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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순창 쌍치초 - 가족 같은 분위기 '왕따 없는 학교' 큰 자긍심

순창 쌍치초등학교 교사들은 쌍치라는 강한 어감에 종종 곤혹스러워했다. 고민 끝에 장두실 교장과 장원규 교감은 역발상의 묘책을 내놨다. 인성과 학력, 쌍(雙)이 하나되어 물결 치(置)는 학교라는 슬로건이다. 덕분에 다른 학교 교사들과 쌍치초를 소개할 때마다 웃음꽃이 피어난다.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학교 홍보 전략이다.△6남매 프로젝트 부각 1909년 건립된 쌍치초는 6남매 사랑의 한가족 프로젝트로 통한다. 전교생 42명 중 다문화가정 학생은 8명이나 된다. 학생수 급감으로 개교 105주년 위상은 주춤하지만, 가족 같은 학교 분위기에 대한 자긍심은 강하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프로젝트6남매 사랑의 한가족(이하 6남매)으로 인해 쌍치초엔 그 흔한 왕따가 없다. 6남매는 인성 교육의 희망이다. 6남매는 1~6학년 학생들이 학년별로 1명 이상씩 참여해 나라별 이름을 딴 조를 만들어 각 나라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조사하는 일로 시작됐다. 이후 학교의 모든 활동에 6남매가 적용됐다. 몽골팀(몽골의 법칙), 일본팀(가화만평아이시떼루), 우즈벡팀(한우사랑우진가쁘리엣), 인도팀(여섯숟가락) 등 6개 팀은 매주 수요일 3~4교시 창의체험을 묶은 블록타임을 활용해 텃밭 가꾸기, 다문화 요리축제, 김장 체험, 친구사과 데이 등을 소화한다. 우주베키스탄 팀인 한우사랑에 참여한 박세진 군(3년)은 6남매는 우리와 외국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라면서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음식인 볶음밥 쁠로프를 만드는 법 등을 배우는 게 즐거웠다고 말했다. 쌍치초의 학력 신장 대안은 돌봄교실의 내실화와 책 읽기로 요약된다. 주변에 학원이 없는 이곳은 어느 지역보다 공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오후 8시까지 이어지는 돌봄교실에서는 논술영어수학한자과학 등 과목별 수업과 가야금바이올린태권도하모니카 등 특기적성 수업이 뒤따른다. 2000년 초만 해도 쌍치초는 가야금 등 전통예술 수업을 앞세워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1998년부터 가야금병창과 사물놀이반 등을 운영해온 쌍치초가 각종 국악대회에서 두각을 보이면서 문화체육관광부와 (사)국악진흥회가 선정하는 전통예술 모범학교 2년 연속 선정됐던 것. 하지만 최근엔 학생수가 모자라 가야금반을 운영할 수 없게 됐다며 장두실 교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쌍치초는 독서의 활성화를 위해 어렵사리 학부모 독서클럽도 챙겼다. 독서교육글쓰기 지도법 등을 연수받은 학부모들은 매주 월요일 아침독서 시간에 책을 읽어주거나 서가를 정리해준다. 교사들이 세심하게 제작한 독서일기는 학부모들의 호응이 높다. 2012년 전북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 통과 여파로 전북에서 일기쓰기 검사가 사라지면서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는다며 볼멘 소리를 해왔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이에 쌍치초는 독후감과 일기를 접목시켜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총동문회 활성화가 관건예전부터 쌍치가 아주 골짜기였어요. 총동문회가 만들어진 게 3년 됐는데, 활동이 거의 없어요.양병원 쌍치초 총동문회장(23회)은 뒤이어 미안하다고 했다. 대신 양 회장은 1950년대 학창 시절의 한토막을 들려줬다. 그는 초교 4학년 때 625를 만났다. 시내로 피난갔죠. 수복되면서 쌍치로 와서 졸업했어요. 배고픈 때라 학교 보리밥 한 뭉치씩 주면 그거 먹는 재미로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쌍치초의 전성기는 1970년대다. 전교생이 600~700명에 육박했던 쌍치초의 쇠락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지만, 동문들은 내실있게 명맥을 잇는 일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어렵사리 수소문한 결과 쌍치초 동문들을 가까스로 찾을 수 있었다. 대왕기업 운수 대표로 있는 고석진씨(32회)와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육군본부 35사단장을 했던 안주섭씨(35회), 전북민예총 회장을 지냈던 신형식 전북대 교수(화학공학부45회), 양만섭 대진대 교수(영문학과45회), 쌍치초를 잠시 다닌 이학영 국회의원이 거의 전부다. 200여 명 남짓한 총동문회 활동은 이제 걸음마 단계. 동문회가 대개 60~70대 쌍치 토박이들로 구성 돼 젊은 동문들로 전반적인 쇄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양 회장은 젊은 친구들이 바통을 넘겨 받아 총동문회를 활성화시켰으면 한다면서 쌍치초의 숨겨진 역사를 누구나 아는 역사로 기록하는 일부터 솔선수범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끝>

