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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국립민속국악원의 대표 창극 ‘산전수전 토별가’를 관람했다. 오랜 세월, 민속악의 본산이자 판소리 특화 국악원으로 그 역사성과 예술성의 맥을 성실히 이어온 지역의 대표 국립국악원. 민속악이란 큰 명제를 두고 국가를 대표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책임감과 연구와 전시, 교육의 총체적 활성화란 의무는 참으로 막중하고도 소중하다. 과거 국립민속국악원은 여느 국공립 창극 단체처럼 다양한 창극을 제작했다. 여느 시·도립 전통예술단체의 예산에 비교해도 적잖은 예산과 수준 높고 특별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국가의 전통문화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다. 더욱이 국립민속국악원은 전라북도라는 지역의 판소리 문화에 가치확산을 두고 창조적 발전을 모색해 왔기에 지역민의 눈높이는 항상 높고 기대감이 컸다. 이러한 주어진 큰 명제를 안고 국립민속국악원이 만들어낸 이번 대표작품 ‘산전수전 토별가’는 특별함을 주는 신선함이 있었다. 창극의 변화는 무한하다. 이번 창극은 그러한 변화에 독창적인 탈바꿈을 주도한 작품으로 먼저 국립민속국악원의 전통 창극에 대한 열정과 희열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신묘한 연출자의 창의력과 고민하고 몸을 불사린 창극단원과의 절묘한 교합이 아니었을까? 국립기관으로서의 차별성.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지만 그동안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도립창극단이나 시립창극단에서 보아온 창극과의 차별성. 진정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한 고민을 안고 만들어낸 ‘산전수전 토별가’는 국립국악원의 창극이 ‘어떠한 예술적 관점으로 어떠한 정체성으로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기획되고 제작되어야 하는가’라는 딜레마에 실마리를 풀어주는 듯한 작품이었다. 동시대적 문화의 관점을 풀어 넣으며 현대에 치우치지 않고 전통 창극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회유성. 국립창극단과의 차별성은 또 다른 과제다.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은 엄연히 구현하며 추구하는 아젠다가 다르다. 적극적인 동시대성은 국립창극단만으로도 족하다. 그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본 작품의 지향성은 혁신과 수용에 있어 본질을 잃지 않았다. 이제 더욱 깊은 민족정신과 전통 삶의 방식을 이해하며 올바른 계승과 창작 그리고 올곧은 전통 수용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민족 자아의 존재감을 더욱 묘사할 줄 아는 창극이 되어야 하겠다. 긴 세월 민속악의 본산으로 자리를 지켜온 국립민속국악원. 신선한 창의적 토별가를 보며 더욱 민속악 본산으로서의 기대감이 높아진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드신 모든 국악원 구성원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더욱 다듬어 브랜드의 가치로 만들어 주시기를 소망한다.
아마도 80년대 초인듯하다. 라디오 방송에서 자주 나오는 노래 중 하나였던 “칭기즈 칸”. 뜻 모를 내용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노래의 리듬에 흥취 되어 짧은 독일어로 된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르던 시기가 있었다. <징. 징. 칭기즈 칸. 헤. 라이터. 호. 라이터. 헤 라이터. 이머. 바이터!> 노래와 함께 어깨를 덩실대며 추던 즐거운 기억에 잠시 칭기즈 칸이란 인물과 그의 어록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몽골 유목민 중 한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테무친은 우여곡절 끝에 1206년 유목민의 대표 자리인 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칭기즈 칸으로 불리게 되며 이름의 뜻처럼 칭기즈 칸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가 된다. 칭기즈 칸은 몽골의 부족들을 모두 통일하였으며 나아가 서요와 서하를 정복하고 이어 만주와 중국 북쪽을 지배하던 금나라와 중앙아시아까지 뻗어 나갔던 시대 인물로 대륙의 정복자란 뒷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훌륭한 정책과 평가는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시행했던 계급 폐지와 종교의 자유 그리고 인종차별 금지였다. 또한, 고른 인재 등용이란 혁혁한 평가가 있는데 가족뿐만 아니라 능력이 검증된 가까운 친구 그리고 적이었다 하더라도 아군이 된 사람에게 능력과 신의가 인정되면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나라를 운영하는데 등용했다. 칭기즈 칸은 좋은 혈통을 가진 집안이었지만 처절한 몰락을 겪었고 재기를 위해 자신과 혈연이 없는 부하들의 능력을 활용해 다시 성공한 정복자로서 삶을 살았던 인물로 그의 등용 방식은 특별한 가치로 인물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칭기즈 칸은 인재를 등용하며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칭기즈 칸이 되었다.> 큰 의미를 주는 어록이다. 현대인이 시대의 정복자로 불리는 그 이름을 부르며 아련한 노래에 추억을 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도 오래된 위인의 이름이 담긴 음악을 되찾아 들으며 역사의 흐름을 가늠해 본다.
싱그러운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다양한 기념일이 있고 각 지역엔 풍성한 축제가 형형색색 주제로 펼쳐져 그동안 잊었던 우리 삶에 쉼과 감사함을 선사한다. 외국도 5월에는 흥겨운 축제가 넘쳐나는 시기이다. 그러한 축제와 많은 기념일에 특히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제품이 있으니 그것은 굿즈(goods 특정 브랜드나 연예인 등이 출시하는 기획 상품. 드라마, 애니메이션, 팬클럽 따위와 관련된 상품)란 제품으로 콘텐츠마다 특성에 맞는 이미지와 광고가 붙어 어린이를 비롯하여 성인도 소유하고자 하는 감성을 유도하기도 한다. 브랜드 굿즈와 맞물려 조립형 장난감 Lego란 회사는 시대적 관심과 사회적 공감을 받은 콘텐츠와 연계한 상품을 개발하고 선을 보여 큰 인기를 얻었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인기 장난감으로 남녀노소에게 모두 사랑받고 누구나 하나쯤 소장하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우리나라 강원도 춘천시에도 장난감 디자인으로 조성된 테마파크 레고랜드가 생길 정도이니 그 인기는 단연 최고인듯하다. 현재 한국에서 인기 있는 레고는 새롭게 개발되는 것. 즉, Marvel이나 Ninjago, Chima 시리즈이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 최고 인기 레고는 단연 Star Wars로 한국과 다른 성향의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영국에서 Star Wars는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적 문화에 가깝지만, 한국 아이들은 Star Wars 자체를 잘 모른다. 한국 아이들에겐 낯선 인디애나 존스 같은 경우도 이곳 아이들에겐 상당히 인기 있는 캐릭터이다. 유럽은 한국에 비해 세대 간의 문화적 단절이나 격차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계속해서 새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옛것을 재발굴, 재향유하는 문화가 있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영국은 과거를 계속 되새김하는 경향이 큰 나라라 더욱 그렇다. TV 등에서 과거의 가요나 드라마, 영화 등을 계속 되풀이 보여주는 것도 전 세대가 공통의 문화를 누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 학교에서도 옛 가요나 영화 등을 수업시간에 자주 이용하는 듯하다. 아이들이 7, 80년대 심지어 5, 60년대의 대중문화를 접하는 기회가 많고 그러다 보니 결국 부모와 아이가 같이 즐기는 문화들이 많아진다. 과거의 대중문화는 유행 지난 구닥다리로 취급받으며 그 시대의 향유자 외의 사람들에겐 완전히 낯선 것이 되는 우리의 풍토와는 꽤 다르다. 한 나라의 문화 정체성은 발굴과 향유에 있다. 지나간 대중문화가 낯선 취급을 받는 시대에는 전통문화의 가치도 더욱 빛을 잃는다. 고른 시대의 문화 향유는 더욱 다양한 가치를 창조하며 존재의 우수성을 이루어낸다.
