는 자신들을 합리화하곤 한다. 이제 인생의 나이테가 자화상을 그릴 만큼 겹겹이 쌓여 삶의 기둥이 굵어졌는데도 삶의 깊이와 넓이는 자꾸만 작아지는 듯하다. 가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리움을 잊어버렸다는 말을 듣는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한때 가슴 깊이 간직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희미해지긴 마찬가지다. 육체가 쇠잔해지면 정신도 기력을 잃어가는 걸까? 오늘따라 달을 품은 호수가 거울을 방불케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잔잔한 호수처럼 보여도 ​호수와 하늘의 심연 너머로 달빛은 하얗게 빛이 나고, 별빛을 뿌리친 나무와 풀 이파리들이 덩그러니 무심하다. △박경숙은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영호남수필 회원이며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미용실에 가는 여자> 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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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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