  • 기획
  • 이화정
  • 2014.03.04 23:02

31. 정읍제일고 - 전국 3대 명문 농업고…'인재 양성 메카' 명성 되찾기 시동

정읍제일고 정대주 교장은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했다.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학교지만, 학생수가 부족한 게 현실이라서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중입니다. 정읍 지역의 특수성도 한 몫 했다. 인구 12만 명도 안되는 지역에 중등학교 11개가 몰려 있어 학생수 부족난이 가속화되고 있다. 올해 개교 104주년을 맞는 정읍제일고는 과거의 명운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장관만 3명 배출 전국 3대 명문 농업고로 꼽힌 정읍제일고는 동문들의 이름만으로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특히 정계관계재계교육계종교계까지 두루 아우르는 동문들의 활약은 명문고의 자긍심을 잇게 만든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정읍제일고 동문 중 역대 장관이 세 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고(故) 정준모 전 보사부장관(10회)은 일제 강점기 때 법조인경찰을 거친 뒤 3~4대 국회의원, 보사부장관을 역임했다. 공노명 아시아재단 이사장(38회)도 요직을 두루 거친 중량급 외교관이었다. 1983년 외무부 정무차관보 재직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의 협상 대표로 나섰고, 초대 모스크바 영사처장을 맡아 한국-소련 수교의 수훈갑이 됐다. 비록 1개월 남짓이었으나 허재영 국토정책연구원 이사장(40회)도 건설부장관을 지냈다.국회의원도지사시장을 거친 동문들도 차고 넘친다. 신석빈 전 국회의원(14회)은 정준모 전 장관보다 먼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전북도청 내무국장을 맡았으나 625 전쟁으로 납북된 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고(故) 송능운 전 국회의원(18회)도 일제 강점기 시절 정치가이자 기업가로 활동했다. 한 때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신태인읍주조장을 경영하면서 도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1950년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점을 찍었다. 전북교육감과 국회의원을 거친 고(故) 설인수씨(33회)는 부안군수, 국립도서관장을 거쳐 제3~4대 전북교육감을 역임했다. 순창임실남원 지역의 제10대 국회의원으로 출마, 전국 최다 득표로 국회에서 문공위 간사로 활동했을 만큼 식견과 경륜을 높게 평가받았다. 김원철(37회), 이형근(38회), 김계식(45회), 김연식 씨(47회) 등 교육장을 거친 동문들도 많다. 초대 민선지사인 김상술 전 도지사(29회)는 군산 화력발전소섬진강댐 등을 건설하는 등 지방자치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윤철상 전 국회의원(58회)과 국승록 전 정읍시장(38회)도 정계 동문 중 빠지지 않는다. 종교계는 송월주 스님(42회)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차례나 역임했으며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된 1980년대 말부터 시민운동에 참여해왔으며,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경실련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유종섭 전 (주)외환카드 대표이사 사장(43회)은 한국여신전문금융업협회 회장, 부영 대표이사 사장 등을 거친 CEO로 재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취업 역점 경쟁력 관건정읍제일고의 교명 변천사는 근대 최초의 실업교육학교의 그늘과 맞물린다. 공업이 우선시되면서 1988년 농고에서 농공고로 변경됐고, 2003년부터 농공고라 불렸던 실업계 고등학교 명칭이 사라지면서 지금의 정읍제일고가 됐다. 1990년대 초엔 농업 계열이 공업 계열보다 적어지는 역전 현상이 생겼고, 한때 재학생 1566명의 10학급에 달했던 학급수가 494명의 6학급으로 감축됐다. 뒤이어 3만여 평(9만9000㎡)이던 부지도 남북로 등 도로 개설과 학생복지회관 신축 등으로 줄어들면서 양분되며 부침을 겪었다.이 같은 현실에서 한식양식조리사 자격증 획득, 농업공업컴퓨터 기능사 자격증 취득, 골프 선수 육성 등을 통해 취업에 초점을 맞춘 교육과정 운영에 고심 중이다. KPGA 정회원으로 활동 중인 안정건 군(3년)을 비롯해 세미 골프 선수 4명은 골프 인재로 주목을 모은다. 정읍제일고의 최대 고민은 신입생의 확보다. 정대주 교장의 열성으로 올해 입학생 미달 사태는 면했다. 이에 대해 정 교장은 다른 지역의 경우 특성화고 진학 선호가 늘어나는 반면 전북은 학부모학생의 관심이 적다며 안타까워했다. 공단을 끼고 있는 수도권경북지역의 경우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대기업에 취업하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보는 반면 공단이 거의 없는 전북의 경우 대학 진학이 먼저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부가 특성화고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늘리면서 무상교육 등을 통해 경쟁력을 갖춘 정예부대로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반갑다. 정 교장은 다른 지역의 경우 특성화고 학생들이 전자전기, 디자인, 금융 등 각 분야에서 실력 있는 산업 역군으로 육성되고 있다면서 앞으로 일반고 학생들 보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특성화고에 진입하고, 기업에서 선호도가 점점 높아지면 특성화고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많이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 기획
  • 이화정
  • 2014.02.25 23:02

30. 익산 용안초 - 인근 학교들과 공동수업, 건강한 교육공동체 모델 '안착'