서울 노원구와 의정부 양 둘레를 아우르는 수락산. 그곳에는 유장한 벽운동 계곡이 있는데 계곡이 시작되는 입구를 조금 걷다 보면 우우당(友于堂)이라는 터가 나온다. 우우당은 사도세자의 비(妃)이며 정조대왕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가 어릴 적 많은 시간을 보낸 곳으로 홍씨의 아버지이자 삼(三)정승을 역임한 홍봉한의 별장이기도 하다. 지금은 터라는 곳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조그만 출입문과 담장 그리고 말을 묶던 주춧돌만이 남아 아련한 역사의 기억을 잇고 있다. 혜경궁 홍씨를 생각하면 필자는 두 가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대왕이 어머니 마음을 위로하려 차린 회갑연이요. 또 하나는 홍씨가 쓴 한중록이다. 필자는 전통예술가의 삶을 산지라 널리 알려진 한중록보다는 회갑연의 기억이 더욱 선명하다. 과거 국립국악원은 전통문화 가치를 재발견하고 조명하기 위해 조선 왕실 음악과 춤 소재로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2001년 초연된 <태평 서곡>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내용이 담은 작품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속 고증으로 만들어졌다. <수제천>, <여민락> 등의 궁중음악과 <무고>, <선유락> 등 화려한 궁중무용이 충실히 재연되었다. 사실 1795년 수원 화성에서 연행되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단순한 잔치나 연희의 수준을 넘는 궁중문화의 결정체였다. 그러한 이유로 국립국악원에서는 전통음악, 전통무용뿐만 아니라 궁중 복식과 의물 등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궁중의 문화를 함께 담고자 노력했으며 작품 완성도에도 많은 세심함을 배려했다. 이러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재현 작품은 2001년 초연 이후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과 2010년 파리 일드 프랑스 페스티벌 등에 초청되면서 세계의 많은 관객에게 뜨거운 찬사를 받았으며 2010년 7월엔 국내 부산에서도 국립부산국악원과 국립국악원 본원과 협업, 공동제작을 통해 재발표되었다. 그 당시 필자는 국립부산국악원 악장으로 집박(궁중음악과 무용을 지휘하는 직분)의 역할을 맡아 함께 참여하였는데 한국 정신문화의 정수인 효(孝)와 예(禮)를 알리는 보람된 작업으로 현재까지도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친정인 풍산 홍씨의 몰락을 탄원하며 자신의 친정 집안을 신원(伸寃)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한 문집으로 현재 3대 궁중문학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혜경궁 홍씨. 지아비를 안타깝게 잃어야 했던 불운. 아들인 정조대왕의 정성 어린 효.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들과 처가를 지키시고자 노력했던 강직함. 이젠 수락산 우우당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간직된 효와 예의 이야기는 후대에 소중히 전해져 간직될 것이다.
지난 미세먼지가 온 세상에 가득한 토요일, 정읍 내장산 어귀 “샘소리터”라는 한 가옥에서는 한국 풍류의 멋을 알리는 작은 음악회가 있었다. 마치 세상에 뿌려진 더러운 먼지와 기운을 없애는 듯 아정한 풍류 선율은 오신 한분 한분의 심신을 치료해주는 묘약과도 같았다. 풍류란 의미를 찾아보면 <속된 일을 떠나 풍치(風致) 또는 운치(韻致)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이라 칭한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과 관련해 풍류를 잘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풍류가 또는 풍류객이라 불렀다. 옛 우리 민족은 조선, 고려, 삼국 등 왕조의 제도적 관제에서 궁중 연희를 필요한 요건으로 포함시켰고, 그러한 귀속된 행위에는 악공이라는 직책을 두고 책임을 맡아 관장하게 했다. 제도적 관제를 벗어난 민간 즉 궁중 밖 일반 백성에게도 풍류가 있었으니 그러한 행위도 소위 민간잔치에서 치러진 풍습으로 이어졌다. 단지 민간에서는 전문적인 악공이 없는 관계로 창우·광대·재인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듯 풍류란 관(官)과 민(民)이 모두 함께하던 전통의 순수 문화였으며 즐기던 민족 전통예술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지식과 재부(財富)를 겸한 중인층이 시회(詩會)나 가단(歌壇)을 형성하여 민간풍류를 새로운 풍류로 발전시켰다. 그런 풍류의 음악문화는 성악인 '가곡·가사·시조', 기악인 '영산회상(靈山會相)' 등 새로운 갈래의 민간 풍류로 이어졌으며 조선 후기 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우리나라 민간풍류의 실질적인 개척자로는 단소 명인인 추산(秋山) 전용선(全用先) 명인이 계신다. 그는 전라북도 정읍 입암면 출신으로 정읍지역 풍류계인 아양계와 초산율계 등 지역 풍류의 전승과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다. 전용선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편재준, 나금철, 유종구 등이 있으며 그가 전한 풍류는 후에 한국의 민간(이를 향제鄕制라 부르기도 한다) 풍류의 주춧돌이 된다. 정읍 내장산 '샘깊은소리회'는 풍류 가인(佳人) 김문선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 대한민국 풍류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정읍 풍류 맥을 잇고 있는 순수 민간 풍류악회이다. 매주 정읍의 지역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학습하며 풍류를 즐긴다. 진정 풍류가 좋아 음악을 함께 즐기는 모임으로 한국 전통예술이 살아 숨 쉬는 전승(傳承)의 현장이라 하겠다. 진정한 민간(향제鄕制)풍류란 정형화된 무대가 아닌 이렇게 삶의 현장 속에서 몸과 마음을 함께하며 일구어낸 음악이 아니었을까? 그날의 공연을 보며 내심 우리의 전통문화를 올곧게 지키는 이는 바로 전문 예술가들이 아닌 우리 가족이고 친구이며 이웃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전주 한옥마을 가다 보면 전동성당 앞 큰 궁궐이 지어져 있는데 그곳은 모두가 아는 바로 ‘경사스러운 터에 지은 궁궐’이란 뜻의 “경기전(慶基殿)”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왕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고자 세워진 건물로써 건립 시기는 1410년인 태종 10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모시기 위한 목적으로 창건됐다. 현재 경기전에 안치된 어진은 국보 3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초상화의 대가인 운계 조중묵이 모사(模寫)한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의 어진이다. 예로부터 임금의 용안을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실제로 임금의 용안을 본 사람도 적을뿐더러 신변 보호를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적도 드물었다. 이러한 차로 귀한 어진을 모셔 놓은 경기전의 위엄은 남달랐다. 우선 경기전 입구에 “하마비(下馬碑)”라는 석비(石碑)가 있는데 자그마한 위엄의 동물을 세웠다. 이 돌상은 특이하게도 암수 두 마리의 돌 사자상으로 되어 지나치는 사람의 경계를 자극한다. 또한, 지방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흰 대리석 돌기둥의 두 행(行) 세로 형식의 글이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곳에 이르렀거든 모두 말에서 내리라.(至此皆下馬) 잡인들은 출입할 수 없다.(雜人母得人)” 임금의 어전이 있는 경기전은 항상 신성한 곳이므로 함부로 몸을 두어서는 안 되며 지위와 신분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하고 특히 잡인은 애초부터 출입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경기전 앞을 많은 시간 다녀 보았지만 정작 하마비의 글과 두 돌 사장상을 자세히 보기엔 처음이었다. 내심 경건한 마음까지도 생기던 차, 두 돌의 모습이 ‘해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역시나 섣부른 판단은 무지한 까닭이고 문헌을 찾아보니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사자 숫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사자 암놈’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즉 암수 사자 한 쌍이 특유의 조화를 이루면서 경기전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심코 지나간 경사스러운 터 “경기전” 그리고 그 아정함과 태조 어진의 위엄을 지키는 “하마비”는 풍패지향 전주를 외치며 애향심을 보듬었던 필자 무지(無知)의 부끄러움 속에 스며들었다. 한때 정유재란(1597년)으로 경기전이 불에 타자 태조의 영정은 정읍-아산-강화-묘향산 등지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광해군 6년인 1614년 가을에 관찰사 이경진에 의해 경기전을 다시 짓게 되고 어진을 비로소 모시게 된다.
