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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제 만경초 - 곡창지대 만경평야에 자리…일제 수탈 저항운동 주도

△학교가 걸어온 길김제 만경초등학교(교장 이종민)는 1909년 사립만경보통국민학교로 개교했다.1911년 만경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인가됐고, 같은 해 제1회 졸업생 4명을 배출했다.이후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1936년 장흥공립간이학교를 새로 개설했고, 1941년 만경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1996년 일본제국주의 잔재 청산을 위한 정부 정책에 따라 만경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 밋돌(김제 만경 넓은 들)'이라고 불리는 김제 만경평야."(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소설 '아리랑'의 주무대이기도 한 만경평야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평야에서 수확한 작물은 당시 조선의 젖줄 역할을 톡톡히 했다.하지만 이 때문에 만경지역은 일제의 수탈의 손길이 가장 많이 미친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그만큼 일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도 거셌다.1919년 4월 4일 만경장날을 맞이해 당시 만경공립보통학교 교사 임창무는 34학년 학생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학생 100여명이 교사들의 인도 아래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의 여파로 만경공보는 1921년 단 한 명의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다수의 학생들이 일본경찰에 붙잡혔기 때문이다.이처럼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지역민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것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탱해온 만경초의 원동력이다.한편 올해 제102회 졸업식을 연 만경초를 거쳐간 학생은 현재까지 모두 1만1579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만경초는 김제지역 정관계 인사의 산실이다.김윤기(4회) 전 건설부장관은 일본 와세다대 이공학부 건축학과를 나온 뒤, 고등관기사로 조선철도국에서 17년간 근무하면서 철도건축 전반에 관한 계획과 설계의 책임을 맡았다.광복 뒤 운수부 기술서장, 교통부의 자재국장시설국장철도건설국장을 거쳐 국립항공대학장교통부 차관을 지냈으며, 625 뒤 철도복구와 산업선 건설에 크게 이바지했다. 1960년대에 교통부장관건설부장관, 그리고 정무담당경제담당으로 두 번 무임소장관을 지냈다.1966년 9월에는 과학기술분야의 학회와 협회를 망라해 발족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초대회장으로 선임됐다. 한양대에서 명예공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자유훈장금탑산업훈장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했다.장경순(22회) 전 국회부의장은 만경읍 화포리 출신으로 배재중학교, 일본 동양대학 척식과를 졸업했다.이후 학도병으로 차출됐고 상해에서 민족해방을 맞자, 광복군에 투신했다.귀국 후에는 잠시 교직에 몸담았고, 이후 군에 투신 625를 맞아 혁혁한 전공을 세워 장성 반열에 올랐다.이후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 쿠데타에 가담해 군사정부의 농림부장관을 지냈다. 민정 이양 후에는 공화당에 입당, 김제를 지역구로 제6대부터 10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년부터 1971년까지는 최장 기간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1980년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신군부가 들어서자 정계를 은퇴했다. 상훈은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3회), 화랑무공훈장(3회), 보국훈장통일장, 청조근정훈장, 독일대십자훈장, 바티간대훈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농업협동조합론' 등이 있다.김택하(34회) 전 국회의원은 남성고, 중앙대를 졸업한 후 제9대 총선 때 정읍김제지역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고려목재주식회사 대표이사, 대한제재협회 부회장, 한국핸드볼협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유불도 3교에 능통한 석학으로 꼽히는 탄허(13회) 스님은 당시 최고 선승 한암 스님과 3년간 학문에 대한 서신 문답 끝에 22세 때 그의 제자가 됐다.탄허는 스승의 법통을 계승했고, 이를 불교학 연구와 불교의 중흥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상원사의 대화재로 소실된 한암의 연구와 관련 자료도 복원했다. 화엄경의 완역인 '신화엄경합론'은 그의 여러 업적 중 가장 높이 평가된다.이와 함께 김용호(52회) 한민대 학과장, 원행(54회) 금산사 주지스님, 최연호(57회) 주 벤쿠버 총영사 등이 학교를 빛냈다.△도약을 위한 노력만경초는'효'사상을 중심에 둔 인성교육을 표방하고 있다.이에 인근 만경향교 및 학성강학와 함께 선비문화체험전통예절교육 등 다양한 인성함양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또한 효 실천 활동으로 사례발표대회와 글짓기대회, 실천기록장 작성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지난해에는 삼성꿈장학재단의 교육복지중점사업에 선정돼 '치유와 나눔'을 주제로 한 락밴드, 합창부, 미술 치료, 상담연극수업 등을 지원하고 있다.특히 합창단은 지평선아카데미 식전행사에 참여해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줬다.이와 함께 상대적으로 교육혜택이 적은 지역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맞춤형 지도를 통한 기초학력 신장 프로그램, 원어민 강사가 진행하는 영어수업을 연중 실시하고 있다.이 같은 활동에 힘입어 만경초는 2012년 JB교육과정우수학교로 선정돼 교육감상을 받았다.같은 해에는 제2기 혁신학교로 지정되면서, 지역 특색에 맞는 특성화프로그램 개발과 민주적인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이종민 교장은 "우리 학생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라며 "학생들의 재능을 발현시켜 미래 사회를 주도하고 선도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8.28 23:02

11. 줄포초 - 만석꾼 김경중 일가, 부안지역 최초 근대 교육기관 설립

△ 학교가 걸어온 길부안 줄포초등학교(교장 최성운)는 1909년 김기중, 김경중 형제 등 지방유지들이 설립한 사립영신학교를 모태로 한다.학교는 1911년 사립줄포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고, 1915년에는 줄포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1924년부터는 6년제로 운영됐으며, 1934년에는 부설 진서간이학교가 개교했다. 1938년 교육령개정에 따라 줄포동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줄포동공립국민학교로 개명했다.초대교장으로는 인촌 김성수의 친부인 김경중이 부임했다. 호남의 만석꾼 부자였던 김경중 일가는 부안지역 첫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의 설립을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했다.한 때 포구가 들어서, 만물이 모이고 흩어지는 집산지 역할을 톡톡히 했던 줄포지역은 경제적으로 큰 번영을 누리면서 학생수가 크게 늘었다.많을 때는 전교생이 20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 여파로 수당초등학교, 난신초등학교, 대동분교 등이 분리돼 설립됐다. 하지만 1960년대 중심지가 곰소항으로 이동하면서 지역경제 침체로 1990년대 들어 수당초, 대동분교, 난신초가 차례로 통폐합됐다.줄포초는 2009년 개교 100주년 행사를 열고, 본관 앞에 기념비를 세워 학교의 역사를 기렸다. 이 때부터 동문들은 매년 8월 15일 '동문의 날'행사를 통해 우의를 다지고 있다. 또한 이들의 후배사랑은 각별하기로 유명하다. 총동창회(회장 문찬기)는 매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재학생 10명에게 10~3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지난해 전주 홍지서림 양계영 대표는 부친인 양동호(36회) 씨의 남다른 모교사랑을 기리기 위해 도서 312권(300만원 상당)을 기증하기도 했다.청와대 관리관을 지낸 박천형(42회)도 매년 200만원의 장학금을 기탁하고 있다.한편 올해 97회 졸업식을 연 줄포초가 배출한 졸업생은 현재까지 모두 1만460명이다.△ 학교를 빛낸 인물줄포초는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했다.한국문학계의 거장 미당 서정주(13회)는 한 때 영화를 구가하다 쇠락의 길을 걸었던 줄포와 궤를 같이하는 일생을 보냈다.그는 10세 무렵 고창 질마재에서 줄포로 옮겨와,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인근 변산반도, 줄포만 갯벌, 내소사 등지에서 시적 영감을 길렀다.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문인의 길로 들어선 그는 같은 해 오장환, 김달진, 김동리 등 동료 문인들과 '시인부락'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참여했다.미당은 원죄의 몸부림인 첫 시집 '화사'를 시작으로 마지막 노마드적 상상력의 세계를 노래한 '떠돌이의 시'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변화를 통한 자기 세계의 심화와 확장을 이룩한 한국 현대 시문학계의 거성이다.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그의 시 언어는 민족어의 유려함과 표현력을 한껏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하지만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하고,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거나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발표하면서 대표적 친일문학인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대한민국 헌정사에 빛나는 신규식(7회) 34대 국회의원과 박용기(20회) 10대 국회의원은 지역발전에 공로가 컸다.신규식은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 때 전북 부안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한 뒤 자유당에 입당해 4대 때도 당선했다. 군농회, 도정업 등을 하다 무소속으로 3대 전북도의회에 입성한 박용기는 10대 국회(고창부안, 무소속)에 당선돼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줄포초 출신은 체육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송만덕(44회) 전 배구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1980년대부터 2000년초반까지 한양대 감독과 현대캐피탈 감독 등을 역임하며 남자배구의 최고 사령탑으로 활약했다.하종화, 윤종일 쌍두마차를 앞세워 1991년 대학팀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성인배구를 제패했으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 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지냈고 대한배구협회 강화위원장, 대학배구연맹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빠떼루 아저씨'로 유명한 김영준(45회) 경기대 교수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레슬링 경기 해설에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빠떼루 줘야함돠'를 외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이와 함께 국병렬(29회) 전 전북일보 편집위원, 신진하(31회) 전 진안김제군수, 최창진(34회) 전 한양대 교수, 백진기(43회) 전 전북일보 국장, 김양균(51회) 전북공무원교육원장, 이정구(60회) 변호사, 문정신(81회) 목포지청 검사 등이 학교를 빛냈다.이와 함께 한국바둑의 대부 조남철과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10세 무렵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길 때까지 줄포초를 다녔다.△ 도약을 위한 노력줄포초는 '배우는 즐거움과 가르치는 행복이 싹 트는 교육'을 표방하고 있다.융합적 사고력과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삼고, 연 4회 이상 프로젝트 기반 융합인재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과학과목을 기본으로 다른 교과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개발 적용하고 있다.역점사업인 예술과 인성을 아우른 '행복마음 싹 틔우기'교육 실천을 위한 기악합주 교실, 수요 동요교실, 한지 공예교실을 운영하고 있다.한지공예 실습을 위해 인근 폐교를 활용한 한지만들기 체험을 계획하고 있다.또한 글쓰기독서교육에도 힘써 지난해 각종 글짓기 대회에서 124명의 재학생이 크고 작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한 글쓰기 교실과 도서 100권 읽기 등이 이 같은 성과를 일궈낸 일등공신이다.최성운 교장은 "교사와 학생, 학부모 등 교육공동체가 함께 발전하는 행복한 학교를 만들겠다"며 "학생에게는 꿈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교사는 가르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8.14 23:02