익산 용안초등학교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학교의 면적이 3만9600㎡라는 공원을 연상시키는 대규모 부지를 갖고 있는 반면 학생수는 고작 40여 명에 그친다. 이 상반된 얼굴을 가진 용안초가 올해로 개교 101주년을 맞았다. 21년 째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임용구씨(8628회)는 이전엔 모든 면민들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다고 추억했지만, 오지화 돼가는 농촌학교의 숙명을 감내하려는 학교동문들의 고심은 깊다.△작은학교 네트워크 두각 처음 학교에 왔을 때만 해도 황무지만 덩그러니 있다는 인상이었어요. 교장 선생님이 수업을 줄여주는 대신 막일을 참 많이 시켰습니다. (웃음) 이 정원은 그렇게 땀 흘리면서 일군 거죠. 내가 지은 집처럼 애착이 있습니다. 최정호 용안초 교장은 1990년대 이 학교의 기틀을 닦은 교사였었다. 학교 부지는 자그마치 3만9600㎡나 된다. 용안의 상징인 무학산을 배경으로 소나무 동산, 실습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등을 갖춘 교육 공원 같다. 최 교장은 용안은 금강을 끼고 편안하게 누워 있는 용의 모습이라면서 조선시대부터 각종 산물이 풍부하고 인심이 좋아 관리들도 울고 왔다가 웃고 갔다고들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드넓은 부지 만큼이나 학교 관리는 쉽지 않았다. 급감하는 학생수 앞에서 학교의 규모와 역사도 때론 무용지물로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나 최 교장의 학생수 확보를 위한 회심의 카드는 작은학교 네트워크를 활용한 학교군 사업이다. 용안초 인근에 있는 용북초, 용남초, 성북초와 연계한 공동수업 등이 그것이다. 학교별로 80분 공동수업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축구같은 스포츠는 머릿수가 안 맞았으나 공동수업 결과 호응도가 높았다는 최 교장은 체육대회도 네 학교가 합심해 치렀다. 고삼순 교감도 교사와 학생학부모지역민 등이 연 온가족한마음축제는 마치 1970~80년대 시골학교 운동회 같았다고 전했다. 이들 4개 학교는 현장학습, 영어캠프, 학습발표회, 학부모 기타교실 등을 통해 작지만 건강한 교육공동체의 모델로 안착 중이다. 이같은 내실있는 교육과정은 일부 전학생들의 발길을 향하게 만드는 추동력이 됐지만, 학생수 급감 해결은 현재진행형 과제다. △고 전철환 전 총재 등 배출20년 넘게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임용구 회장은 바통을 넘겨줄 후배가 없어 고민이라고 했다. 지난해 용안초 100주년 기념행사도 임 회장의 연륜으로 동문들을 규합해 치렀을 정도다. 100주년 기념행사 때 그는 용안초 동문들을 수소문해 역사 속 인물을 재조명하며 용안초의 자긍심을 독려했다. 황금재 동문(33회)은 한국전쟁 직전의 육탄 10용사 중 한 명이다. 1949년 개성 송악산에서 빼앗긴 고지를 되찾기 위해 폭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든 황금재 동문은 1950년 특무상사로 특진했다. 임용구 총동창회장은 윤택중 전 육군 소장(48회)과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한 유남규 전 소장(35회)도 빼놓을 수 없는 동문으로 꼽았다.고(故)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38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인 IMF 경제환란 극복을 위한 금융시스템 정립에 기여한 공로자다. 특히 정부 재정정책과 한은 통화정책 간 균형감각에서 IMF 외환위기를 잘 극복한 공로로 전 전 총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진보성향의 학자로 한국경제발전학회 회장과 금융통화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다.이진수 국립암센터 원장(49회)은 국내 항암제 개발을 위한 선봉장을 맡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MD앤더슨암센터에서 1992~2001년 흉부두경부 종양내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지난 2001년부터 국립암센터 폐암센터장, 부속병원장, 연구소장 등을 거친 인재다. 고(故) 임해정 전 군산대 총장(43회)은 교사 출신 총장으로, 그가 저술한 경제학원론을 비롯한 다수의 논문은 경제학 전공자에게는 필독서였다. 고인이 작고한 이후 부인 장인자 여사는 도서 500권 이상을 학교에 기증했다.유독 정계 인맥이 약한 용안초는 4선을 한 임종규 익산시의원(48회)이 유일하며, 법조계도 졸업연도가 불명확한 김영진 창원지검 검사장만이 손에 꼽힌다.