며칠 전이다. 주말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부산하고도 자갈치시장 더불어 남포동에 바람도 쐴 겸 나들이를 하러 갔다. 코로나19의 역병이 끝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주말을 이용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들이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참 반갑고 기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자갈치시장에서 회 한 접시로 식사하고 부산의 중심지 남포동을 갔는데 신묘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 모습은 남포동 씨앗호떡을 파는 길거리 포장마차의 풍경이었는데 대기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 자그마치 한 1km는 되는 것 같았다. 인산인해(人山人海)의 사람들은 버터에 튀기는 씨앗호떡이 신기한 듯 내심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 또한, 익히 소문에 들은 씨앗호떡의 자태를 보니 구미(口味)가 당겨 발걸음을 멈추고 순서를 기다리게 되었다. 호떡을 바라보니 많은 생각이 났다. “보통 호떡은 겨울에 생각나는 간식인데? 신기하게 사람이 많네. 호떡은 우리 전통음식인가? 중국 음식인가? 호떡 안에는 도대체 무엇을 넣어도 맛이 있네. 짜장면 같은 음식이네 등등” 순서를 기다리는 긴 시간 동안 마치 요리연구가 된 듯 필자의 궁금증은 더해갔다. 이 글을 읽는 우리 독자들도 씨앗호떡이 뭐길래 하는 궁금증이 있으실까 봐 잠시 맛난 호떡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한다. 호떡을 문헌에 찾아보니 우리의 전통음식도 중국의 고유 음식도 아니었다. 호떡의 ‘호’는 한문 ‘胡’인 오랑캐를 뜻한다. 즉 호는 서역(西域),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아랍 사람을 일컬어 부르던 명칭으로 이름에서 보듯 호떡은 오랑캐인 호인들이 만들어 먹던 떡에서 유래되었다. 중앙아시아에 삶의 터전을 둔 흉노족과 돌궐족은 쌀보다 밀이 더 많이 생산되는 관계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화덕에 굽거나 기름에 튀겨 먹는 주식(主食)의 문화가 있었다. 그러한 지역의 특수성에 의해 즐기던 호떡은 기원전 2세기 무렵 흉노족의 왕자가 처음으로 중국 본토인 한나라로 유입한 후 동아시아까지 그 맛을 전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호떡 유입 기원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시기쯤이라 논하는데 그 당시 전쟁이 끝나고도 본토로 돌아가지 않은 중국 상인들이 생계를 위해 만두와 호떡과 유사한 음식을 팔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호떡의 속 내용물로 설탕이나 조청 등을 넣어 만들었으며 시대가 변화하면서 취향도 다양해져 치즈, 씨앗, 꿀 등 많은 재료가 들어가게 된다. 부산은 1980년대 후반 남포동에서 각종 견과류를 넣어 판매하면서 씨앗호떡이 생겨났다. 건포도, 해바라기씨, 땅콩 등의 견과류로 속을 채워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추구하는 특별한 호떡이 되었다. 부산 외에도 한국의 호떡은 충남 당진 황가네 호떡, 속초 찹쌀 씨앗호떡 등 지역의 특별한 맛으로 재탄생하여 많은 식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제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표현이 왠지 어색하지 않게 들려온다. 호떡은 그렇게 우리 대한민국 전통문화 속에 작은 쉼표를 만들며 지역의 든든한 간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가왕 송흥록 친누님의 남편이었던 김성옥(金成玉)은 정조 19년이던 1795년 충남 강경에서 출생하여 전라북도 여산에서 생활하며 활동하던 시대 명창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리에 타고난 신동이었지만 집안이 궁핍한 환경이어서 재능을 펴지 못할 어려운 사정이었다. 김성옥은 그러한 환경에 굴복지 않고 소리에 대한 열정을 높여갔는데 이른 14세에 계룡산으로 들어가 소리 공부를 하게 된다. 하늘도 그의 맘을 알았을까? 피나는 노력과 인내 끝에 입산한 지 10년이 되던 해 그는 득음대성(得音大成)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김성옥은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를 잘 불렀다. 하루는 전라감사의 부름을 받고 선화당에서 소리를 하게 되는데 청중은 그의 첫소리만으로도 감동하여 매력에 빠지게 된다. 김성옥의 맑고 아름다운 성음 그리고 풍성한 성량은 듣는 이로 하여금 탄복을 자아냈다. 저마다 “성대 제일인자의 명창”이란 극찬을 하게 되었고 그의 명성은 하늘을 치솟듯 올라갔다. 그러나 김성옥은 계룡산에서 수련할 때 굴속 냉골 방에서 10년 동안 기거하고 오랜 시간을 제대로 먹지 못한 관계로 몸은 쇠약해 있었고 외모는 병에 걸린 사람인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산군수의 생일연에 불려가 소리를 하는데 김성옥은 소리 도중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다리를 주체못해 쓰러지게 된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 내로라하는 명의를 불러 침도 맞고 약을 먹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판명된 병명은 학슬풍(鶴膝風). 마치 학의 다리처럼 가늘면서 무릎만 붉게 부어올라 고통이 심해, 마치 산 송장처럼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고약한 병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결하려 했으나 애원하는 아내의 눈물과 설득으로 마음을 다시 잡는다. 등을 받쳐 겨우 밥을 먹었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아들인 김정근에게 자신의 기량을 전승하며 소리에 대한 애정을 쏟는다. 이때 장단에 대해 특별한 고민도 하게 되는데 <진양조>라는 장단을 창안하여 사용하기에 이른다. 순조 22년이던 1822년 어느 날, 김성옥의 처남 송흥록과 송광록은 병문안 차 왔다가 고마움의 화답으로 부른 <진양조> 소리를 듣게 된다. 이때만 하더라도 판소리 중 가장 느린 장단은 <느린 중모리>로 한계가 있었다. 이보다 더 느리고 애처로운 장단인 <진양조>를 그 자리에서 듣게 된 송흥록은 흥분하여 감탄을 자아냈고 이에 김성옥은 송흥록에게 <진양조>를 더 다듬어 완성케하여 세상에 전해달라는 소원을 청한다. 그 후 가왕 송흥록에 의해 <진양조>의 완성은 최고에 이르렀고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가 어우러져 소리의 극치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김성옥은 천재의 빛을 다하지 못하고 순조 25년인 1825년 31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지난해 말 3년 임기를 마친 오스모 벤스케 전 서울시향 음악감독과 함께 24·25일과 30·31일 시벨리우스의 곡으로 마지막 호흡을 맞춘다. 