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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물이 흐려진다’는 논증

최훈 강원대 삼척자유전공학부 교수

부분-인간화 동물의 윤리를 연구하다가 흥미로운 논증을 본 적이 있다. 부분-인간화 동물이란 이식을 위해 인간의 세포나 장기를 주입한 동물을 말한다. 인간의 간을 이식받기 위해 인간의 간세포를 주입한 돼지가 그런 사례다. 이런 연구에 대해 이른바 ‘물이 흐려진다’는 윤리적 반론이 있다. 인간이라는 집단에 부분-인간화 동물이 들어오면 인간의 ‘격’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영어권 학자들이 든 비유가 흥미롭다. 부분-인간화 동물을 허용하는 것은 졸업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졸업장을 남발하여 졸업 자격이 있는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 같았으면 입학을 예로 들었을 텐데.

외국 대학에서는 입학보다 졸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입학 연도인 ‘학번’으로 동기를 구분하지만 미국은 졸업 연도인 ‘클래스(class)’로 동기를 구분한다. 예컨대 “Class of 2020”는 2020년에 같이 졸업한 동기들이라는 뜻이다. 정해진 졸업 요건을 통과한 사람만이 그 대학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방금 말한 논증도 졸업장의 가치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만 받을 때 유지된다는 생각을 부분-인간화 동물에게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입학만 하면 이미 집단의 구성원이 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물이 흐려지는’ 것을 막으려면 입학 단계에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잘 기억 못 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촉발하게 된 사건은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였다. 2016년 이대에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 단과대학을 설립하려 하자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 실세인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의 부정 입학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도화선이 되었다.

학생들이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표면적으로는 ‘졸속 추진’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집단에 ‘격이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직장인 재교육 과정 학생들도 같은 졸업장을 받게 되면 자신들의 졸업장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최근 지역 대학끼리의 통합에서도 똑같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캠퍼스보다 ‘급’이 낮다고 생각한 캠퍼스와 한 학교가 되면 물이 흐려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글쓴이가 있는 대학에서는 네 개 캠퍼스가 통합하면서 졸업장에 출신 캠퍼스를 병기하는 안이 통과되었다. 같은 졸업장을 받는 것조차 거부한 것이다. 법적으로는 하나의 대학이 되었지만, 졸업장에는 여전히 선을 그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재학 중인 학생들이 중도 탈락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재학생 충원율이 낮으면 뭔가 안 좋은 학교로 인식된다. 그래서 대학들은 재학생 충원율을 높이기 위해 애를 쓰고, 학생들을 최대한 졸업시키려 한다. 과거 이대의 사례든 최근의 통합 사례든 입학만 하면 다 졸업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에 기를 쓰고 입학을 막거나 졸업장을 다르게 만들려는 것 아닌가?

해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대학교의 ‘급’에 걸맞게 졸업 요건을 요구하고, 그 급에 맞지 않으면 졸업을 안 시키면 그만이다. 물론 다른 캠퍼스 학생들에게만 높은 기준을 요구할 수는 없으니 자기 캠퍼스 구성원에게도 똑같이 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떤 캠퍼스 출신이든 졸업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같은 수준의 학업 성취를 이룬 사람이 된다. 물이 흐려질 일이 없다.

물이 흐려지는 게 두렵다면 졸업이라는 필터를 엄격하게 작동시키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입학이라는 자격증에만 매달리고, 졸업이라는 성취를 증명할 자신은 없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그럴 자신감이 없어서 입학 단계에서, 아니 졸업장에까지 선을 그어 물을 미리 가르려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들어오기는 어려워도 나가기는 쉬운 것을 부끄러워하고,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려운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것이 격을 높이고 물을 흐려지지 않는 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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