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비둘기는 재를 넘지 못한다는 뜻의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이라는 고사성어는 바둑계 노장들이 나이 어린 선수들을 상대로 많이 쓰는 용어다.
패기나 체력에서는 뒤지더라도 기술력이나 노련미에서는 노장들도 밀리지 않는다는 마지막 자존심이 담겨져 있다. 젊음과 패기로 중무장한 신예기사들에 밀려 승부의 뒷전으로 나앉았던 중견기사들이 최근 '신구미월령'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예선전이 있는 날이면 치열한 승부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동료기사들과 한 가닥 하던 '왕년'을 추억하던 중견기사들이 최근 맹활약하면서 바둑계에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중견 돌풍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선수는 서능욱(51세) 9단이다.
축과 장문이 아니면 일단 끊고 보는 호전적인 기풍과 상대와 손이 겹칠 정도로 빠른 속기를 자랑하며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손오공' 서능욱은 지난 12일 벌어진 제1기 SKY바둑배 시니어연승최강전 본선8국에서 '철녀' 루이나이웨이 9단을 이기고 5연승을 달렸다.
1970년대 중반부터 약 15년여에 걸쳐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조훈현 9단의 국수팀과 서봉수 9단의 명인팀으로 각 8명씩 팀을 이뤄 연승전으로 대결하는 이번 대회에서 서능욱은 명인팀의 세 번째 선수로 나와 나종훈 6단, 김일환 9단, 장명한 5단, 김종수 6단을 연파한데 이어 강적 루이 9단마저 물리치며 일찌감치 명인팀 우승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1958년 인천 출생의 서9단은 중학생이었던 14세에 입단한 천재형 기사다. 번뜩이는 감각과 뛰어난 전투력으로 무장한 서능욱은 2인자였다. 당대의 1인자였던 조훈현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9년 제1기 최강자전 결승에서 조훈현에 0-2로 패하며 첫 준우승한 서능욱은 제1기∼4기 대왕전에서 4년 연속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실패하는 등 조훈현 9단과 결승무대에서 12차례 격돌에 12번 모두 준우승에 그친 불운한 2인자였다.
1992년에 제31기 최고위전 도전기에서 이창호 9단에 도전했다가 실패하며 총 13차례 준우승을 차지해 역대 최다준우승 9위에 올라있다.
그러나 10위까지의 선수 중에 단 한차례의 우승도 없이 100% 준우승만 기록한 사람은 서능욱이 유일할 정도로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그런 서능욱이 19일에 열리는 오규철 9단과의 대결에서 이긴다면 드디어 국수팀 주장 조훈현 9단만과 만나게 된다. 비록 단체전이긴 하지만 1992년 패왕전 결승이후 17년 만에 조9단과 결승무대에서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프로기사생활 37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극복하지 못한 철옹성을 넘어설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여류기사와 만 45세 시니어기사들이 격돌하는 지지옥션배에서는 안관욱 7단의 연승행진이 화제다.
1961년생으로 올해 만47세인 안7단은 1988년 프로암대회에서 아마추어의 신분으로 이창호를 호선으로 물리친 아마강자 출신이다.
1991년 프로데뷔 후 한국이동통신배 저단진에서 우승하는 등 잠시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후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 평범한 선수였다.
고향인 대전으로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던 보급프로 안관욱이 지지옥션배 첫 판에서 여류팀의 주력선수인 이민진 5단을 이기자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박지연 초단, 하호정 3단에 이어 16일에 이다혜 3단마저 물리치며 4연승을 거두자 평범했던 그에게 사람들은 '대전신사'라는 별명까지 붙여주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안관욱은 인터뷰에서 "지지옥션배의 활약으로 매스컴에 이름이 오르면서 평소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에게 축하전화까지 받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안7단은 22일 이슬아 초단을 상대로 5연승에 도전한다.
1980년대에 조훈현의 벽을 넘을 유망주로 강훈, 장수영, 서능욱과 함께 이른바 '도전5강'으로 불리던 김수장 9단과 백성호 9단의 활약도 심상치 않다.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에서 김성룡 9단과 권형진 초단을 연파하고 상금권인 본선 6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김수장(51세) 9단은 KBS바둑왕전 예선에서도 2연승을 거두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늘 대회 첫판에서 져 탈락하는 신세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단칼 멤버'가 대부분인 50대에서 올 시즌 7승7패 승률 50%인 김수장의 성적은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다.
실제로 김9단은 올해 벌어진 7차례의 대회에서 1회전 탈락은 단 3차례였고 1차례 본선, 2차례 예선결승에 진출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작년 한국리그 본선멤버 48명중에서 '특별한 50대'인 조훈현을 제외한다면 김수장이 유일한 50대 선수였다는 것은 김9단의 활약이 1회성이 아니라는 좋은 증거다.
백성호(53세) 9단의 짧고 굵은 활약도 화제다.
지난 3일 열렸던 국수전 예선에서 백성호 9단은 이영구 7단을 이긴 것은 노장기사들의 입장에서는 어깨를 으쓱하게 만든 쾌거였다.
한국랭킹 129위인 백9단에게 패한 이영구는 매우 충격에 빠졌나보다.
랭킹12위로 10위권을 코앞에 두고 있는 이 젊은 강자는 자신의 패배를 확인한 직후 급하게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대회장의 진행자가 미처 승패 체크를 할 겨를도 없었다.
다음날 있을 대국준비를 위해 승패 확인 차 전화를 걸어온(승자로 예상되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이 관례) 한국기원 사무국 직원에게 "백사범님한테 전화하셔야 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라고 허탈하게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을 정도로 충격적인 패배였다.
TV해설가로 유명한 백성호가 이영구를 이긴 것은 야구해설가가 실전야구에서 홈런을 친 것에 비길 만하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바둑에서 기전들의 속기화로 더욱 설 자리를 잃었던 중견기사들의 활약은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바둑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흥미거리가 되고 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은 상식이지만 언제나 상식적이기만 하면 재미가 떨어지는 것이 승부세계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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