벤스케 전 감독은 언론을 통해 음악감독으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로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 작품을 담은 음반 발매한 것을 꼽았다. 그는 “서울시향 단원들이 윤이상 음악 녹음을 주저하는 이들이 많아 한국 교향악단이 왜 한국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고 녹음해야 하는가를 설득해야 했다”라며 “독창적인 그의 음악을 한국이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연주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자신의 의지를 뚜렷이 말했다. 또한, 그는 “윤이상을 선택한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한국 전통미가 들어간 교향곡의 완성도를 피력했다. 이처럼 언론에 비친 짧은 이야기는 필자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녹음을 주저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겠지. 윤이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이다.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은 뒤 서독으로 귀화한 어두운 과거가 있지만, 한민족의 음악을 세계로 알린 음악가로 그의 작품은 대한민국의 존엄성을 서방에 널리 알린 특별한 곡이다. 그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창원시이며 경상남도 통영에서 자라며 공부했다. 이때 그는 ‘통영의 남해안 별신굿’, ‘통영 오광대’, ‘통영 승전무’ 등 지역의 전통예술을 많이 듣고 보며 체험했는데 그러한 경험은 훗날 작곡에 필요한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14세에 독학으로 작곡 공부를 시작하여 18세에 일본 오사카음악학원 그리고 늦은 38세였던 1956년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와 독일에 생활하며 자신만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후 1964년 독일 포드 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 정착하며 <심청> 외 많은 오페라를 비롯 <바라>, <무악>, <예악>, <광주여 영원히> 등 20여 편의 관현악곡과 함께 평생 백 오십여 편이 넘는 주옥같은 음악을 남겼다. 윤이상은 1963년 플롯과 피아노 이중주 <가락>이란 작품을 통해 플롯의 직선적인 소리를 한국 전통악기 표현 방식인 음을 떠는 요성, 음을 끌어올리는 추성, 끌어내리는 퇴성을 사용하여 한국적 표현 방식을 도입했다. 마치 플롯이 대금인듯한 묘한 울림은 관객에게 특별함으로 다가섰다. 또한, 1966년 교향곡 <예악>이란 작품을 초연하였는데 우리나라 전통악기 박(拍)을 사용하여 작품의 시작과 끝을 알렸고, 곡의 흐름을 때론 동일하게 때론 다르게 선율을 만들어 긴장과 이완을 창출했다. 그리고 느리고 장중한 느낌을 자극하여 마치 한국 전통음악인 정악(正樂)을 듣는 듯한 착각을 이끌기도 했다. 이렇듯 윤이상은 우리 한민족의 전통음악을 세계인에게 알리고자 노력한 작곡가이다. 그가 고백하기를 “내 상상력의 모티브는 한국 전통음악이다.”란 마음을 토로했을 정도로 한국의 전통예술을 사랑한 예술가이다. 현재 윤이상의 음악 세계는 현재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 윤이상평화재단 등의 활동을 통해 올곧게 이어지고 있다. 이제 많은 한국 유수의 교향악단들이 윤이상의 곡에 더욱 애정을 갖고 많은 연주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근대 명창인 송우룡(宋雨龍)은 조선 순조 25년인 1825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집안의 어른들은 ‘우렁이’라 칭하고 항상 아명으로 불렀는데 사연을 한번 살펴보자. 그의 부친인 송광록은 얼마나 우렁이를 좋아했던지 우렁이가 논에 나오는 5월만 되면 우룡의 모친은 매일 논에 가 우렁이를 잡아 항상 식탁에 내놓았다고 한다. 그날도 우룡을 잉태하여 만삭이 된 몸이었지만 모친은 논으로 우렁이를 잡으러 갔다가 그만 논두렁에서 우룡을 분만하게 된다. 그래서 우렁이를 잡으러 갔다 세상에 나온 사연으로 ‘우렁이’라 불렀고 청년이 돼서야 아명(兒名)인 우렁 중 ‘렁’을 ‘용 룡(龍)’자로 고쳐 “우룡”이라 이름을 짓는다. 아버지 송광록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왕 송흥록의 친동생이다. 그러한 이유로 송우룡은 집안 내력의 힘을 얻어 소리의 법도를 계승하였고 성장 후 조선 철종과 고종 임금 양대 간의 이름을 떨친 명창이 된다. 판소리가 집안의 전통인 만큼 조선 소리판을 아울렀는데 한때 큰아버지 송흥록의 제자 박만순과 백중(伯仲)을 다투다가 송우룡이 어떠한 사연으로 목을 상한 후 박만순이 소리판을 주도했다고 전한다. 김창록은 송우룡과 같이 한 시대를 풍미한 명창으로 순조 22년인 1822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서 태어났다. 동편제의 명창으로 김세종, 박만순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의 명성이 높았는데 그의 <심청가>는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그가 부른 <춘향가> 중 ‘춘향 방에 놓인 팔도 담배 대목’은 각기 다른 담배의 특색을 하나하나 들어 말하고 소리하는 것으로 그의 특기였는데 그 재담과 사설의 재미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대목의 소리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김창록은 50세 이후 <심청가>를 부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청중이 자신의 소리를 듣고 흐느껴 울음을 그치지 않아 그로 인해 자신도 상심(傷心)하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참으로 타고난 하늘의 감성을 지닌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소리 중에 혹, 까치 소리가 나는 대목이 나오면 마치 하늘을 나는 실제 까치인 줄 오인하고 모든 청중이 하늘 보았다 하니 가히 시대를 풍미한 명창이라 하겠다. 지나온 근대 두 명창의 일화를 보듯 그들의 삶은 희로애락 안에 녹아난 예술가의 혼과 같다. 환한 웃음과 신기한 이면 생활 속의 일화지만 그들의 모습은 예술 자체였다. 청중과 함께 소리판을 즐겼고 삶의 자체를 소리로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그들의 소리를 즐겼고 품은 고된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승화시켰다. 현대에는 그러한 생활 속 소리판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만 간다. 우스개 일만의 일화도 찾아볼 수 없고 아집과 독선이 가끔은 구설(口舌)에 올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제 옛 그리운 명창들의 일화를 생각하며 잠시라도 여유롭고 쉼이 있는 삶의 시간을 그려보았으면 한다.
