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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은 황희 정승 논란

장수 방화동계곡을 오르다보면 용소(龍沼)를 지나 널따란 바위 가운데 작은 물웅덩이 하나가 있다. 꼭 작은 세숫대야처럼 생긴 곳인데 이곳을 정승탕이라 부른다. 그 연유는 황희 정승에서 유래됐다. 1418년 조선 태종 때 이조판서였던 황희는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 폐위에 맞서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우는 일(廢長立幼)은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이라며 반대하다 태종의 진노를 사서 유배를 당한다.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황희는 세종 즉위 4년(1422년)에 왕의 부름을 받자 이곳에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한 뒤 상경해 24년간 재상을 지냈고 영의정만 18년을 역임한데서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정승탕이 불렀다. 지금도 이곳 정승탕을 찾는 사람들은 꼭 세수를 한번씩 한다. 유종근 전 도지사도 대권도전 때 이곳에서 얼굴을 씻은 적이 있다.

 

대쪽 같은 소신과 원칙으로 명재상(宰相)과 청백리의 사표(師表)가 된 황희 정승이 생뚱맞은 논란에 휩싸였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며칠 전 라디오 방송 등에 출연해 이완구 총리의 낙마를 거론하면서 “조선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황희 정승이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간통도 하고 무슨 참 온갖 부정청탁에 뇌물에 이런 일이 많았다는 건데 그래도 세종대왕이 이분을 다 감싸고 해서 명재상을 만들었다”고 말해 파문이 일고 있다. 당장 장수 황씨 대종회가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대종회 원로단 회의에 이어 오늘 회장단 회의를 거쳐 김진태 의원의 발언에 대한 공식 대응방침을 결정한다.

 

황희 정승에 대한 기록은 세종 10년 6월 25일자(1428년 8월 6일) 세종실록에 나온다. 세종과 황희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사관(史官) 이호문이 추가한 내용으로 황희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있다. 승려로부터 황금을 받았다며 황희를 ‘황금 대사헌’으로 지칭하고 간통·살인범인 여성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매관매직과 뇌물을 받고 옥살이를 면해주었다는 내용 등이다.

 

이와 관련, 단종 즉위년(1452년)에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 김종서 정인지 정창손 최항 등 9명이 회의를 열고 “우리 아홉 사람이 이미 모두 듣지 못하였으니 이호문이 어찌 능히 홀로 알 수 있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라며 삭제나 개정의견 등을 냈다. 하지만 작성된 사초(史草)를 고쳐 한번 그 실마리를 열어 놓으면 나중에 폐단을 막기 어렵다하여 삭제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우리나라 대표적 청백리를 폄훼해서 현직 총리의 비리 의혹을 희석시키려는 김진태 의원의 언동은 치졸하기 짝이 없다. 재갈은 말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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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택 kwon@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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