10. 완주 고산초 - 완주지역 최초 교육기관…인재양성 요람 자리매김

△학교가 걸어온 길완주 고산초등학교(교장 고규영)는 완주지역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설립된 학교로, 도내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고산초는 1909년 순천군수를 지낸 김낙구가 고산향교 정안당에 사립봉양학교를 설립한 것이 시초가 됐으며, 1911년 공립학교로 전환한 이후 8명의 일본인 교장을 거쳐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5일 한국인 최초의 교장으로 김규동이 부임한 바 있다.이후 학급 규모가 커짐에 따라 삼기, 양화분교 등이 새로 설립됐다.전북지역 여러 학교들이 시대 변화에 따라 학교 건물을 옮겨갈 동안에도 고산초는 학교 문을 연 시점부터 현재까지 한 자리에 머무르며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자리매김했다.2009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서는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동문들이 하나로 결집했다. 당시 동문들은 모금 활동을 통해 장학재단 설립에 나서는 한편 도서 기증, 기자재 지원 등을 통해 학교와 지역사회 발전에 힘을 보탰다.이와 함께 100년사 발간,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 등을 열어 침체된 학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또한 고산초 출신 당시 구태근 교장, 지역주민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교사 개축이 이뤄지는 겹경사까지 맞이하기도 했다.8개의 교실과 과학실 및 미술실, 시청각실 등의 교육시설 및 급식시설을 갖춘 것이다.한편 올해 제101회 졸업식을 연 고산초를 거쳐간 학생은 모두 8964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고산초는 완주지역을 대표하는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지역사회 뿐 아니라 나아가 대한민국을 빛낸 인물들을 다수 배출했다.고산초 출신 첫 의사인 김석탁(9회)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학박사이다.그는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해왔다. 한때 가세가 기울었지만 서울에서 중앙산부인과 병원을 개업, 전국에서 손꼽히는 자산가가 됐다.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양재(15회)는 한국 의정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독립 이후 어수선했던 당시 정국을 수습하는데 공로가 컸다.이존화(19회) 전 국회의원(34대)은 일제강점기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야학을 설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이 때문에 일본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됐고, 이에 만주로 건너라 봉천학원 전문부 법과를 졸업한 후 그곳에서 출판업을 하면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다.그는 1940년대 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상 대립이 극심한 가운데 자유당 전북도 선전부장 등을 지내며 청년운동에 기여했다.이후 3, 4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된 후 자유당 중앙당 정책위원, 조직위원장, 국회 문교분과위원장 등을 두루 지내며 정치안정과 교육입국에 공헌했다. 고산초는 두 명의 전북도 교육국장(학무국장)을 비롯해 다수의 전현직 교장, 교수를 배출했다.최득엽(20회)손희장(28회) 교육국장은 열악한 지역 교육환경 개선 및 민족교육에 헌신한 인물로 지금까지도 명성이 자자하다.또한 김준기(37회) 전 원광대 교수, 조중빈(48회) 전 교장, 구태근(50회) 전 교장, 조중배(50회) 교장 등이 지역교육발전에 기여했다.인근 세심정, 향교, 고산천 등 고풍적이고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난 고산초 출신 중에는 심미적 감각이 탁월한 예술가가 많다.이존한(46회) 화백, 강정진(56회) 예원예술대 교수가 현재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강 교수는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제4회 미술인의 날 기념 대한민국 미술인 본상에서 정예작가상을 수상하기도 앴다.그는 한국미술협회 이사 및 미술교육원 운영위원장을 지내며 중등학교예술특성화 제고, 대학의 창의적 교육개발 등에 남다른 이념과 교육철학으로 기능 전수에 앞장서왔다. 또 서울미술협회 부이사장을 맡으며 작가로서도 열정적인 창작활동과 작품연구를 병행하고 있어 한국정예작가로서 모범적 사례를 보여 주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언론인으로는 구자상(58회) 한겨례신문 제작국장이 있다.△도약을 위한 노력2011년 부임한 현 고규영 교장은 학교 환경개선 사업에 매진했다.그는 취임 초부터 연중 꽃이 피는 학교를 지향했다. 이 꽃들은 교직원 뿐 아니라 아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사계절 내내 어여쁜 자태를 뽐내고 있다.이는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아이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지역주민들이 학교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있다.바른 인성과 참된 실력을 지닌 인재 양성을 교육목표 삼은 고산초는 다양한 특기적성 활동과 인성교육이 높은 평가를 받아 2012년 전북 초등학교 교육과정 우수학교로 선정돼 교육감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올해 초에는 전국 최우수 전원학교로 선정돼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이처럼 고산초는 작은 학교에서 큰 꿈을 키우는 전인교육을 통해 지역사회의 으뜸 자랑거리로 도약하고 있다.또한 완주군이 창조인재육성을 위해 실시하고 있는 다중지능계발 사업에도 참여, 학생들이 평소 접해보기 힘든 체험활동을 통해 진로탐색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이와 함께 올해부터 도내에서 유일하게 교육부요청 개정교육과정 정책연구학교 지정돼 2015년까지 '프로젝트형 인성교육 적용을 통한 농산촌 소규모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 방안'을 주제로 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이 기간 동안 고산초는 인성교육 중심의 교육과정을 편성해 작은 학교에 맞는 모델을 운영한다.고규영 교장은 "인성이 곧 실력이다.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학생들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교육과정에 접목하겠다"며 "100년 역사를 더욱 빛낼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8.07 23:02