지난주 중앙 언론은 해외에서 선전한 한국 음악계의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그것은 올해 5월 개최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 부문 본선에 한국인 성악가가 무려 18명이나 진출했다는 소식이었는데 본선에 오른 전 세계 64명 중 28%인 18명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보도였다. 단일 국가로 클래식 강국 독일의 6명, 미국과 프랑스의 7명을 뛰어넘는 이 엄청난 결과는 클래식계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 예술계의 기쁨으로 다가왔다. 일찍이 우리는 가무(歌舞)를 즐긴 민족이었다. 즉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하여 생활 속 깊이 노래와 춤을 간직했다. 이웃 나라인 중국의 옛 문헌을 살펴보면 그러한 우리 민족에 관한 글들이 많이 서술되어 있다. 관련된 내용의 글을 살펴보면 송(宋)나라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 중 동이열전(東夷列傳) <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 삼한 등 생활 모습을 적어 놓은 책> 서문(序文)에는 “동이족은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란 기록이 있으며 부여(夫餘)를 알리는 부분의 글 속에는 “노래하기를 좋아해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란 내용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모습으론 “밤에는 남녀가 떼 지어 노래를 부른다.”라고 피력하고 있으며 한(韓)에 관한 서술로는 “항상 5월이면 농사를 마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晝夜)로 술자리를 베풀고 모여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라고 적혀 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생활 자체였다. 그래서인지 반가운 희보가 내심 “당연하지. 그럴 수 있어!”라는 자신감으로 의욕이 앞선다. 이렇듯 역사 속 우리의 선조는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화합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런 이유로 어려운 국난의 6.25 전쟁 속에서도 부산 용두산 공원에 국립국악원을 세워 민족혼의 노래와 춤을 아우르며 난세(亂世)를 극복했다. 현대에는 국악, 클래식, 대중가요 등 민영방송과 종편 방송의 많은 장르의 노래 경쟁 프로그램이 생겨났으며 공영방송의 <전국노래자랑>이란 프로그램은 국민의 많은 애정을 받으며 반세기라는 큰 역사를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의 노래에는 보람과 즐거움 그리고 경이로움이 있다. 그 장소가 외국이든 한국이든 우리의 민족혼이 담긴 노래는 현장(現場)을 아름답게 울릴 것이다. 그 울림 속에는 한민족의 감동이 있고 사랑이 있다. 다시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 부문 본선에 오른 18명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성악가들에게 감사와 성원을 보내며 노래 속에 담긴 애절하고도 환희에 넘치는 한민족의 패기와 정열을 세계만방(世界萬邦)으로 널리 알려주기를 전 국민과 함께 소원합니다.
송흥록은 경상감영에 들어가 소리를 하려다 보니 감영이라는 장소의 기운 때문에 몹시 긴장하고 흥분케 된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의 단가로 청중 마음을 휘어잡았고 이어 부른 춘향가 중 <옥중가>로 많은 이를 현장에서 울리게 했다. 모인 사람 중에는 경상감영의 관기인 맹렬이란 기생이 있었는데 송명창의 소리에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송흥록을 흠모하게 된다. 맹렬은 이후 경상감사에게 구실을 만들어 인연의 허락을 받아냈고 그가 있는 운봉으로 찾아가 마음을 고백하고 백년가약을 맺는다. 하지만, 운명과도 같은 송흥록과 맹렬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속사정은 자세히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우선 드러난 이유는 송흥록의 성격과 맹렬의 지나친 질투가 원인이라 전한다. 부부란 도(道)를 맞추어나가야 하는 것이 이치인데 그 둘은 그렇지 못했다. 송흥록과 맹렬의 한 일화이다. 어느 날 송흥록은 진주 관찰사의 부름을 받게 되어 맹렬에게 20일 정도의 이별을 고하고 여정을 떠났다. 하지만 일이 늦어져 3일 늦게 운봉에 돌아왔는데 맹렬은 가출하고 집에 없었다. 송흥록은 놀라 식음을 전폐하며 맹렬을 찾아다녔다. 시간이 지난 후 맹렬이 진주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을 땐 이미 진주병사 이경하의 기녀가 되어 있었다. 사연을 살펴보니 맹렬은 송흥록이 정해놓은 약속날짜에 돌아오지 않자 필연코 다른 기생과 정을 통한 것이라 오해한 나머지 가출하여 진주로 가 자청하여 이경하의 수발을 들게 되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맹렬의 상대가 진주병사란 사실을 모르고 진주로 가서 맹렬을 찾았고 뒤늦게 맹렬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이경하에게 고하여 송흥록을 불러들인다. 이경하는 송흥록을 불러 “네가 명창이라지? 수궁가를 한번 들어보자. 나를 웃기고 울리면 3백 냥을 줄 것이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을 베리라”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송흥록은 맹렬이 앙갚음으로 진주병사인 이경하에게 고해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했고 그의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송명창은 소리를 시작했지만, 이경하의 얼굴은 차갑게만 변해갔다. 소리의 중간쯤 왔을 때였다. 송흥록은 이경하에게 달려들어 눈을 바라보며 “아이고 아저씨, 어째서 웃지 않으시오? 날 죽이고 싶소?” 하고 농담조로 말했고 그러한 패기와 장난 말이 효과가 되어 그만 이경하가 폭소를 터트렸다고 전한다. 기회를 놓칠세라 송흥록은 자신의 장기인 애절하고 처절한 소리로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을 불렀고 모인 많은 사람에게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게 했다. 이에 진주병사 이경하는 탄복하여 3백 냥의 상을 내리고 송흥록과 맹렬을 다시 결합시켜 고향인 운봉으로 내려보냈다고 전한다. 하지만 송흥록과 맹렬은 평생을 함께하지 못하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송흥록은 조선 정조 때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나이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와 슬기가 출중했다. 6세부터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했는데 학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에게 판소리 춘향가를 배웠다. 당시 그의 명석(明晳)함을 아낀 서당 훈장은 “네가 양가에 태어났으면 장차 큰 인물이 될 터인데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라고 총명함을 칭찬했으며, 판소리에서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두서너 번 만에 소리를 듣고 모두 따라 했다고 전한다. 이에 서당에서는 그의 총기(聰氣)과 예술적 재주에 ‘신동(神童)’이라 불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무보살의 시현(示現)이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송흥록은 12세 때 집에 우연히 들어온 탁발승의 조언을 듣고 출가하여 백운산 암자의 월광 선사에서 학습하게 된다.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선사 아래 폭포수 암반에 앉아 춘향전을 수백 번 반복하며 학습하였고 선사에게는 틈나는 대로 한문을 배웠다. 그 당시 선사는 큰 가르침을 주었는데 <말과 음의 조화를 이루는 창법을 알아야 하고 귀성이 낀 소리, 맵시 있는 너름새,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이른바 득음(得音)을 완전하게 구사하며, 사설의 발음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연마를 하되 소리 밖의 소리가 있고, 장단 밖에 장단이 있으니 그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네가 지금 부르는 춘향전 사설이 너무 조잡하니 모든 가사를 정리하고 이를 집대성하라>란 큰 깨달음의 진언(眞言)이었다. 