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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쉰세 살과 쉰여섯 살

1970년대 중반,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1975년 11월 22일 중앙정보부가 유학생을 가장해 학원에 침투한 간첩 일당을 체포했다고 발표한 이른바 ‘재일동포 간첩단 학원침투사건’이다. 이때 간첩으로 몰려 체포됐던 유학생 중에 재일동포 이철 씨(68)가 있었다. 그는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다행히 감형이 되면서 1988년 가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난해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꼭 40년, 모국의 ‘유학생 간첩’으로 살아야 했던 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일동포 2세인 그는 1971년 처음 모국을 찾았다. 1년 동안 우리말을 배우고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이 1973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면서였다.

 

1962년 재일동포 모국 유학제도가 생기면서 많은 유학생들이 모국을 찾아들었다. 일본 중앙대학교를 다녔던 그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유학하면서 알게 된 아내와 75년 1월 약혼했다. 간첩 혐의로 체포되던 그 해였다. 당시 약혼자였던 민향숙 씨 역시 간첩방조죄로 구속되어 3년 6개월 옥살이를 했다.

 

일본에 있던 이 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약혼녀까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쓰러져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쉰세 살, 젊은 나이였다.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5년 뒤 돌아가셨다. 쉰여섯 살, 역시 젊은 나이였다.

 

결혼 두 달을 앞두고 간첩죄로 구속되어 사형수가 된 이 씨를 민 씨는 구명운동을 하며 기다렸다. 민씨는 1988년 8월 일본에서 펴낸 책 ‘개나리꽃이 만발하는 그날을 믿으며-재일한국인 정치범 이철을 기다린다’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 씨가 가석방으로 출소할 때까지 13년. 1988년 10월 28일, 명동성당에서 이들의 지각 결혼식이 열렸다.

 

이 씨를 전주영화제의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에서 만났다. ‘자백’은 국정원 간첩조작사건을 다룬 영화다. 담담하게 인터뷰를 하던 그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40년 세월도 그렇지만, 내 나이 쉰세 살과 쉰여섯 살을 보낼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건강하셨던 우리 부모님은 간첩죄로 구속된 아들 때문에 충격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나이 쉰세 살, 어머니가 쉰여섯 살이셨어요.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 부모님들에 대한 죄송함과 그리움이 너무 커서….”

 

객석 여기저기서 깊은 한숨과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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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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