9. 고창 무장초 -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무장지역 근대교육 이끌어

△학교가 걸어온 길고창 무장초등학교(교장 강성주)는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로 알려진 무장지역의 근대교육을 이끌었다.1909년 당시 양반계층이 설립한 사립무창학교가 그 출발점이다.1910년에는 외세 침탈과 봉건제의 혁파를 위해 설립된 인근 동명학교와 합쳐져 사립무장학교로 교명을 바꿨다.무장초 출신들은 외세배격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농민군의 후예 답게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산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김영완이용욱(2회) 지사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화정책을 펼쳤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민족을 분열도태시키려는 야욕이 자리했다.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하고, 창씨개명하도록 강요한 것이다.이 같은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교육에도 불구하고 당시 학생들과 교사들은 암암리에 우리말을 쓰고, 우리노래를 따라 부르며 머지않아 다가올 독립에 대비했다.특히 조선인 교사였던 이동준이승연은"머지않아 해방이 될 거다", "우리말을 잊지 않아야 해"등 은근히 독립을 암시하는 발언을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정기와 애국심을 심어줬다고 한다.이처럼 무장초는 민족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100년을 이어왔다. 특히 동문들의 끈끈한 정은 학교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으로 꼽힌다.무장초는 2009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각계각층에서 모인 수천여명의 동문들의 축복 속에 '100주년 기념탑'건립 및 '100년사'발간, 재단법인 장학회를 설립해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았다.장학회는 2010년부터 동문이 십시일반해 모은 7억여원 상당의 기금으로 입학생 전원 및 성적우수 졸업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한편 올해 제102회 졸업식을 연 무장초를 거쳐간 졸업생은 현재까지 모두 1만827명이다.△ 학교를 빛낸 인물무장초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했다.김영동(9회) 제헌 국회의원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초석을 다진 초대 국회에 출사해 독립 이후 혼란스러웠던 사회안정과 지역발전에 크게 공헌했다.1930년대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던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그는 민족상잔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치인이란 이유로 강제납북돼 그 뜻을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것.무장초는 옛부터 집성촌을 이뤘던 여양 진씨 일문에서 많은 인물을 냈다.현 정부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의 부친인 진기홍(17회) 전 광주체신청장은 우리나라 우정역사의 산증인이다.그는 40여 년 동안 오직 '우정사업의 역사 바로알기'에 집중하며 통신사업의 역사를 정립하는데 큰 족적을 남겼다.특히 2005년 제50회 정보통신의 날 기념식에서 자신이 65년 동안 모아온 근대 우정 관련 사료 177점을 기증하기도 했다.어린시절'신동'으로 불렸던 진의종(23회) 전 국무총리는 당시 전국 최고의 수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경성제국대학교(현 서울대) 출신이다.그는 1943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일본 북해도청 농무과장 등을 지냈다.이후 8911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제17대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다.진기홍 전 광주체신청장과 친형제지간인 진기풍(27회) 전 전북일보 사장은 지역의 대표 언론인으로 손꼽히고 있다.그는 1947년 전북일보의 전신인 '전라신보'에 입사한 후 편집국장, 주필을 거쳐 부사장과 사장을 지냈다.1979년 서해방송 부사장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난 그는 대한적십자 전북지사장, 백양상임고문, KBS시청자위원 등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일을 해왔다.특히 서슬 퍼런 군사정권시절 '박정희 대통령께 드리는 호남 푸대접 공개 서한'을 발표, '호남푸대접론'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다.그는 당시 지역차별정책으로 전북이 낙후되면서 점차 인구 감소현상이 나타나자 1977년 전북도민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창립한 '전북애향운동본부'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또한 가람 이병기 시비와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추념 탑, 법조 3성 동상, 무초 회양미술관 등을 건립, 후세에 사표로 전수했다.이 같은 공로가 인정돼 2004년에는 제4회 전북의 어른상 봉정자로 추대되기도 했다.더불어 김재훈(57회)박철준(58회) 변호사는 올해 대한민국 대표 로펌으로 선정된 법무법인 광장에서 특허, 형사전문 변호사로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무장초 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기업인 김영관(36회)과 진석주(38회) 전 총동창회장(전 교장)은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동문들의 결집을 통한 후배사랑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도약을 위한 노력무장초는 2004년 무장읍성 복원 계획에 따라 건물을 신축, 현재 자리로 옮겼다. 한 때 전교생이 2000여명에 이르렀던 학교는 대다수의 농촌학교와 마찬가지로 현재 학생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에 지역주민과 교직원들은 위기 속에서 희망의 빛을 구했던 전통을 발판삼아 지난해 혁신 씨앗학교, 올해 생활지도 시범학교 지정 등 도약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특히 교육공동체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씨앗학교 운영을 통해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학교 문화 만들기, 특색있는 교육과정 운영에 매진하고 있다.또한 인근 거점학교와의 교육과정 공유 등을 통해 공동발전을 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교내 성폭력학교폭력 예방 활동 및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강성주 교장은 "학생들이 바른 인성을 지닌 튼튼한 아이로 자라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전통이 빛나는 학교라는 긍지를 갖고 생활하는 아이들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7.31 23:02

8. 익산 함라초 - 만석꾼 임천 조씨 문중 설립, 사립창명학교 시초

△학교가 걸어온 길익산 함라지역은 예부터 인근 웅포, 용안지역과 더불어 농업과 물자교역이 융성했던 곳으로 만석꾼으로 유명했던 함라 삼부자가 터전을 잡고 살았다.이들 만석꾼 집안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인심 좋은 함열'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만석꾼 가운데 하나인 임천 조씨 일문이 1908년 설립한 사립창명학교가 함라초등학교(교장 이외자)의 시초다.자주독립정신 함양 및 민족교육 창달을 위해 설립된 학교는 지금까지도 이 지역의 자랑거리로 꼽힌다.특히 31운동에 투신한 혐의로 일본 경찰의 고문에 의해 한 쪽 눈을 잃었던 설립자 조용관은 이후에도 군산지역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내며 맹렬히 민족해방운동에 나섰다.이 같은 그의 모습은 행동하는 교육자로서의 표상으로 추앙 받고 있다.이러한 공로가 인정돼 2005년에는 건국포장이 추서됐다.학교 변천사를 보면 1909년 사립함열보통학교로, 1941년 함라공립국민학교로 개명됐고, 1982년에 병설유치원을 개원했다. 1996년에는 함라초등학교라는 지금의 교명으로 바뀌며, 면면이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한편 올해 102회 졸업식을 연 이 학교를 거쳐 간 학생은 모두 7278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전북지역에서 향학열이 높기로 손꼽히는 함라는 수많은 정관계, 학계 인사를 배출했다.이 중 대다수가 함라초 출신이다.고광만(5회) 전 문교부 장관이 그 첫 머리에 꼽힌다. 그는 전주고등보통학교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동안 해주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18년 간 근무했다.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학관과 충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충주공립중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독립 이후 미군정 아래에서 충청북도 학무국장에 취임했으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제1공화국 문교부 차관과 제3공화국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윤택중(14회) 전 문교부 장관은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주오대 법대를 졸업한 후 245대 민의원에 당선됐으며, 1961년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민족사 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헌정회 부회장을 거쳐 헌정회 원로자문위원, 민족통일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민족사바로찾기연구장을 맡기도 했다.그는 장관 재직 시절 실업교육, 교육자치제, 대여 장학금제도, 재일교포 교육 강화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정계에서는 김현기(26회) 전 국회의원이 눈에 띈다. 그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후 이리농업고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월간지 '인물계'를 창간하기도 했다. 1952년 민주당 창당 발기인이 되면서 정치가의 길을 걸었다. 1967년 비례대표로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뛰어난 정치역량을 발휘하며 지역구에서 착실히 기반을 닦아 8910대 국회의원을 연이어 지냈다.그는 재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국회 재무위원회나 본회의에서 경제 전반에 걸쳐 정부의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추궁하면서도 서민대중의 권익을 위한 대안을 시의적절하게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조남조(40회) 전 국회의원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중앙일보 정치부장을 지내며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이후 정치계에 투신, 111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전북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새만금위원회 민간위원장으로 위촉됐다.이와 함께 조용욱(5회) 전 동덕여대 총장, 이화영(20회) 전 이리시장, 조현영(26회) 전 동덕여대 대학원장, 조상진(36회) 명예공학박사, 정영태(36회) 전 전주예수병원 원장, 김복현(47회) 익산문화원장, 조인호(58회) 덕성여대 교수 등이 학교를 빛냈다.조용욱 전 총장은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각급 학교 교사를 거쳐 동덕여대 교수부학장, 이화여대 교수(대우)를 역임했다.60여 년 간의 교직생활 동안 그는 전통적인 여성의 부덕함양교육에 전념했다.저서로 '대학한문'이 있고, 논문으로는 '퇴율사상비교 연구', '양명학 연구', '한자한문교육의 내실적 방향'등이 있다. 조상진 박사는 전북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한석탄공사와 포스코에서 근무하며 우리나라 제철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퇴임 후 삼진기업, 삼영산업, (주)에스아이에스를 설립운영했다. 또한 사회공헌에도 힘써, 광양시에 지체장애자를 위한 '광산특수어린이집'을 세워, 운영후원회장을 맡아 봉사하는 등 진정한 기업가의 표상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비롯해 재경부장관, 노동부장관, 국세청장 표창을 등을 수차례 수상한 바 있다.△도약을 위한 노력함라초는 전통적으로 학부모의 교육열이 높은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특기적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특색중점사업으로는 △지역 전통문화체험 △예술교육강화 △독서논술교육 활성화 △영어 의사소통 능력 신장 △수학문제 해결능력 함양 등이 있다.특히 전교생 62명 중 다문화가정 자녀가 11명에 이르는 여건에 따라 전북도교육청의 2013년도'다꿈키움학교'로 지정운영 중이다. 이에 통합교육 등 다문화가정 학생과 일반학생이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다문화교육 프로그램을 개발, 적용하고 있다.또한 다문화가정 어머니가 수업에 참여하는 교육주간을 통해 어머니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이는 다문화학생에게는 자긍심과 배움,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며 일반학생은 다른 나라의 다양한 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게다가 학생 수 감소가 불러온 정상적 교육과정 운영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교육문화적으로 낙후된 금강변 지역에 대한 균등기회 제공을 위한 학교군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교육과정 정상운영, 수업의 질 향상, 불균형 해소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이외자 교장은 "학생들이 자랑스러운 선배의 얼을 본받아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국제경쟁시대 핵심 인재로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과정 및 특성화 프로그램 개발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7.24 23:02