이에 송흥록은 크게 깨우치고 모든 춘향전 가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음악적 기교를 사설에 맞게 수정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다. 또한, 고전에 전해오는 별주부전(수궁가), 변강쇠타령, 적벽가 등을 창작하고 집대성하여 큰 업적을 남긴다. 송흥록은 이렇듯 노력과 공력을 쌓아 입산한 지 10년 만에 득음 대성하였고 많은 권력가와 민초의 사랑을 받는 명창이 된다. 송흥록은 많은 전설과 신화를 남긴 명창이다. 그는 무슨 소리든 헛되이 듣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날아가는 새, 부는 바람, 흐르는 물, 달리는 짐승의 소리까지 귀를 기울이고 연구와 고민 그리고 연습을 반복했다. 즉 모든 만물이 평생 연구 대상이었다. 훗날 헌종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모흥갑도 송흥록을 가왕(歌王)이라 떠받들고 스스로 물러간 것만 보더라도 송흥록의 소리와 격조는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송흥록은 어느 날 경상감영의 부름을 받고 선화당에서 <옥중가>를 부르게 된다. 그 당시 경상감영의 기생이었던 맹렬이란 기생이 있었는데 송흥록의 자태와 절세(絕世) 기예에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현재 우리나라 많은 언론에서는 생활한복의 ‘일본풍’ 변질이란 논란으로 난상(亂想)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전주의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한복문화 진흥을 위해 만든 직원의 생활한복에 대한 왜색 의혹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지역의 전통예술가로서 의견을 토로(吐露)하고자 한다. 우선 한복과 개량한복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자. 한복이 무엇이며 한복이 개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패션에서 의미하는 한복의 정통성은 무엇일까? 자, 한번 허심탄회(虛心坦懷) 이야기해 보자. 한복은 우리 대한민국의 전통의상이다. 한복의 역사를 찾아보니 <한복은 한민족의 전통의상을 말한다. '한복'에 대하여 흔히 보통 ‘조선 후기’의 복식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히 말해서 한복은 특정 시기의 특정 복식이 아닌 '한민족의 전통의상' 그 자체를 가리킨다>란 글을 보았다. 그렇다. 한복은 시대를 불문하고 역사와 전통이 함께한 한민족 고유의상이다. 우리의 한복은 시대에 맞는 변화를 포용하며 전승됐다. 즉 정체성을 갖고 재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전통음악 또한 그렇다. 수백 년 전 전통음악을 그대로 계승하지만, 한편으론 현대에 맞는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기도 한다. 의상도 마찬가지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립국악원 창작악단과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연주복을 살펴보면 <옷감이 검은색인데, 보통 한복은 밝은 모노톤을 사용한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깃도 얇다 보니 일본 주방장 옷 같다>란 현 난상(亂想)의 내용처럼 검거나 어두운색이며 깃도 얇게 디자인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이견(異見)없이 국내외 연주 무대에서 활발히 연주복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생활복으로 만든 논란의 개량한복은 깃을 회색으로 연주복과 달리 어두운색을 사용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1시간 남짓의 연주회를 위한 옷이기보다는 하루의 모든 일과를 입고 지내야 하는 생활한복의 배려 때문 아닐까? 또 다른 담론을 이야기하자면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한쪽에만 있는 얇은 외깃은 논란의 화제에서 어떠한 정체성으로 이해해야 할까? 한쪽 얇은 외깃이라 하여 국적이 없는 옷이라 논해야 하는지? 그것은 바로 디자이너의 고뇌와 열정이 담긴 결과물이다. 또한 <근무복의 옷깃 문양을 우리 전통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란 이견도 있는데 경상북도립국악단에서는 벌써 10여 년 전 옷깃 문양에 사군자 중 하나를 넣어 창의 개량한복을 만들었고 독특한 연주복으로 도민에게 적극 다가선 사례도 있었다. 사군자는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소재가 아니다. 문양도 마찬가지다. 한국전통문화전당의 로고가 독창적이라면 세계에 다가서는 우리 전통한복의 매개체로 창의적 쇄신을 함께 할 수 있다. 단, 그 속에는 <대한민국의 얼>이라는 정체성이 들어가야 한다. 지역의 재단인 한국전통문화전당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하는 단체이다. 재단의 가치(Value)를 살펴보았더니 육성, 창의, 확산이었다. 육성이란 전통문화콘텐츠 활용을 통한 산업화요, 창의는 전통문화재창조를 통한 거점화, 확산은 한국 전통문화의 세계화였다. 거점화와 세계화에는 현재처럼 아픔도 있을 것이요 애환도 많을 것이다. 지역의 전통문화에 대한 도전과 패기는 대한민국의 문화 중심을 위한 과정이다. 잊지 말자. 지역 문화의 정체성은 대한민국을 이루는 문화의 근본이 된다.
지난주 언론에서는 전북도립국악원의 노후화된 교육시설 환경 개선 및 도민 편익증진 등을 위해 국악원 증·개축 공사를 다음 달인 3월에 착공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제 첫 삽을 뜬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게 다가왔다. 필자는 지난날 도립국악원의 학예교육실장을 지내면서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지금도 기억에 선명히 남는 것은 전북도립국악원 건물 앞에 세워졌던 국창 권삼득기적비(國唱 權三得紀績碑)로 잊을 수 없는 추억 속 사진 한 장과도 같다. 더욱이 국악원 건물은 지리학상 권삼득로란 곳에 있으니 전북도립국악원과 권삼득 명창과의 인연은 정말 특별하다 하겠다. 이에 추억의 사진을 더듬으며 권삼득 명창에 대한 일화를 잠시 꺼내어 본다. 권삼득은 영조 47년(1771년) 명문가 권래언(權來彦)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를 통해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태어난 음악적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권삼득은 명문 유가의 출신으로 천성이 영특하고 재주가 남달랐다. 그가 12세가 되던 해의 일화다. 서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하은담이란 소리꾼의 판소리 춘향전을 듣게 되는데 이때 권삼득은 많은 감명을 받고 명창으로서의 꿈을 갖게 되었다. 이후 전주신청에 있는 하은담을 찾아가 본인의 뜻을 밝히고 제자가 되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하은담은 “양반가의 도령인데 차별도 심하고 천한 광대라 부르는 것을 뭐 하려 하려는가?”란 말을 남기고 거절한다. 그러나 권삼득은 “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광대가 되려 결심했습니다. 저는 광대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심을 들은 하은담은 비로소 허락하고 소리 공부를 시작한다. 이후 권삼득은 일취월장했다. 타고난 성음이 있어 그 음색이 청아했고 성량 또한, 풍부했다. 그는 2년간 스승 하은담의 가르침을 받아 춘향가 한바탕을 이수하였다. 하은담은 권삼득이 음악적 재질이 뛰어나 자신의 대를 이을 것이라 믿으며 정성껏 가르쳤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권삼득의 아버지와 문중의 어른들은 크게 노(怒)하고 질색하여 가문의 수치라 말하며 끝내 뜻을 굽히지 않으면 권씨 문중의 명예와 체면 보존을 위해 권삼득을 죽이기로 결의한다. 권삼득은 억울하지만, 문중 결의에 승복하며 “죽기 전에 소리 한마디 부르고 죽겠습니다.”라 청했고 문중 사람들 앞에서 춘향가 중 <십장가>를 불렀다. 춘향이 매 맞는 참혹한 광경을 권삼득이 얼마나 슬프게 불렀던지 이를 들은 문중 사람들은 감동하여 죽이는 것이 아깝다고 말하고 그를 족보에서 제명하고 쫓아냈다고 전한다. 권삼득은 그 길로 운장산 위봉사에 들어가 절에서 머슴살이하며 수년간 각고 절차탁마(切磋琢磨) 끝에 득음(得音)하여 나라를 대표하는 국창으로 대성하기에 이른다.
