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중흥의 꿈을 담고 있는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600∼641) 때 조성된 왕궁성(王宮城)이다. 오랫동안 비밀에 쌓여있던 이 공간은 1989년,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으로 발굴이 시작됐다. 왕궁 터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2004년. 역사학계는 계획적인 설계에 의해 궁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왕궁 유적의 면면을 주목했다. 궁성 건물지를 건립하기 위해 기반을 다진 석축과 계단 역할을 하는 월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자리한 후원, 뒷간이 있었던 자리까지 그동안 확인된 백제 시대 왕궁의 어느 것보다도 완전한 형태의 궁성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495미터, 동서로 230 미터의 거대한 석축성벽과 대규모 왕궁성, 사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드러난 왕궁의 실체는 화려했다. 새로운 건물지와 함께 ‘王宮寺’가 새겨진 명문기와와 중국청자편, 철제솥 등 중요유물 3천여 점이 발굴됐다. 궁성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방 자리에서 출토된 금세공 유물은 특히 아름답고 정교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왕궁의 존재는 오래전 확인됐지만, 궁성의 내부 구조와 생활공간 등의 흔적이 구체적이고 대대적으로 확인된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후 10여년, 정비 사업을 모두 마치고 궁궐 담장과 후원까지 공개한 왕궁리 유적은 경이롭다. 궁궐 담장은 안쪽과 바깥쪽을 잘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쌓아 올렸으며 백제 유일의 정원 유적으로 꼽히는 후원은 구불구불한 물길, 네모난 연못, 화려한 돌로 꾸민 정원을 안고 있다.
왕궁 터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안게 된 과제가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기록과 유물이 없는 역사는 야사로 묻히기 마련이지만 왕궁리 유적은 왕궁 터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는 기록과 유물에 궁성의 실체를 얻었다. 게다가 왕궁리 유적 일대를 돌아보면 삼국 시대 최대 사찰인 미륵사지와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 현존하는 백제 석불 중 가장 큰 석불이 있는 석불사 등 백제유적이 이어진다.
백제는 비록 패망의 역사를 안고 사라졌지만 700년이란 시간 위에 찬란한 역사를 쌓았다. 중국 문화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을 자기화하고 가치를 더해 일본이나 가야와 같은 이웃나라에 전파하는 문화교류의 중심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왕도였거나 왕도와 직접 관련이 있는 유적이라는 학설만 존재할 뿐 왕궁리 유적은 여전히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실체의 규명이 더 절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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