  • 기획
  • 이화정
  • 2014.02.11 23:02

29. 장수초 - 사계절 야생화 활짝 '공원 같은 혁신학교' 정착

해발 400m 이상 고원지대에 위치한 장수군은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항상 맑은 물이 흐른다는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을 타고 넘실대는 이곳은 예사로운 땅일 리 없다. 최근 이곳에서 건강한 부농의 가능성을 알아본 군민들이 귀촌하면서 한 때 학생수 급감에 고심하던 장수초등학교(교장 한창수)는 한 시름 덜었다. 교장교사들의 합심으로 2년 차에 접어든 혁신학교도 학생수 증가에 힘을 보태고 있다.△최근 3년간 학생수 증가장수초는 올해 개교 102주년을 맞았다. 장수서덕산초가 통폐합된 장수초는 시설로만 보면 전주지역 어느 학교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2006년 교육부의 학교모형정책학교 지정을 계기로 디지털도서관, 골프연습장, 다목적 운동장, 영어카페, 연못까지 갖췄다. 2009년 책 3000권과 함께 교내에 설치된 학교마을도서관은 방학에도 학교를 한산하지 않도록 만드는 문화사랑방이 됐다. 방학을 맞아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이곳 도서관을 애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프라에 귀촌 인구의 증가로 최근 3년 간 장수초 학생수는 증가세다. 한창수 교장은 당분간 학생수가 줄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혁신학교 여파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봤다.최근 장수초의 새로운 명물은 사계절 피고 지는 야생화다. 휴대폰 카메라로 키 낮은 야생화들에게 눈높이를 맞춰 하나 하나 소중한 모습들을 기록해온 한창수 교장은 봄엔 돌단풍매발톱, 여름엔 섬초롱벌개미취자주달개비하늘나리, 가을엔 곰꼬리풀백공작, 겨울엔 복수초 등을 술술 꿰며 가꿔 왔다. 한 교장은 사람이 겨울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겨울꽃눈을 잘라 보면 옷을 입고 있다. 봄꽃은 봄을 맞아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 전해 여름과 가을에 이미 꽃을 만들어놓고 겨울을 날 뿐이라고 귀띔했다. △분야별 졸업생 두각장수초를 빛내는 건 승승장구해온 졸업생 면면일 것이다. 장수초는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인맥을 자랑한다. 일단 정계 쪽으론 문화관광위원장을 역임했던 고(故) 최성석 전 국회의원(32회)을 필두로 유기홍 장수군의회 의장(46회), 박용근 전 도의원(61회), 장영수 도의원(66회) 등이 눈에 띈다. 2003년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렸던 멕시코 칸쿤에서 쌀 개방에 반대하며 할복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고(故) 이경해 전 도의원(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회장47회)도 이곳 출신이다.행정 쪽은 핵심 인물들이 더 촘촘하게 포진되어 있다. 이경옥 안전행정부 제2차관(59회)이 대표적이다. 또 엄봉이 전 장수군수(14회)와 최중엽 전 익산시청 부시장(25회), 빈영언 전 중소기업청 전북지방청장(49회), 전신기 전 공정거래위원회 국장(50회), 신용태 완주군청 부군수(52회) 등을 빼놓을 수 없다.군 쪽은 정경모 전 해군소장(27회), 이종호 전 육군대령(29회) 등이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이영석 전 전북도시가스 사장(40회), 최판옥 전 현대중공업 상무이사(47회), 김종구 전 삼성전기 부사장(49회), 이재현 롯데로지스틱스 대표이사(53회)가 재계의 리더로 활동했다. 또 서규석 전 한국문화방송 전무이사(29회), 고(故)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33회), 이규형 전 국기원 원장(47회), 전영천 전 유도연맹 국제심판(60회), 김종연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62회)이 문화예술체육계 인맥 지도를 완성한다. 특히 이규형 전 원장은 국가대표태권도시범단 단장, 국기원 태권도시범단 감독, 계명대 석좌교수로 활동했다.△교장교사학부모 합심 혁신학교 정착 장수초 혁신학교의 성공은 교장교사들이 한마음으로 뭉친 데 있다. 올해 전근 예정인 교사 4명이 잔류한 것도 혁신학교 안착에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업무 과중을 줄이기 위해 전시성 행사를 줄이는 대신 수업 혁신, 교원 역량 강화에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수석교사와 함께하는 과목별 수업공개는 학생들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수업의 집중도를 높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고 교사들은 전했다. 인성 강화 교육은 명상 수업 시도로도 이어졌다. 10분도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교사들도 학생들이 차분해지면서 집중력이 강화됐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장수초 혁신학교 정착에는 지역사회의 네트워크도 주효했다. 아버지 14명으로 구성된 모임이 진행한 1박2일 캠프(7월), 가족 문학 기행(10월)과 가족 학예발표회(11월) 등을 비롯해 지역의 박물관미술관 등과 연계한 체험 강화로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서로 성장하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기획
  • 이화정
  • 2014.02.04 23:02

28. 김제 금구초 - '융합 인재' 양성 중점, 공교육 활성화 모델 '안착'