박만순은 순조 30년인 1830년 전라북도 정읍시 정우면(당시에는 고부군 수금리)에서 출생하여 철종, 고종 2대에 걸쳐 천하를 울린 명창으로 가왕 송흥록의 기능을 이어받은 직계 제자이며 이른바 조선 후기 명창인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과 함께 여덟 명창으로 알려진 시대의 대명창이다. 박만순은 12세에 가왕 송흥록의 문하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스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소리의 실제적 기예와 표현 수법을 익혔다. 학습 당시 박만순은 소리에만 매진하여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고 노숙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한 고초를 겪으며 소리를 연마할 때 스승의 권유로 임실의 어느 산중에 들어가 소리 공부를 하였는데 이때 폭포 아래에서 피를 토하고 하늘을 꿰뚫을듯한 성음의 성량을 얻었다고 전한다. 그 후 박만순은 세상에 나와 전라감사의 부름을 받고 전라감영 선화당에서 춘향가 중 ‘옥중가’를 불렀고 이를 들은 청중은 그를 가왕 송흥록에 버금가는 ‘대명창’이라 칭했다. 당시 광경을 본 양반가의 이석정(李石亭)은 “때는 5~6월 여름을 앞둔 시기인데 선화당까지의 거리가 수마장인 내 집 사랑채에서 들어도 달밤에 외치는 박명창의 목소리가 집 앞 시냇가에 툭툭 떨어지는 듯했다.”라 평하며 소리판의 광경을 상세히 알렸다. 1마장이란 5리나 10리가 못 되는 단위로 수마장이면 적어도 10리(4km) 이상의 거리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참으로 엄청난 성음의 성량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일화이다. 어느 날 박명창은 이날치, 장자백, 정창업 등 세 사람과 함께 소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천하의 8명창 중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날치는 본래 줄타기의 명인이었지만 판소리로 전향한 사람으로 일찍이 박만순의 고수로 활동하다가 보성 강산리에 살던 박유전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배워 대성한 소리꾼이었고, 정창업은 그의 기예가 신에 접했다는 칭송을 받던 명창이었으며, 장자백은 소리면 소리, 인물이면 인물로 미남 명창이란 칭호를 받는 등 네 명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하던 명창들이었다. 그 당시 소리판의 광경을 실제로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박만순이 가장 월등한 절창이다. 성음은 양성이고 창조는 우조를 주장하며 그의 통성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듯했다.”라 논하며 최고의 소리로 박만순을 꼽았다. 박만순 명창은 키가 작은 몸매에 머리는 뒤통수의 뼈가 주먹만큼 밖으로 나와 생김새와 체구로는 볼품이 없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언어와 행동에는 기품이 넘쳐 여러 명창이 그의 앞에서는 함부로 소리를 논한 적 없다고 하니 그의 품격을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박만순은 1898년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특기로는 춘향가 중 ‘사랑가’, ‘옥중가’가 있으며 적벽가 중 ‘적벽대전’, ‘화용도’ 대목의 화려한 더늠은 후일 송만갑, 전도성, 정정렬 등 근대 명창들에게 전승되었다.
판소리 동초제는 동초 김연수 명창이 소리와 사설을 정리하여 오정숙에게 전승한 바디로 김연수의 호를 따서 붙여진 유파의 소리이다. 김연수는 전라남도 고흥 거금도 출신으로 세습무 집안인 김병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학문에 밝아 한학을 공부했으며 고흥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일반 학업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판소리에 뜻이 있어 몇 해 동안 축음기를 틀고 그 당시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 국창의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공부했고 그에 만족하지 못해 순천의 유성준 명창을 찾아가 깊은 소리를 공부하며 그의 끼를 발휘하기도 한다. 일화이지만 김연수는 스승에게 ‘소리의 가사가 틀리다’란 경솔한 말실수를 하게 되었고 자신의 실수로 스승을 잃은 김연수는 서울로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를 찾아가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 당대의 명창들에게 다시 깊은 소리의 공부를 하게 된다. 한문에 조예가 깊어 사설을 정리하여 성악연구회를 통해 춘향전, 심청전, 토끼전 등 창극 공연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작업을 계기로 훗날 초대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다. 동초제의 소리는 가사와 문학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설(辭說)이 정확하고 너름새(판소리의 동작)가 정교하며, 부침새(판소리의 장단)가 다양하다. 또한, 가사 전달이 확실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관객의 이해를 효율적으로 도우며 문학적 특징이 많다. 그러므로 전승할 때 발음과 사설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설과 너름새의 면밀하고 다채로움을 추구한다. 전라북도는 타 유파에 비해 특히 동초제의 명창이 많다. 그만큼 계승의 중요성을 인지한 유파의 장점을 알 수 있으며 지역에 계승자가 많이 상주하며 전승에 노력한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라 하겠다. 그러한 동초제의 명맥을 전라북도 전주에 상주하고 널리 알린 장본인은 바로 이날치의 증손녀 이일주 명창이다. 동초제의 소리를 오정숙 명창에게 배웠다. 현재 88세 고령이시지만 소리의 애정은 남달라 제자 소리에 지금도 추임새를 절묘하게 넣어주시는 어머니와 같으신 스승이다. 소리 욕심도 많으셔서 제자가 조금이라도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혀 생각지 못한 큰 꾸지람과 매를 드셨으니 이일주 명창에게 제자란 자신의 일부분이라 생각하신 듯하다. 그러한 가르침과 교훈이 있었기에 수많은 제자가 그녀의 곁에서 공부를 원했고 서울, 대구, 부산 등 다양한 지역의 소리꾼들이 이일주 동초제를 배우려 전주를 찾았다. 제자로는 전북무형문화재 보유자 성준숙, 송재영, 장문희 명창 그리고 대구시무형문화재 주운숙 명창 등 여러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있고 전라북도와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많은 소리꾼이 그 계보를 잇고 있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지하철은 세계적으로 여덟 번째로 긴 도시철도망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가 중국 상하이, 여섯 번째가 미국 뉴욕의 지하철이란 순위에서 보듯 여덟 번째의 대한민국 서울 지하철 또한 국토에 대비하여 넓은 교통편을 자랑하고 있으며 가장 많은 서울시민이 애용하고 있는 교통수단으로 세계적인 메트로시티로서의 자부심을 담고 있다. 지난 13일이었다. 서울교통공사는 16일부터 2월까지 순차적으로 지하철 1~8호선의 환승 안내방송 배경음악을 변경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우리 귀에 익은 “다 딴 따다 다다 따다 다 단 따다 닫, 단!”의 가야금 소리. 즉 ‘얼씨구야’라는 제목의 음악이 바뀐다는 것으로 궁금하고도 내심 기대가 되는 소식이었다. 국악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도 그리고 해외에서 온 외국인도 이제 지하철 환승음악 소리만 들으면 한국 전통음악이라는 반가운 화답을 나누던 우리 지하철. 이제 또 다른 신비로움으로 화려한 변화를 시도하려 한다.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환승 안내방송 배경음악은 2009년 3월 작곡가 김백찬의 ‘얼씨구야’란 곡으로 14년간 사용해 왔다. 이번에 변경되는 환승 안내방송 배경음악은 국립음악원이 무상으로 제공한 것인데 지난해 10월12일부터 2주간 공사 누리집을 통한 시민 선호도 조사를 거쳐 작곡가 박경훈의 ‘풍년’이 최종 선정되었다. 