7. 김제 치문초 - 민족사학 출범…항일운동으로 3번 학교 폐쇄 수난

△학교가 걸어온 길김제 치문초등학교(교장 강호현)는 1908년 설립된 사립 신명학당이 모태이다.설립자 치문 김장호는 일본의 대한제국 주권 침탈이 가속화하고 있는 당시'민족혼을 바탕으로 급변하는 시대에 주체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인재 양성'를 교육목표로 삼았다.이 같은 시대 정신은 이후 면면이 학생들에게 내려왔다.학교 설립 초기에는 같은 지역 김해 김씨 종중의 경제적 보조로 운영됐고, 설립자 김장호가 자신의 농지를 학교 재단에 편입시킨 후에는 매년 발생하는 소작료 수입으로 학교를 운영했다.특히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당국의 경제적 지원을 일체 받지 않고 학교를 운영하면서, 우리 문화전통을 지키는 데 일조했다.학교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 당시 일시 문을 닫기도 했다.이후 1919년 31운동에 학생들이 관여했다는 이유로 폐쇄조치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는 등 학교 역사는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길을 같이 했다.일제의 강압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43년에는 당시 한 5학년 학생이 일장기를 찢어 일제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고, 같은 해에는 만경강 제방 위 호남선 철도에서 고정용 못 50여 개를 뽑은 혐의로 서슬퍼런 헌병들과 고등계 형사들에게 담임교사를 비롯해 학생 30여 명이 구속되기도 했다.1944년에는 급기야 반일, 항일 사상교육으로 담당교사와 학교장이 해임되면서, 세 번째로 문을 닫기도 하는 등 시련의 연속이었다.다행히 광복과 함께 다시 학교는 문을 열었고, 1978년 설립자 후손들이 학교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 후 공립치문국민학교로 인가를 변경,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민족 자주성 회복 및 독립 실현이라는 시대 정신에 바탕을 둔 이러한 활동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설립자 김장호의 손자인 김병기는 광복 이후 신익희, 백범 김구 등과 교분을 쌓으며 학교 존속 및 미래와 우리 민족이 나아길 길에 대해 줄기차게 논의했다.이런 인연을 보여주는 각종 사진자료와 함께 1955년 교정에 세워진 신익희의 친필 휘호 비석이 이를 증명한다.한편 올해 100회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를 거쳐간 학생은 현재까지 모두 4533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치문초 출신은 학계교육계에 두루 포진했다.대표적 인물로는 김문식(20회) 전 서울대 명예교수가 꼽힌다.그는 한국 농업에 영향을 미친 100인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농업경제학의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채정묵(34회) 전 서울시교육위원회 의장은 서울시교육청 관리국장 등을 지내면서 교육환경 개선 및 교육의 질 제고에 힘써왔다.김신기(47회) 전 전북대 교수는 전북칼라특화사업단장을 재직 기간 '칼라꽃'대량 생산을 통한 농가소득 확대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칼라꽃'은 1970년대 익산 팔봉 화훼단지에서 처음으로 재배를 시작해 1990년께 수출을 시도했으나, 하자가 발생해 한동안 국내시장에만 한정적으로 공급됐다. 현재는 꽃 재배에 필요한 최적의 토양과 시설 환경 조건 등을 연구한 끝에 조직한 배양으로 우량 구근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돼 일본 수출길이 열렸다.이남택(52회) 고려대 교수는 육사 31기 출신으로 1989년 美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유전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육사에서 33년 간 생도교육에 헌신했다.재직 기간에는 교학과장, 평가실장, 화랑대연구소장 등 보직을 겸직해 학교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평가실장 재직 시에는 육사 입시전형에 최초로 인터넷원서 접수 방법을 도입, 응시인원의 파격적 증대 및 우수자원 획득에도 일조했다.또한 유전공학 및 화생방 방호 분야에서 다양한 학문연구에 힘써왔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서 한국 정부 대표로 활약했으며, BioDefense Forum 회장 및 화랑대연구소장 등을 지냈다.최주환(57회) 한국사회복지관협회장은 사회복지관 종사자 처우개선, 주민공동체 발전을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송대 겸임교수이기도 한 그의 주요저서로는 '사회복지사가 꼭 알아야할 35가지'가 있다.언론계에서는 유은걸(43회) 전 서울신문 연구위원, 채희묵(52회) 코리아타임즈 논설위원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도약을 위한 노력현재 전교생이 41명에 불과한 치문초는 '창의인성교육 강화'를 교육목표 삼고, 적극적으로 학생 유치 활동에 나서고 있다.구체적 실천목표로는 △학생주도 학교문화 조성 △다양한 체험활동 실시 △스포츠로 풀어가는 인성교육 △개성과 소질 계발하는 방과후프로그램 등이 있다. 독서의 생활화를 위한 도서실 기본시설 정비, 필독도서 선정 구입, 도서 수시 대출 시스템 등 제반 시스템을 완비했다.다양한 독서논술 행사도 실시하고 있다.독서표현대회, 독서 골든벨, 독서만화표어 제작 등이 그것.또한 이번 여름방학을 맞아 무료로 운영되는 여름방학 프로그램을 개설, 학생 및 학부모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프로그램은 원어민 영어교실, 온라인 독서프로그램, 과학미술교실, 승마체험 등으로 방학 동안 학생들의 특기적성 계발이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강호현 교장은 "비록 작은 학교이지만 도시학교 못지 않은 교육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며 "민족혼이 면면이 내려온 학교의 전통을 유지계승하는 동시에 지성과 감성, 꿈을 갖춘 참 인재를 육성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7.17 23:02