김제 금구초등학교(교장 장충식)는 전주지역 초등학교 못지 않은 경쟁력을 갖췄다. 초등학교마저도 전주로 진학하길 원하는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학력 신장으로 이어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금구초는 최신식 시설을 바탕으로 특성화된 창의교육 등을 활성화하면서 공교육 활성화 모델로 안착 중이다. 전주에서 금구초로 역전학을 선택할 만큼 금구초의 자부심은 한껏 높아졌다. 총동문회는 물론 지역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장학회가 생겨나 학생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따뜻한 나눔의 모델을 잇는 것도 빛나는 전통이다.△장태수 선생 금구초 기틀 마련금구초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장태수 선생(1841~1910)이다. 장 선생은 조선시대 외교사절단으로 활동했을 만큼 촉망받는 인재였으나 1907년 고종황제의 순종 이후 김제 금구로 낙향했다. 인재 양성에 뜻을 품은 장 선생은 1907년 사재를 털어 신명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선생은 단식 20일 만에 요절했고,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명륜당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신명학교와 명륜당의 후학양성 의지는 1912년 금구공립보통학교의 개교로 이어졌다. 금구초는 농어촌 학생의 급감으로 쇠락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2005년 금구초와 금구중의 통합 운영으로 학력인성 신장에 주안점을 두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장충식 교장은 금구초가 전국의 과학경진대회에서 상을 휩쓸게 된 데에는 전북교육청의 발명교육 연구학교(2010~2012), 2012년 교육부의 창의경영학교 미래형과학교실 운영학교(2012~2015)에 힘입은 바 크다고 설명했다. 최근 금구초의 핵심 열쇳말은 융합인재교육(STEAMScience Technolo gy Engineering Art Mathematics)이다. 각각의 현상을 유기적으로 연결된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여러 사건을 조합해 해석하는 사고능력이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초교 12학년 교과과정에 통합교과를 신설한 것도 이 일환이다. 이애자 금구초 교감은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을 하나로 묶은 통합교과는 하나의 주제로 다방면의 교과목을 연계로 확장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금학완산장학회 등 나눔의 모델 활성화학교에 필요한 일 없습니까. 꼭 도와주고 싶어서요.지난 27일 전화를 받은 장충식 교장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다른 학교는 이런 장학금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른다는데요.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39회 졸업생 온영복씨는 고향에 있는 금구초에 곧잘 전화해 안부를 묻곤 한다. 학교 행사시설비 명목으로 100~500만원을 선뜻 내놓는 온정에 장 교장은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고 했다. 평생 구멍가게를 운영해온 김학보씨는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 뒷바라지 해주고 싶다며 1억원을 쾌척했다. 가난한 집안형편에 중학교 진학이 좌절된 것은 평생 한(恨)으로 남았다. 1978년부터 이어온 김씨의 통 큰 기부는 2002년 금학장학회 설립으로 체계화됐다. 박기남 신포우리만두 설립자도 장학금 기탁을 유언으로 남겼다. 김제가 고향인 박기남 설립자의 딸인 박혜란 신포우리만두 대표는 2012년 완산장학회를 설립, 매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2012년 금구초 총동문회가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거둬들인 성금 5000만원도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대물림되고 있다. 총동문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종준 전주병원장(48회)은 우리가 받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동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장성원 전 국회의원 등 동문 배출미온적이던 총동문회 활동은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결집됐다. 현재 김제시의원으로 활동하는 온주현 100년추진위원장(50회)을 주축으로 100주년 기념비, 100주년 기념관 건립, 금구초 100년사 발간까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동문들의 활약에 기인한 바가 크다. 먼저 2005년 금구초금구중 통합은 장성원 전 국회의원(39회)의 지원이 한 몫 했다. 학교 앞 도로가 뚫리면서 금구중 학생들의 안전이 위협받았던 데다 학생수가 줄게 되면서 금구초와의 통합을 추진했던 것. 장 의원은 당시 국회 예결위 위원장을 맡아 금구중 신축을 위한 예산 확보에 적극 협조했다. 또 김진기 부산성가병원장(39회)과 총동문회장인 김종준 전주병원장(48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호영남 의료계 인맥으로 꼽힌다. 금호미쓰이화학 대표로 지내는 온용현씨(53회)와 김병관 태광건설 회장(61회)은 성공한 선후배 CEO로 평가받는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최초로 보도해 유명세를 떨친 장두원 전 KBS전주방송총국장(40회)과 1986년부터 지난 25년간 국가 질량표준 확립유지를 위한 연구에 주력해 대통령 표창(2011)을 받은 정진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성과확산부장(60회)도 금구초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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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4.01.28 23:02