선정된 ‘풍년’은 경기도 토속민요 풍년가를 소재로 원곡의 주선율인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4박자 구조의 단순하면서도 흥겨운 곡조로 재해석된 국악 창작곡이다. ‘얼씨구야’에서 ‘풍년’이란 음악의 순환은 우리 민족의 흥과 희망을 담은 현실 삶의 변곡점이라 생각된다. 바쁘게 정신없이 달려가는 현대 사회의 구조 속에 하루 출·퇴근 시작과 끝을 알렸던 흥겨운 우리 민족의 선율. 그 짧은 1분여 남짓의 국악 선율이지만 우리네 희망은 그렇게 지하철 속에서 설레는 기쁨을 담고 또 다른 애환과 역경도 이겨냈다. 이제 아픈 시련은 털어버리고 흥겨운 풍년가 소리를 함께 부르며 우리의 맘을 넓은 대지와 하늘로 보내어 보자. 서울교통공사는 코로나19로 지친 고객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제공하고 변화하는 트렌드를 반영하고자 새로운 환승음악으로 변경한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의 무서운 전염병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힘찬 미래의 찬가가 될 수 있게 우리 귀와 마음도 희망찬 기대와 설렘으로 새로운 지하철 환승 음악 ‘풍년’을 맞이하자. 모든 사회가 풍년을 이뤄 부자가 되는 그날을 기약하며 우리 수도 서울의 지하철은 힘을 내어 달린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모흥갑 명창은 순조 2년(1802년) 전라북도 김제군 주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가창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났으며 성음이 월등하여 출중했고 12세에 입산하여 10년간 소리공부를 마치고 바로 대성한 명창이었다. 특히 모흥갑은 적벽가에 출중했는데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당대의 독보적이었다. 모흥갑이 10년 공부를 마치고 세상에 나오자 그의 명성은 빠르게 퍼졌다. 헌종 13년(1847년) 헌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한 것은 그의 나이 45세 때의 일로 조정 관리가 다 모인 자리인 어전에서 모흥갑은 적벽가 중 ‘적벽대전’을 불렀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흥갑의 완숙한 기량에 헌종 임금을 위시하여 삼정승 육판 이하 어전에 나열한 대신들은 지위와 체면을 잊어버리고 흥과 탄성을 자아내며 그의 소리에 열광하였다고 전한다. 헌종 또한, 탄복하여 출중한 기량을 가상히 여겨 모흥갑에게 종이품(宗二品) 동지(同知)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상민으로서는 왕 앞에 나설 수 없었으므로 비록 명예직 일지언정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까지 제수받은 것은 모흥갑 명창이 최초였다. 모흥갑은 각 양반가의 부름을 받고 소리를 하며 수천 금을 벌었다. 특히 평양감사의 부름을 받고 평양으로 내려갔던 모흥갑은 연광정에서 소리를 할 때 그의 통성이 10리 밖까지 들렸다 하니 그러한 명성과 소리의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모흥갑은 헌종의 윤허를 얻어 전북 김제 주산(현재 완주군 난전면 귀동. 지금의 구이 부근)으로 이사를 한다. 그 당시에는 모흥갑과 더불어 송흥록의 명성도 대단했는데 모흥갑은 송흥록의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자신과 더불어 송흥록의 실력을 비교하고 싶었던 모흥갑은 마침 전라감사 생일 연 때 감영에서 두 명창을 동시에 초청하는 일이 생겨 소리 경쟁을 펼치게 된다. 모흥갑은 적벽가를 불렀고 송흥록은 춘향가를 불렀다. 청중은 모두 두 명창의 소리에 감탄했으나 송흥록의 뛰어난 인물 치레, 격조 높은 창제, 그의 고매한 기예 등에 탄복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전한다. 이후 송흥록의 절륜한 소리에 모흥갑은 머리를 숙였고 그는 각 산청의 대방들을 소집하여 전주 신청에서 송흥록을 가왕(歌王)이라 칭하는 봉대식을 거행하게 된다. 훗날 수백 관중은 두 경합과 상관없이 모흥갑과 송흥록, 두 명창 모두를 뛰어난 국창이라 불렀으며 곧은 인격과 절세의 명창으로 현재까지 그들의 일화는 전해오고 있다.
새해가 밝았다. 계묘년 첫 주 전통예술계의 뜻깊은 소식을 전하니 그것은 지난 28일 강릉시가 추진한 '국립국악원 강원분원 건립 연구용역비' 예산 2억 원이 국회 본회의에 통과되어 올해 정부 예산이 되었다는 보도이다. 국립국악원은 1951년 부산 용두산에서 개원하여 현재 서울을 포함 전라북도에 두 곳, 전라남도 한 곳, 부산광역시 한 곳 등 네 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소속된 분원들은 지역의 문화 정체성을 담은 콘텐츠로 전승과 보급, 연구, 발굴에 매진하고 있으며, 지역의 다양한 거점을 확보하여 지역문화 균형발전을 이루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온전한 지역 전통문화의 균등한 거점을 두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강릉시는 이러한 지역문화 발전의 초석 마련을 위해 국립국악원 강릉분원 유치 목적을 두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립국악원 강릉분원의 설립은 수도권과 더불어 지역 균등의 국가발전 주춧돌이 될 수 있으며, 단기적으로는 지역경제 회복, 중장기적으로는 국가 균형발전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자생력을 만들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전통문화의 중심을 음악에 두고 예악 사상과 연결하여 인격 수양의 방편으로 삼았으며 민족의 심성과 정서를 그대로 투영하여 존재가치를 잇는 중요한 정책의 주체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중심에는 국가예술기관인 국립국악원이 있으며, 전통예술의 연구, 보급, 진흥 그리고 공연이라는 큰 역할과 기능을 두고 문화 국가발전 전략으로 매진하고 있다. 국립국악원은 그러한 국가발전 전략을 기반으로 분원을 설치하여 지역의 전통예술 진흥에 힘쓰고 있으며, 설립된 각 분원은 지역의 특화된 전통예술 기반을 바탕으로 많은 공연과 연구가 진행 중이다. 1992년 전라북도 남원을 근거로 처음으로 국립민속국악원이 개원되었으며 이후 2004년 전라남도 진도에 국립남도국악원, 2008년 부산광역시에 국립부산국악원이 개원되었다. 강릉시에서는 미래세대를 겨냥한 ‘미래 교육 콘텐츠’가 중심이 되는 미래형 국악원을 목표로 의지를 다지고 있다. 통일 한국 및 전 세계 한민족의 문화동행을 위한 ‘한민족예술종합자료관’ 운영, 국악의 현대화, 세계화를 위한 ‘국악 3.0시대의 플랫폼’ 운영 등 타 분원과의 차별화 전략으로 건립할 예정이다. 특히 분원 건립은 강릉단오제, 강릉농악 등 지역 국악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며 2026 ITS 세계총회 등 강릉시에서 유치하는 각종 국제행사에서 국악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등 지역 전통문화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현대의 전통공연예술은 각각의 특색을 지닌 지역성과 정체성이 존재하는 전통 콘텐츠에 의해 재창조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강원도 강릉시는 다양한 국가 문화예술 운영기관의 거점 지역으로, 또한 전통공연예술의 허브로 그 전통과 맥을 이어 나가고자 하는 시작점에 서 있다. 지역의 특수성은 한국 전통공연예술의 세계화에 있어서 중요한 요건이 되며, 고유한 우리 문화유산의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중요한 핵심이 될 것이다. #국립국악원 #강릉시 #강릉분원 #국가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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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판소리마당 '소리 판' 무대 연다
[한 컷 미술관] 김신교 개인전: 자연과 인간의 하모니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전북지부, 국가보훈부 승격 기념 콘서트 성료
전주기접놀이보존회, 손 모내기 체험 행사 펼쳐
갤러리 숨, '플랫폼 어게인' 일곱 번째 작가 고보연 '정희의 일기' 전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알도 레오폴드 '모래 군의 열두 달'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집 '모두가 첫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