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은 원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그의 국부론(國富論)에서 제기한 유명한 가설(假說)이다.
그는 국부론에서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이익과 안전만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사회공공의 부(富)를 증진시킨다’고 갈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경제 행위의 근간인 수요와 공급은 시장에서 자동적으로 조절되고 그에따라 고용도 창출되기 때문에 정부의 간섭은 필요없다는 낙관적 자유방임주의 경제논리의 바탕에 ‘신의 섭리’,곧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논리는 ‘한 사람의 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가난한 5백명이 있어야 한다’는 자유방임의 병패를 가져왔고 이는 곧 자본주의 사회 불평등의 표본이 되고 있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이처럼 경제용어였던 ‘보이지 않는 손’을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다윈이 진화론을 내놓으면서 자연계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인용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생물의 진화는 조물주에 의한 창조가 아니라 하등인것으로부터 고등인것으로의 변화와 발전에 의하여 생긴것이며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근래 들어서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보다 정치적으로 인용되는 일이 더 많다. 주로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가령 암울했던 군사독재 체제하에서 죽임을 당했던 그 많은 의문사 희생자들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분명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잃었지만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군복무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허일병 사건’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진상규명에 도달하지 못하는것이 좋은 예이다.
지난번 민주당 국민경선때는 이인제후보가 ‘보이지 않는 손’을 거론해 한바탕 소용돌이를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한나라당 서청원대표가 또다시 이를 들고 나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SOFA개정요구와 반미(反美)기류가 확산되는 가운데 나온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 사실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주장 자체가 상당히 ‘뜬구름 잡기’식인데다가 예의 김대중청권은은이 나오는것을 보면 다분히 정치적 발언일것으로 보이지만 국민들이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정말 ‘보이지 않는 손’이 반미감정을 자극하여 조직적으로 확산시키는것이라면 예산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믿을국민이 얼마나 될까. 그랬다가는 진짜 국민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따귀라도 올려야 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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