27. 익산 금마초 - '나'보다 '우리'…아이들 공동체 의식 키우기 주력

정만일 익산 금마초등학교 교장의 별칭은 문지기 선생님이다. 한파가 몰아닥치는 날에도 중무장을 한 뒤 교문 앞을 서성인다. 시무룩한 표정의 아이들은 없는지, 골이 잔뜩 난 학생들은 없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다. 정 교장은 그 상태로 수업에 들어가면 집중할 수 없지 않겠느냐면서 학생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200여 명 남짓하는 전교생들의 이름은 물론 가족사까지 꿸 수 있었던 것은 교사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자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와서 귤이라고 하나 주고 가면 그렇게 행복하고 재미가 날 수가 없어요. 그는 화창하게 웃었다.△나 아닌 우리가 되자내 철학은 딱 하나예요.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자는 것입니다.정 교장의 철학은 간명했다. 일본에서 13년 간 파견교사로 근무한 특이한 경력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절대 튀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초등교육과정은 나만 잘 살면 되는 사회가 아닌, 우리가 어울려 사는 사회를 위한 기본 소양을 갖추자는 것. 각 분야에서 학생들의 수상 소식 등을 세간에 알리는 대신 학교에서 소개하고 격려하는 데 그친 것도 교장의 확고한 철학 덕분이다. 체육에 일가견이 있었던 정 교장은 생활체육의 대중화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살면서 정부와 자치단체가 생활체육인 양성을 눈여겨봤다. 3년 전 정 교장이 학년별로 특화된 생활체육을 가르치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하지만 의욕만큼 성과는 따라주지 않았다. 성공 보다는 실패 사례가 더 많아요. 이번엔 멋쩍게 웃었다.유일한 성공 사례는 다문화 페스티벌이다. 전교생 200여 명 중 다문화 학생은 10명. 3년 째 학부모 등을 초청해 학생들에게 색다른 추억을 선물해왔다. 다국적 의상 입어보기, 전통음식 만들기 등을 통해 중국러시아필리핀미국 문화를 접해볼 수 있도록 한 것.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정 교장은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기, 실내화 신고 학교 밖에 나가기 등은 그러나 그의 미간을 유일하게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다. 이런 그를 보며 홍성훈 총동문회장(건양대 교수55회)은 정만일 교장은 인성교육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이런 철학에 적극 응원하고 싶다면서도 모교 사랑을 잊지 말고 졸업생들이 더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다목적 체육관 건립 눈앞총동문회를 귀찮게 하는 전화가 여러 번 오고간 끝에 금마초등학교를 오랫동안 재직했던 퇴직교사를 만날수 있었다. 1960년대 금마초에서 교편을 잡았던 소병도씨다. 증조부, 조부, 아들까지 4대가 금마초를 졸업한 뼛속까지 금마초 예찬론자다. 그는 금마초의 전신으로 사립학교인 익창학교와 기영학교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지금으로 말하면 행정중심도시였습니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심한 지역이었다는 말입니다. 익창학교는 양반들이 다니는 학교였고, 기영학교는 평민들이 다니는 학교였어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이후 일본인들이 두 학교를 없애고 익산공립학교로 세웠습니다. 이 역사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죠. 1950년대 소씨가 학교를 다니던 때만 해도 학년별로 세 학급씩 존재했다. 큰 아버지가 금마초 교장이었다는 소씨는 당시 보기 드물게 여자 농구팀을 육성해 소년체전까지 출전했지만, 전 농구선수인 박찬숙씨가 뛰던 숭의초에게 대패를 당했다고도 했다. 1911년 개교 당시 금마초는 금마시장 터에 위치했다. 625 전쟁 때 빨치산이 습격해 참사가 일어났던 데다, 도시개발이 이뤄지면서 금마로 이사오게 된 것. 홍성훈 회장의 부친 역시 금마초 교장을 지냈다. 부자지간 학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홍 회장은 변변한 체육관이 없었던 금마초의 숙원인 다목적체육관 건립을 성사시키며 새로운 역사를 쓰는 데 일조했다. △교육계학계 인맥 두각 총동문회의 활동은 최근에서야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과거 이름을 날린 동문들의 면면은 몇몇 동문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다. 총동문회 등을 통해 금마초를 빛낸 동문들은 다음과 같다. 금마초 동창들은 유독 학계에 많이 포진해 있다. 졸업 연도가 뚜렷하지 않은 지태순 선생은 자수성가해 모은 돈으로 1948년 익산중을 설립하고 1964년 익산초, 1966년 익산고를 차례로 세웠다. 사람이 재산이라는 그의 신념은 익성학원의 설립으로 이어져 아들손자 등 3대에 걸쳐 지역 인재 육성에 앞장서고 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국 독립의 주춧돌 역할을 해온 독립투사 김학곤홍순갑씨와 1980년대 청와대 안전처장까지 지낸 최윤수씨도 금마초를 거쳤다. 한국은 물론 세계 물리학계에서도 정평이 난 소광섭 서울대 명예교수(46회) 역시 금마초 출신이다. 소 교수는 2002년부터 한의학에서 침을 놓는 경혈과 경혈을 따라 흐르는 경맥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작업으로 남다른 이력을 추가하며 암 등 난치성 질환 치료를 임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연구해오고 있다. 의사 출신인 민주당 김용익 국회의원(53회)과 그의 형인 김용태 전 김안과병원장(45회), 이기수 경희대 치대 학장(45회) 등도 의료계 인맥이다. 유기태 도의회 교육위원(48회)을 비롯해 소금숙 한림대 수학과 교수(55회), 전북대 교수로 재직 중인 임기영 반도체과학기술학과 교수(54회), 최진규 지역건설공학과 교수(54회), 최원규 사회복지학과 교수(60회) 등은 물론 이기학 원광대 생명나노화학부 교수(55회) 등이 뒤따른다.새누리당의 의료영리화 방침에 대해 민주당 의료영리화저지특위 위원장을 맡은 김용익 의원은 최근 소신있는 발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이성원씨(43회)와 SBS로 활동한 이승주씨(57회), 장기간 총동창회장을 맡았던 강덕원(38회)송정규(43회) 전 익산시의원도 금마초 총동문회의 얼굴이다.

