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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한 해의 끝에 서서

장석주 시인

임진강에 혼자 나가 일몰의 빛으로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다 돌아왔다. 강물은 유구한 세월을 흘러도 그 흐름을 멈추는 법이 없다. 공자는 강물 앞에서 “강물이여, 강물이여!”라고 탄성을 질렀다. 계절의 순환에는 오차가 없어 동백과 모란꽃이 피었다 지고 여름엔 배롱나무 붉은 꽃이 피었다가 졌다. 내장산엔 단풍구경에 나선 이들로 북적였다. 우리를 둘러싼 큰 테두리인 정치의 지각 변동이 어느 해보다 컸다. 한밤중 계엄으로 나라가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졌지만 곧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진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내 소소한 일상에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새벽에 고양이들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준 뒤 나도 유기농 우유를 마시고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의 고요 속에서 책을 읽었다. 나는 고요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누구도 제 행복을 빚는 게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과잉의 정보들이 만드는 소음 속에서 제 불행을 제조해내는데 열을 올린다. 고요가 삶의 평화를 빚는 유일한 조건이라면 ‘정보는 그 자체로 소음’(한병철)인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고요를 사랑한다.

동네 소택지에는 들에 자생하는 까마중이 자라나 까만 열매를 맺었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까마중 열매를 바라보았는데, 어린 시절 이후 까마중 열매를 본 게 신기했다. 부지런한 이들은 소택지에 텃밭을 만들어 고구마와 감자를 심거나 토란이나 땅콩 같은 뿌리 식물을 심어 수확을 했다. 도시에 나와 살게 된 이후 종달새 노래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지척인 고향으로 돌아가리란 기대는 난망한 일이 되었다. 우리 마음 깊은데 자리한 고향은 사라지고 그것은 상상의 지리부도에만 존재할 테다.

올해 유독 폭우가 잦아 여기저기에서 물난리를 겪었는데, 예외적으로 강릉은 오랜 가뭄으로 저수지가 말라붙어 비상급수가 실시되었다. 올해는 결혼이 늘고 신생아 수도 늘었다고 한다. 인구 소멸을 걱정하는 나라로서는 퍽 다행한 일이다. 다들 AI의 광풍 속에서 혁신의 시대가 올 거라고 했다. 과연 누구를 위한 혁신일까? 글로벌 금융과 상품 시장은 더 커지고, 무역은 자국 우선주의와 관세 장벽으로 새 판이 짜이는 게 불가피했다. 소상공인들은 불황에 한숨을 내쉬고 문 닫는 가게들이 많았다.

어떤 이들이 병상에서 한 해를 보냈다. 시름시름 앓다가 건강을 되찾은 이가 있는가 하면 숨을 거둔 이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죽고 사는 건 인간의 의지 밖의 일인 까닭이다. 가난에 처했으면서도 늠름하던 한 시인은 죽기 전 자식들에게 이런 시를 남겼다. ‘내 가난한 아들딸들아./가난함에 행여 주눅 들지 말라./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김관식 ‘병상록’) 가난에 주눅들지 말라! 우리를 일으키는 건 안락이 아니라 우환이다. 불의 단련 속에서 보검이 나오고, 시련의 담금질에서 삶은 단단해진다. 등이 휠 정도로 사는 게 버거울 때 이 싯구를 읽으며 힘을 낸다.

무더위에 지쳐 낮잠만 자던 고양이들은 가을이 오자 식탐을 부리더니 살이 올랐다. 늦가을 오후, 상처한 고교 동창이 세상을 뜬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날과 올로 엮어 시집을 묶었다고 찾아왔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비전향장기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올해 시 몇 편을 내놓고 책 두어 권을 더 썼다. 날마다 나서는 산책에서 기쁨을 누리고, 새 책을 꾸역꾸역 읽는데서 보람을 찾았다. 섣달에는 수술을 하고 입원해 링거 줄을 여러 가닥 매달고 있다가 퇴원했다. 언제 가봐도 병원에는 아픈 사람들이 넘쳐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올해도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장 밝은 빛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나오고, 오늘은 내일의 가능성에서 더욱 빛난다. 한 해가 저무는 지금, 내 안에 일렁이는 설렘과 희망은 곧 누리에 충만할 새해 첫 해의 무량한 빛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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