6. 남원 운봉초 - 106년 전 지리산 자락 객사에 설립한 사립만성학교

△학교가 걸어온 길예로부터 남원 운봉은 전쟁과 재난, 기근 등 3재가 없어 살기 좋은 고장을 말할 때 주로 인용하는 조선 십승지 중 4승지로 불린다. 여기에 해발 470~700m 고원의 드넓은 옥토가 만석꾼을 내고, 그들에게서 나온 서민적 풍류에 이웃 간 돈독한 정까지 더해졌다.최근에는 지리산 둘레길과 연계돼 관광객이 꾸준히 찾고 있는 명품 '힐링'의 고장으로 각광 받고 있다.이처럼 천혜의 자연환경과 넉넉한 인심을 자랑하는 지리산자락에 자리한 운봉초등학교(교장 김상원)의 모태는 1907년 지역 유지들이 객사 운성관 자리에 설립한 사립만성학교이다.일제강점기에 들어선 1911년 학제 개편에 따라 교명은 사립운봉보통학교로 바뀌었고, 학교 감시 및 식민지 교육 목적으로 일본인 교원이 처음 부임했다.민족문화 창달을 위해 설립된 학교는 이때부터 조선어 시간을 제외한 모든 수업은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1920년대 학제가 4학년제에서 6학년제로 바뀌면서, 학생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역사 및 문화교육을 억압하고, 말귀 알아듣는 신민을 양성하기 위한 기초적 교육에만 몰두했다.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점차 운봉에서 일어났다.문맹퇴치와 민중계몽, 민족교육을 기치로 운봉초 출신 정운태(15회), 정운경정현수(16회) 등 세 사람은 1920년대 말 야학회를 조직했다.이들은 20여명의 아이들에게 자주독립정신과 농촌경제 성장에 대해 가르쳤다.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식민교육은 끝을 맺었지만, 1950년 6.25를 치르면서 폭격으로 학교 건물이 모두 불에 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이후 교육 정상화와 베이비붐을 타고 취학아동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운봉지역에는 속속 학교가 들어섰다. 하지만 지속적인 이농현상으로 이때 들어선 4개 학교(운남, 운성, 운천, 고남)은 현재 모두 운봉초로 통합됐다.2001년 강당을 새로 건립했으며, 2002년에는 유치원 교실의 현대화 시설을 완비하는 등 교육환경개선에 주력했다.2005년에는 농어촌 현대화학교 교사 증개축에 따라 현재 모습으로 학교의 내외관을 갖췄다. 교정 안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는 학교가 흥망성쇠를 거치는 와중에도 굳건히 자리했고, 오늘날에는 학교를 상징하는 나무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한편 올해 101회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를 거쳐 간 학생은 모두 9594명이며, 현 전교생은 모두 145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운봉초는 인근 향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중요시했다.이 영향으로 교육계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학교로 명성이 자자하다.대표적 인물로 서정용(27회) 전 남원교육장을 꼽을 수 있다.그는 1981년 남원군교육청에서 시교육청으로 명칭이 변경된 이후 첫 교육장으로 부임, 고향의 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모교에 대한 애정도 깊어 자주 학교를 찾아 교직원, 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했다.배봉기(57회) 광주대 교수는 국내 아동문학계의 거두로 불린다. 그는 1981년 소년중앙 문학상과 1985년 계몽문학상에 동화, 국립극장 장막 공모에 희곡, 스포츠서울.영화진흥공사 공모에 시나리오, 문학사상 신인상에 장편소설로 등단했다.현재까지 동화, 동극, 희곡,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동안 펴낸 희곡집으로 '잔인한 계절', '우리 시대의 사랑'이 있고, 동극집으로 '말대꾸하면 안 돼요?'가 있으며, 청소년 소설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노래'가 있다.대산재단과 문예진흥원 창작 기금을 받았으며,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거창국제연극제 장막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 장막 공모에 당선했다.13.14회 서울연극제와 문화예술위원회 창작 지원 공연,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 공연 등 다수의 희곡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이와 함께 1965년 모교인 운봉초 교장을 지낸 박성옥(29회) 및 강일석 전 교장(51회), 최태규(51회) 전 교감 등이 학교를 빛냈다. 진안과 부안, 완주군수를 역임하고 전주 부시장으로 정년퇴임한 박준명(30회)은 42년 간 공직에 몸담아 온 행정 전문가이면서도 서예가로 꾸준히 활동했다. 전국신춘휘호대전과 전국서예대전에 초대되기도 한 준프로급 실력을 자랑한다. 또한 수필집'돌아보며 내다보며'로 '한국시'문학대상을 받았던 문인이기도 하다.2007년 운봉읍장으로 정년퇴임한 박진기(48회)는 현재 지역사회에 남아 강살리기남원시네트워크 대표, 국민환경연합본부 대표 등을 지내며 정기적으로 환경정화운동에 나서고 있다.법조계에서는 김점동(55회) 변호사가 눈에 띈다.김 변호사는 전주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서울지검 동부지청과 전주지검 전주지청 등에서 검사생활을 했다.그는 1994년부터 고법유치위원회를 발족해 수많은 탄원, 성명, 서명운동 등을 통해 2006년 기어이 광주고법 전주 유치를 이끌어내는 등 도민 사법서비스 향상을 위해 힘써왔다.현재는 (사)전북행정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로서 지방자치행정과 의정활동 견제하고, 관 위주의 행정문화를 개혁하는 시민참여 행정문화의 정착에 힘쓰고 있다.특히 항소법원 설치, 전주 탄소밸리 구축 사업부지 강제수용 성명, 사회복지 제도 개선, 기금운용본부 전북이전 등 전북발전을 위한 다양한 시민활동을 펼치고 있다.△도약을 위한 노력2012년 도교육청 '혁신학교'로 지정된 운봉초는 교육혁신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운영하고 있다.이는 농어촌학교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학생 수 급감, 교사 노후화 등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다.현재 전교생이 145명에 불과하지만, 특화작물 육성교육혁신으로 귀농귀촌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위안거리다.2009년 부임한 김상원 교장은 '참학력 신장을 위한 교육과정, 행복한 교육공동체'를 교육목표로 삼고 △신체두뇌 발달을 위한 아침놀이 활동 △시험 없는 학교 △종일 돌봄교실 △체계적 독서교육 △교사 자율성 신장 등 학교문화 바꾸기에 힘쓰고 있다.특히 민속놀이, 공놀이 등 협동심과 창의력이 필요한 운동을 매주 화~금요일 1교시 수업 전에 실시하고 있다.또한 교사들의 연구능력 신장을 위한 연수동아리 운영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김상원 교장은 "배움과 즐거움이 있는 수업혁신과 민주적 학교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에 힘쓰고 있다"며 "교육공동체가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7.10 23:02

5. 군산 중앙초 - 일제 저항정신 면면히…야구 명문학교로 '발돋움'

