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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음반과 비망록

언제부터인가 빠르게 사는 것이 미덕이 됐다. 일상의 대부분이 디지털로 무장해가는 세상에서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를 갈구하는 욕구에 더 이상 제동 장치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시대에서도 삶의 가치는 ‘빠르고 편한 것’에만 있지 않다고 일러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느림과 불편함을 즐기는 사람들의 행복론이다.

 

여러해 전, 아날로그적 삶의 가치를 지켜가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분이 있는데, LP음반을 즐겨들었던 오디오 마니아다. 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핸드폰을 갖고 있지 않아 통화조차 어려웠었다. 어렵게 연락이 되었지만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바람에 ‘그럼 음악이라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애면글면 겨우 취재를 했다. 당시 그가 수집한 LP음반은 4000여 장. LP를 즐겨듣는 지인들에게 많이 나누어주었다지만 그러고도 방 벽면을 빼곡히 채운 오래된 음반이 전하는 시간의 무게는 깊었다. 그 역시 CD음반을 듣기도 하지만 음악의 제 울림을 듣기위해서는 LP를 듣는다고 했다.

 

LP는 아무래도 번거롭다. 기온이 낮아지기라도 하면 열을 받아 스스로 힘을 얻기까지 기다리거나 인위적인 힘을 가해야 한다. 어찌됐든 취재를 겸해 갖게 된 그날 우리의 귀는 호사를 했는데, 깊고 인간적인 음악의 존재를 새롭게 알게 된 것 역시 덤으로 얻은 큰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호사보다도 더 깊은 울림을 준 것은 그가 깨우쳐 준 아날로그의 가치다. 그가 말하는 아날로그 가치는 ‘기다림’이었다. 기다리지 않고도 얻어지는 결실은 그만큼 가치가 반감된다는 것이 세상을 살면서 그가 얻은 지론이다. 소중한 지혜를 엿보았지만 그럼에도 속도와 편리함에 묻혀 사는 우리에게 아날로그적 삶의 방식은 어디까지 유효할까 늘 궁금했다.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남긴 ‘리스트’의 실체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녹취록’과 ‘비망록’이 공개되면서다. 음모적이고 음습한 상황이다.

 

주목되는 것이 있다. 그가 세상과 결별하기 직전에 써서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지’와 오래전부터 써왔다는 ‘비망록’의 가치(?)다. 만약 이 기록이 그가 직접 쓴 글씨가 아니라 다른 형식의 활자체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 가치는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조작에 왜곡, 진위여부를 둘러싼 또 다른 국면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아날로그적 방식이 갖는 힘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흥미로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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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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