  • 기획
  • 이화정
  • 2014.01.21 23:02

26. 고창초 - 군 단위 학급수 전국 최다…'농촌학교의 희망' 우뚝

전북의 농촌학교는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한창 일할 젊은 세대들이 농촌을 떠나고 70~80대 노인들만 남았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농촌 위기의 중심에는 고령화에 따른 농촌 공동화가 자리잡고 있다. 고창초등학교(교장 유병회)는 이 위기의 중심에서 유일하게 비껴나 있다. 개교 101주년을 맞은 고창초는 46학급 1179명으로 전국 군 단위 초등학교 중 거의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유병회 교장은 김용택 시인의 촌아 울지마를 소개하면서 사람들이/다들 도시로/이사를 가니까/촌은 쓸쓸하다/그러면 촌은 운다/촌아 울지마라는 내용을 사람들이/다들 농촌으로/돌아오니까/촌은 외롭지 않다/그러면 촌은 행복하다/촌이 웃는다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고창초의 희망은 이 시에 응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 군 단위 최다 학급수 고창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유별나기로 소문났다. 이 일대 서당은 근대 초등교육을 이어주는 디딤돌 역할을 해왔다. 초대 김도의 훈장이 이끈 스무재서당은 고창은 물론 전남 영광까지 유명세를 떨쳤다. 전북문화재 29호로 지정된 도산서당(서뜸서당)은 고창초와 통폐합된 도산초 개교를 도와 일부 수업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고창초 졸업생들은 일본의 황국식민화 정책의 영향으로 우리말 사용 금지와 창씨개명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졸업생 오종문씨(36회)는 여섯 살에 처음 학교 갔을 때 일본어 이름을 쓰도록 해 친구 이름 외우기가 무척 힘들었다면서 일본 군가를 부르며 두 줄로 맞춰 등교했고,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신사 참배하는 건 특히 괴로웠다고 전했다. 학생수만 놓고 볼 때 고창초 전성기는 1960년대다. 1960년 전교생이 무려 2863명이나 됐다. 1960년 월산분교를 고창동국민학교로 분리시켰고, 1961년 고창남국민학교를 신설했던 것도 고창초 역할이 컸다. 졸업생 류택주씨(37회)는 1949년 화재로 교실이 무너지면서 돌과 흙을 나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유리창도 없는 교실에서 흙바닥에 헌 가마니를 깔고 교과서도 부족한 상황에서 몽당연필로 공부하던 생각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창초가 학생수 감축이란 농촌학교의 아픔을 아예 겪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80년 38개 학급에서 1994년 32개 학급으로 학생수가 급감한 반면 이후 2004년 51개 학급으로 정점을 찍었다. 귀촌귀향단지인 월곡택지가 구축되고 내고향 학교 보내기 운동이 확대되면서 학생수가 급증했다고 보는 분석도 있지만, 유병회 교장은 도시로 나와 아파트에서 살면서 출퇴근하며 농사짓는 게 보편화됐다면서 학부모들이 더 큰 학교로 보내고자 하는 열망이 반영된 것 아니겠느냐고 다르게 분석했다. △ 총동문회 없었어도 분야별 파워인맥 자랑2010년이 되어서야 총동문회가 결성된 고창초는 그럼에도 정계에서 파워인맥을 자랑해왔다. 조병채 총동문회 회장(37회)은 그런 시각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군계일학(群鷄一鶴) 아니겠느냐고 했다. 워낙 학생수가 많다 보니 지도자가 더 배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 실제로 정계 외에도 행정계교육계 등 두각을 보인 인재들이 배출 돼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설명이다.총동문회가 파악한 정계 졸업생은 무려 6명. 국회의원 뱃지를 단 유 진(2회), 홍순희(5회)에 이어 배상기 도의회 의장(18회)이 바통을 넘겨 받았다. 국회의원을 지냈던 임종인(54회)과 현역 국회의원인 홍영표(55회) 안규백(56회)도 고창초에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보이는 주역들이다. 전북교육감을 맡았던 염규윤(31회)을 필두로 전남대병원장을 지낸 장인원(26회)과 조선대 부총장을 했던 조병엽(34회)은 교육계 인사로 꼽힌다. 행정언론 쪽도 두터운 인맥을 자랑한다. 김경태 전 관세청장(36회), 조강환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39회), 정학수 전 농림부차관(52회), 졸업연도를 확인할 수 없는 진진영 전 조달청장은 두각을 보인 선후배다. 지난해 고창백년사 출간을 이끈 박우정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 집행위원장(44회)은 동기회 활동이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 선배의 자녀들이 학교의 행사를 위해 선뜻 기부하는 경우를 보면서 모교사랑, 동문사랑이 고향사랑이고 지역사랑임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 창의력 인성 교육 방점유 교장이 생각하는 창의력이란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힘이다. 다양한 체험을 통해 창의력이 발휘된다고 본 유 교장의 철학으로 학생들은 음악무용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을 휩쓰는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33회 전북교육감배 태권도대회에서 학년체급별 1~2위 등, 제16회 전북교육감배 수영대회에서 1위(100m) 등, 제6회 전북교육감기 에어로빅 체조대회 힙합단체 1위 등 분야별 수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고창초의 특별함은 전북에서 유일하게 자기수업분석실이 있다는 데 있다. 자기수업분석실이란 수업을 녹화해 관찰분석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그 결과 교사학생들과 수업을 개선하기 위한 의견을 교환하고 노력을 기울이는 분위기가 정착 되면서 수준높은 공교육을 제공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유 교장은 학교 오는 것이 즐겁고 다니고픈 학교가 되려면 질 높은 수업을 통해 배움과 성장이 일어나야 한다면서 학부모에게 참여와 소통의 길을 열어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서산대사의 싯구를 인용한 유 교장은 앞으로도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옳은 길을 향해 걸어가는 교육이 될 수 있도록 관심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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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4.01.07 23:02