△학교가 걸어온 길1907년 문을 연 군산 중앙초등학교(교장 박동수)는 올해로 개교 106주년을 맞았다. 학교 개교 당시 공립 군산보통학교 인가(4년제)를 받은 학교는 1921년 수업 연한이 6년제로 바뀌었다.1938년 소화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이 바뀌고, 광복 이후 1946년 다시 중앙공립국민학교로 개명됐다.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을 격리해 교육하는 풍토에 중앙초는 조선인 학생들만이 다니는 학교로 인식됐다. 이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계승하는 순효과도 있었지만, 일본인 학생에 비해 여러면에서 차별을 받게 되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이에 중앙초 학생들은 인근 일본인 학교 학생들과 자주 충돌을 빚기도 했다고 전한다. 당시 인근 월명산 아래 신흥동부터 해망터널로 연결된 군산내항 매집지 일대가 모두 조계지였다. 당시 일본인은 이처럼 번듯한 평지에서 살았고, 조선인은 인근 산자락으로 내쫓겨 초라한 움집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았다.일제는 인근 내항을 통해 조선의 곡물 등을 수탈했다. 현재도 내항의 접안시설로 사용 중인 뜬다리는 당시 가설한 것으로 수탈의 상징과도 같은 유산이다.이 같은 일제의 억압적 통치에 반발, 독립을 쟁취하기 일해선 민중들의 자발적 항거인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학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직접 맞닥뜨렸다.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중앙초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나라잃은 설움을 표출했다.이 와중에 당시 학교 건물이 전소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다행히 광복을 기점으로 학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51년 가람 이병기 선생은 자신이 지은 노랫말을 통해 학교의 앞날을 축복하기도 했다.이후 학교는 전교생이 4000~5000여명에 이르렀고, 1963년 야구부를 창단하면서 지덕체를 아우르는 전인적 교육을 선도하는 명문 학교로 발돋움했다.2007년 개교 100주년 행사에서는 재학생과 학부모 등 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기념식 및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다.군산역 이전으로 학생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중앙초는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한편 학교는 올해 104회 졸업식을 열었으며, 현재까지 거쳐간 학생은 모두 3만1768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군산중앙초는 정치계 거목과 '역전의 명수'로 불리는 군산상고 야구부 출신을 다수 배출했다. 11살 어린나이에 3.1운동에 투신한 김판술(10회) 전 보건사회부 장관이 대표적 정치인이다.그는 일본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군산지역구로 출마해 정계에 입문해 5, 1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1961년 장면 내각에서 보사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격랑을 헤쳐온 우리 의정사의 산증이다.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 미군정의 농지개혁을 비판하고, 국민방위군 사건을 질타해 '대쪽'의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강현욱(43회) 전 전북지사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516대 국회의원, 환경부장관과 전북지사, 국무총리실 새만금위원회 공동위원장을 거쳐 현재 학교법인 조선대 이사장, 새만금 명예 자문관으로 활동하고 있다.그는 특히 새만금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세계 최장 방조제(33.9km) 준공, 새만금 종합개발계획(MP) 및 수질대책 수립, 투자유치 등 새만금사업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대내외적으로 신망이 두텁고, 국제감각이 뛰어난 그는 전북지사 시절 미국 LA에서 연 농수산물 특판행사에서 229만8000달러의 현장판매와 200만달러의 수출계약 실적을 올리기도 하는 등 세계 속에 전북의 위상을 확립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법조계에서는 신상규(54회) 전 광주고검장이 눈에 띈다.서울대 법학과를 졸업, 사법고시 21회를 통해 법조계에 입문한 그는 창원인천지검장, 광주고검장을 역임하고 현재 법무법인 동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에는 학교법인 동덕여학단 이사장으로 선출돼 교육계로까지 외연을 넓히고 있다.1963년 창단한 중앙초 야구부는 전국대회에서 3차례 우승을 차지한 야구 명문이다. 특히'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군산상고의 전성기를 일군 선수들 중 상당수가 중앙초 출신이다.대표적 인물로는 김성한(63회)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를 비롯해 신경현(80회한화), 정대현(83회롯데), 이대수(86회한화) 등 30여명이 프로와 대학에서 선수 및 지도자로 활약 중이다.김성한 코치는 중앙초 야구부 1세대로서 군산상고, 동국대를 거치면서 투수와 타자를 겸했다.그는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에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선수로 프로에 입문, 불같은 공격력으로 해태가 한국시리지를 7번이나 제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14년간 해태에서 뛰는 동안 그는 1338경기에 출장, 통산 타율 0.286, 781타점, 762득점, 207홈런을 기록했다. 1985, 1988년 패넌트레이스 최우수선수(MVP), 1992년 올스타게임 최우수선수, 골든글러브(6회), 홈런왕(3회), 타점왕(2회), 최다안타(2회) 등을 기록했다.2004년 기아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한 그는 현재 해태 시절 은사인 김응룡 한화 이글스 감독의 부름을 받고, 같은 팀에서 수석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정대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대표 투수이다.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이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결승전서 3-2로 앞선 9회말 1사 만루 위기서 등판, 병살타로 마무리하며 상대인 쿠바에 피눈물을 안긴 주인공으로 명성이 자자하다.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시작으로 WBC대회까지 국가대표만 14년째이다.군산교육의 산실로 꼽히는 중앙초는 수많은 교육자를 내기도 했다.중앙초 교장을 역임하기도 한 김영배(52회) 전 교장, 노용주(56회) 군산 산북초 교장 등이 있다.특히 현 박동수(58회) 교장은 2012년 모교로 부임, 제자이자 후배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도약을 위한 노력중앙초는 발명교육센터를 운영해 발명에 관심과 소질이 있는 인재를 키워나가고 있다.올해 도교육청 '아토피예방중심학교'로 지정되면서, 인성과 건강을 두루 갖춘 학생을 육성하는데도 힘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박동수 교장은 마지막 교직생활을 모교에서 마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감도 갖고 있다.한때 전교생이 4000명이 넘던 시절은 간데 없고 현재는 전교생이 177명에 불과한 현실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하지만 희망도 있다. 인근 옛 군산역 일대에 개발붐이 불고 있어서다.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새롭게 들어설 예정으로, 구도심 활성화를 위한 각종 사업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박동수 교장은 "학교 설립 초기에는 항일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한 중앙초는 전북을 대표하는 학교"라며 "학생들이 훌륭한 선배들처럼 국가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7.03 23:02

4. 정읍 고부초 -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옛 고부관아에 터잡아

△ 학교가 걸어온 길정읍 고부초등학교(교장 조명환)는 동학농민혁명 최초의 함성이 울려 퍼진 옛 고부관아에 자리잡고 있다.혁명을 촉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기거했던 관아가 혁명군에 의해 불탄 자리에 1906년 당시 고부군수 정용기가 자신이 출자하고 지역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고부초의 모태가 되는 사립광화학교를 설립했다. 교사는 처음 관아 순교청을 사용하다가 명륜당으로 이동 교육을 실시하고, 일어 교육을 위한 일본인 교사를 채용하기도 했다. 교장은 군수가 겸했다.1911년 학제 개편으로 공립고부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고,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 등 민족 수난기를 겪으면서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졸업식을 치렀다. 일제의 억압과 핍박 속에서도 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지역민들의 노력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빛을 보게 됐다. 획일적억압적 식민지 교육을 끝내고 개성 존중, 자유와 창의적 활동을 위한 학습을 시작한 것.하지만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학교도 존폐의 갈림길에 섰었다. 다행히 학교의 오랜 역사물이 소실될 것을 염려한 당시 은성갑 교장은 개교 이래 보존했던 '연구보존서류'전부를 땅에 매장하고, 관리하게 해 종전 후 학교 유지운영을 수월하게 했다.또한 당시 교실에 걸었던 태극기도 지역민의 기지로 잘 숨겨 다시 걸기도 했다.고부초는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연차적으로 완공된 본관 건물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대밭 앞 건물이 철거되고 새로이 2층 철근 건물이 들어섰다. 90년대 학교 통폐합 바람이 불면서 폐교된 인근 두승초 학생들이 고부초로 오게 됐고, 이후 통폐합 지원금으로 현대식 컴퓨터실, 방송실, 방과후교실을 신설했다. 2004년에는 교문 옆에 강당을 준공, 학생들의 체력 증진과 각종 행사에 활용했다. 2006년 개교 100주년 행사에서는 학교 역사를 담은 화보, 탄생 및 연대기, 총동창회 소개, 졸업생 회고록 등을 수록한 '고부초등학교 100년사'를 발간했다. 또한 학교 개교 당시 전경을 담은 기념우표를 제작하기도 했다.올해 103회 졸업식을 연 고부초를 거쳐한 학생은 현재까지 모두 8101명이다.△ 학교를 빛낸 인물고부향교 옆에 자리잡고 있는 학교는 지역 교육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했다. 이들은 현재까지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고부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혁명의 의의를 밝히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특히 이들은 고부초가 배출한 최고의 인물인 나용균(3회) 전 국회부의장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 나 부의장은 1919년 동경 유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에 참여,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데 일조했다.그는 28 독립선언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같은 해 상해로 망명,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됐다. 이후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한 그는 1921년 여운형김규식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는 등 국외에서 대한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광복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제헌의원보건사회부 장관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했으며,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받기도 했다.초대 총동장회장을 역임한 은희태(35회)는 지역을 대표하는 수필가시인이다. 한국농촌문학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정읍지부장 등을 지낸 그는 한맥문학상을 수상하며 지역 문화계의 거두로 자리잡았다. 특히 고부지역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는 지역에 '민족유물 전시관'을 열었다.조성용(40회)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대표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이사는 518민주화운동 및 동학농민혁명의 재조명에 앞장서고 있다. 용공조작인 '오송회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그는 2007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정리위원회'가 전형적 용공조작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2008년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명예를 회복했다. 그는 지역의 원로로서 전주 버스 파업 등 분쟁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등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신일균(43회) 박사는 전북대 의대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전주 신일균신경외과의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지역을 대표하는 의료계 인물로서 동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3대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옥인청(44회)은 한국전력공사 전북지사장을 지내며 전력산업을 이끌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고, 2005년부터는 정읍 소성의 특산물인 복분자 작목반 회장을 역임, 농가소득 증대에 헌신하고 있다.이와 함께 조성호(28회) 전 전북도 교육위원, 은종삼(45회) 수필가, 이민형(48회) 전 중소기업청 이사관, 은일상(50회) 공학박사, 기호직(56회) 부안 백산초 교장 등이 학교를 빛낸 인물이다.△ 도약을 위한 노력고부초는 1997년 도교육청 지정 '에너지 절약 시범학교'을 운영하면서 과학교육 활성화를 거점학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 전통은 현재까지 고부초 면면에 자리하고 있다.하지만 한계도 있다. 농촌학교의 숙명과도 같은 통폐합의 위기에 항상 직면해 있는 것.2011년 9월 1일자로 고부초에 부임한 조명환 교장은 새로운 비상을 꿈꾸고 있다. 그는 '사랑으로 꿈을 키워가는 교육'이란 기본 교육방향 아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는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매진하고 있다. 특히 재능과 사랑이 넘치는 어린이들을 기르기 위해 독서교육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교수학습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질 높은 교육프로그램을 제공, 학생 및 학부모의 만족도를 높여 가고 싶은 학교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이에 학교는 학생들이 아침시간 20분을 활용, 책읽기를 통해 글쓰기 능력과 사고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고 있다.또한 학생들이 책읽기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독서골든벨대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문화체험이 취약한 학생들을 위한 스키체험도 실시하고 있다.조명환 교장은 "학력과 자기주도 학습능력 신장을 위한 독서교육을 중점 실시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인성과 실력을 두루 갖출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6.26 23:02

