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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나를 보고

‘옳거니 그르거니 상관말고 산이든 물이든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가시가 돋혀 있고, 유유자적하는 삶을 노래한 이 시는 고려 말기 나옹선사가 지었다고 한다. 작자 미상 설도 있다. 논설위원실에 근무한 선배 누군가가 이 시를 원고지에 써서 한 켠에 붙여 놓았는데, 130자짜리 전용 원고지와 볼펜 글씨가 크게 바랜 것으로 미뤄 볼 때 20년 전으로 추정된다.

 

나옹선사 작품이 맞다면, 이 시는 700년 정도의 시공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전해 오고 있는 명작이다. 원고지에 볼펜을 꾹꾹 눌러 ‘청산은 나를 보고’를 쓴 선배도 이 시를 끔찍이도 사랑한 것이리라.

 

사실 ‘청산은 나를 보고’는 매일 세상을 비판해야 하는 논객들의 사무실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1976년 병진년에 강암 송성용 선생이 전북일보 새 출발 3년째에 쓴 논정필직(論正筆直) 같은 작품이 어울린다.

 

어쩌면 매일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지적하고, 대안을 말해야 하는 논객이기에 청산이 속삭이는 귓속말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다. 얼마 전 완주군 용진에 있는 완주소목학교에 들렀는데, ‘직업에 귀천없다’는 커다란 플래카드를 걸어두고 있었다. 요즘 온갖 전동공구가 나와 현장에서 사용되지만, 옛날 목수는 나무를 자르고, 켜고, 마름질해서 톱질과 대패질, 끌질 등 모든 과정을 온몸으로 해내야 했다. 고단하고 ‘천’한 직업이었다.

 

비판적인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인 논객들의 경우, 목수들이 겪는 육체적 고됨은 없지만 불특정한 대상들을 향해 지적해야 하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짧은 한세상 살면서 웃고 칭찬하며 살기도 바쁜데, 제 아무리 직업정신이라고 하지만, 숱한 날들 남이 하는 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옳다고 그르다고 다퉈본 들, 그래서 옳다는 세상이 열렸다고 한 들, 오로지 그것만이 참이고 진실인가. 지금은 구름 껴서 우중충하지만, 구름 걷히면 그 어디든 청산이니 세상만사에 성내지 말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아 가게나. 평생 논객으로 살다 지난 주 청산으로 간 김승일 전 전북일보 주필의 명복을 빈다.

 

김재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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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jhkim@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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