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부터 이들의 행보는 크게 갈라졌다. 황 전 총리가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할 때 노 원내대표는 유신 반대 유인물을 뿌린다. 1972년 자행된 유신에 대해 야당 인사들도 말 한마디 못할 때 고교생 노회찬은 꽃길을 마다하고 험로에 들어선 것이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감은 노회찬의 마지막 삶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신의 잔재는 무려 46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잔영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유신사무관’이다. 사관학교 출신 대위를 사무관(5급)으로 선발한 특채제도로 1977년 처음 시작해 1988년 폐지될 때까지 배출된 인원은 총 784명이나 된다. 육사 기수로는 25∼37기에 해당한다. 도내에서도 도의회 사무처장, 도 건설국장, 부시장, 부군수를 지낸 수많은 이들이 유신사무관 출신들인데 이들이 완전히 퇴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민주화 열망이 분출하던 1987년, 유신사무관은 군사독재의 주요 상징으로 척결대상에 꼽혔고 결국 노태우 대통령 당선 이후 폐지됐다. 유신사무관 106명을 임용한 1977년 당시 행정고시(21회) 선발인원이 134명이었으니, 유신의 잔재가 얼마가 깊었을 지는 불문가지다.
당시 일반 공직자가 9급에서 5급이 되기까지 20∼30년이 걸린 상황에서, 대위에 불과한 사관학교 출신 사무관은 흔히 ‘유신사무관’으로 일컬어졌다. 그렇게 해서 특채된 이들이 공직을 떠난 게 불과 1년 전이다.
요즘 정국을 강타하는 보안사 계엄문건을 보면 지난해 또다시 계엄이 선포돼 헌정중단 사태를 맞는 등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 일어날 뻔 했다.
노회찬 원내대표가 또다시 유신 폐지나 계엄 폐지 유인물을 뿌려야만 하는 상황을 맞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지 모른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음에도 서민과 함께 한 노회찬의 삶을 새삼 생각하는 날이다. 위병기 문화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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