3. 남원 용성초 - 유서 깊은 학교 터전… 민족의식·독립사상 고취

△학교가 걸어온 길예향 남원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인 용성초등학교(교장 한숙경)는 그 터전 또한 유서가 깊은 곳이다.학교는 용성관이 자리하던 곳으로 631년 통일신라 신문왕 11년에 창건돼 조선시대에는 객사로 활용됐다. 용성관은 수난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6.25때 폭격으로 전소되고 현재는 기단부 석축 70여m와 석계단 1기가 남아 학교 본관 건물계단으로 쓰이고 있다.현재 계단 1기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었고 1994년 석물 29기도 추가 지정됐다. 용성초는 1906년 6월 1일 설립된 남원공립보통학교가 모태이다.1941년 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으며, 해방 이후 도심 개발과 의무교육 실시계획에 따라 많은 학생들이 유입되면서 1981년 병설유치원을 새롭게 여는 등 학교는 그 세를 크게 불려갔다.1996년 일본제국주의강점기 잔재 청산을 위한 조치로 교명이 현재의 용성초등학교로 개명됐다.2006년 개교 100주년 행사를 맞아 용성초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었다.남원시립국악단의 공연, 동문 장기자랑 등을 열었고, 동문들의 원활한 교류와 모교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총동창회를 만드는 방안도 추진됐다. 동문들은 판소리의 고장이자 항일투쟁 의사를 다수 배출한 남원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학교 발전에 힘을 보태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실제로 1945년 5월 초 금지됐던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한 내용의 서적을 서로 교환하며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한 용성초 졸업생들은 이를 억압하는 일제 경찰에 맞서 끊임없이 항쟁했다.이 때문에 몇몇 동문이 투옥되는 사건이 5.13 투옥 사건이다.이처럼 근현대 시기, 국가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본 용성초 출신들은 각 지역별로 모임을 결성해 학교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어가기 위한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학교도 이에 발맞춰 항일투쟁 역사, 학교를 빛낸 인물 등을 수집전시하는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한편 올해 103회 졸업생을 배출한 용성초를 거쳐간 학생은 모두 2만3200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용성초는 예향 남원을 빛낸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했다.201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시상식에서 연극영화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극작가 노경식(41회)이 대표적 인물이다.그는 197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국립극단, 서울예술단, 극단 산울림 등지에서 올려진, '달집', '징비록', '흑하(黑河)', '천년의 바람', '반민특위(反民特委)' 등의 희곡작품을 쓴 주인공이다. 그의 주요저작물로는 총 7권의 '노경식 희곡집'과 역사소설인 '무학대사'와 '사명대사'등이 있다. 또한 한국연극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서울평양연극제 추진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까지 서울연극협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이소윤(66회) 전 전주시립교향악단 상임연주자(바이올린)는 현재 남원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그는 현재 청소년 오케스트라단을 결성, 활발한 연주 활동에 나서고 있다.'소녀명창'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오지윤 명창(72회)은 국내 최초로 판소리와 아리랑을 특화시켜 대중과 호흡하고 세계인과 소통하겠다는 의지로 '오케스트라 아리랑'을 창단하는 등 국악 관현악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그는 용성초 재학 시절 강도근 명창의 눈에 띄어 판소리에 입문, 국악신동 '남원애기'라는 천재적 애칭으로 당시 국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소녀명창. 1982년 KBS 전국학생 국악경연대회 성악부 최우수상을 시작으로, 제2회 동아국악콩쿠르 금상, 제1회 전주대사습판소리 학생대회 차상 등을 수상했다. 한양대를 졸업한 후 입산하여 오랫동안 진정한 소리의 진수를 찾기 위한 판소리 수련의 길을 걸어왔다.오 명창은 특히 동편소리와 서편소리를 조화롭게 엮어 만든 보성소리가 특기이다. 그의 보성소리 심청가는 웅장하면서도 유려한, 창자의 해석능력과 예술적 표현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극적이며 상하청이 분명한 소리로 유명하다.염경관 군(103회)은 오 명창의 뒤를 잇는 국악신동으로 불리고 있다.그는 어린이 판소리 부문 최고의 등용문인 전국어린이 판소리 왕중왕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면서 한국 국악계를 짊어질 차세대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용성초 출신은 정계에도 두루 포진했다.최중근 전 남원시장(42회)은 민선 4기 시정을 맡아 '문화관광 명품도시'육성을 청사진으로 내걸고 운봉 국악성지, 혼불 문학관, 백두대간 문화마을로 이어지는 남원 문화벨트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또한 유니버설 발레단 초청공연 등 지방도시에서 보기 힘든 고품격 문화체험 기회를 만드는 등 다양한 문화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지리산 청정문화를 바탕으로 우수한 유망기업 유치를 위한 농공단지와 산업단지 조성에도 힘 써왔다. 교육자 출신인 전북도의회 김정호 의원(51회)은 남원을 지역구로 둔 민선 5기 교육의원으로, 도교육청 견제감시 역할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특히 최근 구성된 '전북도교육청 인사 실태조사 특별위원회'에 참여, 도교육청의 전반적인 인사 실태를 점검하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도약을 위한 노력용성초는 전통의 바탕 위에, 새로운 교육의 모습을 더해, '인성과 실력'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다양한 특기적성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학교 인근이 점차 구도심화하면서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선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이에 학교는 인근 남원교육문화회관의 실내수영장에서 정기적으로 수영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수영교실은 3학년 체육 교육과정의 '수영'단원 시수를 12시간 늘려 25차시로 운영하고 있다.또한 올해부터는 교육부의 예산지원을 받아 앞으로 3년 동안 학생뮤지컬사업을 운영, 아이들이 꿈과 끼를 키우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소질을 계발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학교에는 3000만원의 운영비가 지원되며, 사업의 전담운영은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김종헌 교수를 비롯한 융합문화예술대학 교수들이 주축으로 구성된 '학생뮤지컬 사업단'이 맡아 선정 학교의 지도교사 연수, 운영매뉴얼 제작, 현장컨설팅, 전국페스티벌 개최 등을 총괄 지원한다.학교는 춘향전의 무대인 남원의 역사적 전통을 유지계승하기 위한 국악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전 학년 연 340시간을 배정, 전문 국악강사가 정기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한숙경 교장은 "남원을 대표하는 초등교육기관이라는 명성에 큰 책임감을 느낀다"며 "학교 전통을 유지계승할 수 있는 특성화 프로그램 개발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6.19 23:02

