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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술

‘우리는 학문연구와 신체단련을 위한 수많은 지침들을 갈고 다듬는다. 그런데 ‘생각하는 기술’ ‘말 잘하는 기법’ ‘기하학 입문’ ‘지리학 개론’ 등 온갖 유용한 가르침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왜 ‘침묵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이는 없는가? 그것이야말로 그 중요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푸대접을 받아온 삶의 기술이 아니던가? ’ 18세기의 세속사제인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가 고전 <침묵의 기술> 을 쓰게 된 이유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대에 <침묵의 기술> 은 제목만으로도 흥미롭다. 이 책이 발간된 것이 1771년, 300년 전에도 말과 글이 차고 넘쳤던 모양이다. 세속사제이면서 사회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문필가이자 논객이었던 저자는 종교문제와 사회윤리, 문학을 주제로 수많은 글을 썼다. 이 책에 담아낸 종교적 주장들 역시 비단 종교에 국한된 문제라기보다는 참여적 논객으로서의 정치적 사회적 발언으로 이해되는 것들이다.

 

디누아르가 정리한 침묵의 유형이 있다. 신중한 침묵, 교활한 침묵, 아부형 침묵, 조롱형 침묵, 감각적인 침묵, 아둔한 침묵, 동조의 침묵, 무시의 침묵, 정치적 침묵이다. 그는 이러한 침묵의 유형을 각종 담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신중한 담화, 교활한 담화, 아부형 담화, 무시의 담화 같은 예다. 침묵의 유형을 담화의 유형으로 적용해보니 ‘무시의 담화’는 이렇게 설명된다. ‘자존심과 오만함을 전제로 하며 상대를 일고의 주목할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하기에 가능한 담화다. -중략- 문제는 그가 침묵함으로써 무시하는 상대가 실은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각종 비리 의혹으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사퇴요구가 거세지고 있지만 정작 청와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보도로는 외레 한 발 더나가 이번 개각의 인사검증까지 그에게 맡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디누아르의 유형 분류로 보자면 일종의 ‘무시의 침묵’ 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데, 중요한 것은 그 침묵의 대상이 국민이라는 점이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부활하여 재해석되고 있는’ 고전 <침묵의 기술> 은 침묵의 가치와 미덕을 설파하지만 무조건 침묵의 절제만을 강조하진 않는다. 디누아르는 열네 가지 침묵의 원칙을 제시하면서도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듯이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있다’며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이다’고 분명하게 비판한다. 지금이 침묵해야 할 때인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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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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