2. 군산 옥구초 - 1906년 사립진명학교 모태… 민족문화 계승 온 힘

△학교가 걸어온 길군산 옥구읍 영병산 기슭에 있는 옥구초등학교(교장 마석우)는 개교 10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의 자랑거리이다.1906년 당시 이교영 옥구 군수가 지방유지의 협조로 사립진명학교를 설립한 것이 그 모태가 됐다. 이후 1914년 옥구공립보통학교로 개명했으며, 1915년 3월 30여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이어 잠시 인근 지역으로 옮겼다가 1937년 현 위치로 교사를 신축 이전했다.서슬이 퍼랬던 일본제국주의 시기 학교에서는 한국말을 가르치거나 쓰는 것이 금지됐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우리말을 하다가 교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얻어맞는 일이 비일비재했다.하지만 학생들은 호남 항일 의병을 선도한 애국자들을 다수 배출한 옥구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민족전통문화를 지켜오는데 온 힘을 쏟았다.1945년 식민지시대가 종결되면서 학교는 어두운 그늘을 벗어나 새롭게 탄생했다.한국인인 김근배 교장이 부임하면서 교가를 우리말로 바꾸는 등 노력을 기울인 결과 지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또한 의무교육 실시계획에 따라 학생수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면서 학교도 활력을 되찾았다.6.25 전쟁을 거치면서 다소 쇄락했던 학교는 1967년 초등의무교육의 확대와 베이비붐의 여파에 교사를 분리했다.이때 탄생한 것이 수산분교이다.1996년 일제강점기 초등교육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분위기가 범국가적으로 확산되면서, 교명도 자연스럽게 현재의 초등학교로 변경됐다.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차례 교명이 바뀌었지만, 옥구를 대표하는 교육의 산실이란 명성은 변함없었다.특히 2006년 개교 100주년 행사에서는 사회각계각층으로 진출한 동문들이 모교를 위한 추억의 사진전을 마련하고, 기념우표도 제작했다.우표첩에는 19301940년대 학생들의 모습과 1960년대의 수업운동회신체검사 장면, 1970년대 졸업식 등 학교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사진들이 실렸다.특히 이날을 기념, 전호택 동창회장 등 동문들은 많은 도서와 물품을 기증했다. 전윤수 전 성원그룹 회장(46회)은 자비를 들여 체육관을 지어주기도 했다.옥구초는 올해 2월 98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때까지 옥구초를 거쳐간 학생은 모두 8112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옥구초는 사회 다방면에서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동문들은 정재계 및 학계에 두루 포진했다.한국의 경제개발을 주도한 고병우 전 건설부 장관(31회)은 고위 행정관료와 기업 회장을 모두 지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고 전 장관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 청와대 대통령 경제비서관, 재무부 재정차관보, 쌍용중공업 부사장, 쌍용투자증권 사장,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 제28대 건설부 장관 등을 지냈다. 또한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조직위원장, 동아건설 회장, 대한통운 대표이사회장, 한국경영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항일 투사의 아들이기도 하다. 옥구 출신으로 옥구, 임피지역의 유학자 등을 조직해 대한의군부에 참여한 고봉민 장군이 그의 아버지인 것.해마다 옥구를 찾아 동향의 임병찬 선생과 아버지 고봉민 장군을 기리는 충혼제를 지내고 있다.'디도스 특별검사'로 유명한 박태석 법무법인 월드 대표 변호사(55회)는 옥구 출신 대표 법조인이다.박 변호사는 2011년 10월 26일 재보궐 선거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 후보 홈페이지에 대한 사이버 테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에 내정되면서 그 이름을 크게 알렸다.1981년 23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13기로 수료한 그는 서울지검 부장검사와 춘천과 창원, 서울 동부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하면서 관세와 외사, 증권, 조세, 기업범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꼼꼼하고 치밀한 수사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법무부 법무과장과 관찰과장을 역임하는 등 법무행정 능력도 겸비했다.그는 2006년 변호사 개업을 한 후 2007년 '법무법인 월드'를 설립하며 변호사로 전향했다.옥구초 출신은 의료계에서도 빛을 보고 있다.차영옥 군산 차병원 원장(58회)과 박순영 박치과 원장(58회)이 그 주인공이다.차병원은 1995년 정형외과를 개원, 2003년 의원급에서 전문병원으로 거듭났다.특히 척추수술 및 인공관절수술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다.이와 함께 채항석 전 육군소장(25회), 문봉식 전 교장(28회), 전호춘 전북대 명예교수(29회), 전대식 전 전북대 대학원장(31회), 전호택 무역업(총동문회장), 김영실 법무사(45회), 최옥열 (주)동오프랜지 대표(60회), 최경열 송원철강(주) 대표(60회) 등이 자랑스러운 동문이다.△도약을 위한 노력학령아동이 줄고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하면서 옥구초도 그 직격탄을 맞고 있다.현재 전 학년 6학급에 전교생이 68명에 불과한 소규모 학교로 전락한 것이다.하지만 근대화시기, 일제강점기, 경제개발기를 거치면서 그때그때의 변화에 발 맞춘 적응력을 보인 옥구초는 이 같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고 있다.특히 마석우 교장을 필두로 한 전 교직원의 교육혁신 프로그램이 점차 그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2011년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 전북명품교육과정 우수학교 선정이 그 예이다.옥구초는 모든 아이들의 배울 권리를 보장하고 질 높은 교육을 보장하기 위해 '배움이 즐거운 교실수업 만들기'를 2013학년도 특색사업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라는 슬로건으로 배움이 있는 수업 디자인하기, 좋은 수업 삼삼구를 통한 교실수업 개선, 자발적인 일상 수업 공개, 수업의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한 교내 연수, 전문가 초청 수업 워크숍 개최 등 배움의 공동체 실현에 매진하고 있다.또한 영어특화교육을 위해 하루 1시간 동안 원어민 강사가 진행하는 영어회화 수업을 계획하고 있다.이와 함께 전북도교육청이 작은 학교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어울림학교에도 공모, 2014년부터 학생 유입을 위한 행재정적 지원을 받게 됐다. 어울림학교 사업은 작은 학교와 인근 과밀 학교의 통학구역을 하나로 묶어, 작은 학교로 학생들이 전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접한 미룡동 소재 과밀 학교의 학생들이 옥구초로 학적을 옮길 수 있게 될 전망이다.마석우 교장은 "어울림학교 지정으로 앞으로 학생 유치의 어려움이 다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며 "수업혁신 프로그램을 통해 모두가 만족하는 학교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6.12 23:02

1. 전주 완산초 - 日 침탈 가속 우려 민족교육 목적으로 개교

역사와 전통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이어오기 위한 노력은 물론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한 끊임없는 변화는 필수다. 학교는 이 같은 역사와 전통을 엿보기 쉬운 곳이다. '백년지대계(백년을 내다보는 큰 계획)'인 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에 본보는 매주 한 차례에 걸쳐 개교 100년이 넘은 도내 초중고등학교 모두 33곳의 역사, 학교를 빛낸 인물, 도약을 위한 노력 등을 짚어본다. 그 첫 순서로 올해 2월 100회 졸업생을 배출한 전주 완산초등학교(교장 권용진)를 소개한다.△학교가 걸어온 길전주지역의 유지였던 진사 유예근 선생은 일본제국주의 침탈이 가속화되는 것을 염려해 순수 민족의 정수 교육을 목적으로 1906년 12월 15일, 당시 전주읍 서정(현 서학동) 192-9번지에 사립함육학교(4년제 보통과)를 설립했다. 함육학교는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막을 내린 이듬해인 1911년 인근 3개 사립학교과 톰합해 전주사립육영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꿨다가 1913년 전주 제2공립보통학교로 편입됐다. 이후 1939년 현재의 완산동 167번지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완산동에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일본인이 이 학교에 입학하거나 전학 올 경우 죽음을 맞이하거나 집안이 망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조선 사람들만의 학교로 남았다. 간혹 일본학생들이 있다가도 조선학생들 등쌀에 오래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학생들이지만 조국을 강탈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다.1945년 해방 이후 학령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학교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50년대 전교생이 4000~5000명에 달하면서 교실이 부족해 운동장에서 천막을 치고 수업을 하는 것은 물론 그나마 교실에 들어가도 학생들은 따닥따닥 붙어 앉아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전주에 불기 시작한 신시가지 개발로 인근 지역이 구도심화되면서 입학생이 꾸준히 줄어 현재는 전교생 104명 뿐이다. 또한 전교생의 30%가량이 결손가정, 한부모가정 등 저소득층 무상급식 대상일 정도로 학생들의 가정환경도 좋지 않다. 이런 상황에도 학교의 역사는 유지돼 올해 2월 100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때까지 완산초를 거쳐간 학생은 모두 2만9013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민족 전통문화의 유지계승을 목표로 설립된 완산초는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동문들은 재계와 언론계에 두루 포진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서 해방 이후 반탁운동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소석 이철승 선생(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이사장)은 호남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다진 인물로 꼽힌다. 그는 전 신민당 대표로서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로 둔 한국 현재 정치의 주역 중 하나이다. 그는 학창시절 일제의 창씨개명은 물론 일본어 배우기를 끝까지 거부하며 민족의식을 지켰다고 전한다.△도약을 위한 노력구도심에 위치한 완산초는 현재 전교생이 104명 뿐이다. 전주지역에서 손에 꼽을 만한 '초미니' 학교인 것. 이에 학교와 지역사회는 학교살리기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시민단체와 인근 초등학교 동문들로 구성된 원도심교육공동체와 전주교육지원청의 지원을 받아 아름다운 학교 가꾸기 사업 등 다양한 학교살리기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권용진 완산초 교장은 몇 년전부터 학생들에게 꽃씨를 나눠주고 이를 교정에 심도록 했다. 이 꽃씨는 지역주민에게도 전해졌다. 권용진 교장은 "지역사회에서 사랑 받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6.0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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