25. 익산 여산초 - 문방사우 만들던 곳에 세운 배움터…일제 항거 현장도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돌아나오길 몇 번째. 비좁은 골목길로 올라갔더니 익산 여산초등학교(교장 오진탁)가 눈에 들어왔다. 면사무소 앞으로 새로운 문이 뚫렸지만, 과거 후문은 그 일대 학생들의 가장 가까운 출입구였다.올해로 개교 101주년. 현재는 전교생 120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가 됐지만, 자부심은 부침을 겪는 역사에도 스러지지 않는다. 여산초 안에 있는 익산 31 만세운동을 촉발시킨 헌병분견대 터, 가람 이병기 선생(1891~1968)이 작사하고 당대 유명세를 날렸던 이흥렬 선생(1909~1980)이 작곡한 여산초 교가는 과거 동문들과 현재 동문들을 잇는 온기있는 이야기다. △학문중시 전통 배경 여산초 설립여산초엔 의외의 드라마가 많다. 1906년 여산향교에 몸 담고 있던 김영진씨가 땅을 헌납해 설립한 것. 총동문회장 김장환 씨(48회)는 여산향교의 지리적 환경이 학교 설립까지 이어졌다고 전했다.여산초 뒷동네 마을엔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과거엔 닥채나무로 불림)가 참 많았어요. 임방울 명창이 불렀던 호남가를 들어보면, 여산 숯돌로 칼을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숯돌이 유명했죠. 종이벼루 등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만드는 곳이었으니, 당연히 배움을 중요시할 수 밖에 없었죠. 학교가 설립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산초 정문 주차장으로 쓰이는 헌병분견대 터에 설립한 여산독립만세기념비는 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물이다. 1919년 성난 민중들이 헌경분견대로 돌진하며 여산 독립만세를 외쳤던 사건을 기리기 위한 것. 학교 옆 여산동헌(전북유형문화재 제93호)도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다. 전북향토지에 따르면 동헌에 현감부사 250명이 근무했었다는 기록은 과거의 위용을 보여주는 사례다.여산이 과거 호남의 첫 고을이었다는 오진탁 교장의 단언을 빌리면 여산은 전북의 관문이면서 논산이 20㎞ 내에 있는 충남권이기도 하다. 지리적문화적으로나 여산초 인근 문화콘텐츠를 엮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발굴하자는 일각의 주장은 지금껏 9607명 졸업생(2월 기준)을 배출한 여산초가 단순히 쇠락해가는 학교로만은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학교를 빛낸 인물여산초 졸업생 중 군장성 출신이 유독 많은 것은 학교 옆에 있던 육군부사관학교 덕분으로 돌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1951년 육군하사관학교로 창설, 여산초의 흥망성쇠와 궤를 함께 해온 것. 그 기(氣)를 받아 이남신 전 합참의장(43회), 유해근 전 특전사령관(45회) 등이 배출됐다. 하지만 현재는 그 명맥을 잇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계 인사는 드물다. 익산시의회 의장을 지낸 임귀택씨(60회)가 거의 유일한 정계 인사. 재계에선 이연 전 동원탄자 회장(32회)이 통 큰 기부를 많이 해왔고,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대표이사 사장(60회)가 벤처기업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으며, 교육계 인사로 유인종 전 서울시교육감(31회)이 거론된다. 당시 명석한 법조계 인사로 기대를 모았으나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았던 송삼섭 전 일진그룹 고문(48회)은 지역에서 법률 자문을 해오며 의미있는 활약을 했다. △오고 싶어하는 학교, 즐거운 학교 만들자오진탁 교장은 소통(疏通)만 되면 다 잘 굴러간다고 했다. 학력 저하 우려 등을 하는 학부모가 여산초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 교장은 나눔과 배려의 교육현장을 더 중시했다. 한부모다문화가정 등이 적지 않은 여산초로서는 학생들에게 오고 싶어하는 학교, 즐거운 학교를 만들고, 학부모들에게는 가고 싶은 학교, 행복한 교육공동체를 실현하는 게 더 근본적인 목표. 버스 2대로 학생들을 실어나르며 서양화서예태권도바이올린 등 방과후수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당초 5~6학년으로 한정했던 진로지도를 4학년까지 확대하는 등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힘써오고 있다.오 교장이 올해 역점 추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6학년 제주도 수학여행이었다. 육해공 교통수단을 다 동원해 학생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선물했다. 그랬더니 1년 내내 들뜬 분위기가 이어져서 그게 고민이라고 오 교장은 웃으며 말했다. 제주도 수학여행이 뭐가 대수냐는 반응도 있겠으나, 문화적 소외지역에 속하는 이곳 아이들이 느꼈을 상대적 박탈감을 누그러뜨렸다는 게 교사들의 반응. 학교 안 가면 심심해서 못 살겠다는 학생들의 푸념을 듣고 싶은 게 이 학교의 고민이다.

  • 기획
  • 이화정
  • 2013.12.25 23:02

24. 순창초 - 수업혁신 다양한 실험…학생 중심 맞춤교육 명성

2008년 8월23일 순창초등학교의 100주년 기념행사. 전날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이튿날 비가 줄곧 내렸다. 황만섭 순창초 총동문회장은 순창초는 그 많고 많은 날 중에 꼭 행사만 가면 비가 왔다는 일설(一說)이 있다고 했다. 비로 인해 행사 개최에 제약이 많았고, 100년사 출간이 무산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명문순창초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개교 105년 명문 명맥 잇는다순창초등학교(교장 최필열)는 1908년 개교 당시 순화학교로 불리웠다.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313번지 주소가 이름의 연원을 짐작하게 한다. 105년 역사가 말해주듯 순창초는 이 일대 명문이었다. 옥천초등학교와 순창중앙초등학교의 분교는 과거 순창초의 아우라를 보여준다. 지난 2월 기준 졸업생은 1만1716명. 100년 이상된 상당수 학교가 그렇듯 학교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를 찾기란 어렵다. 학교 운동장 한 켠에 있는 독서하는 소녀의 하얀 조각상을 보면서 대강 학교의 연륜을 짐작할 뿐이다. 1945년 8월15일,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억하는 나무는 학교의 자랑거리다. 총동문회 부회장 서상기씨는 교정에 해방수가 있는 곳은 순창초가 유일할 것이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개교 100주년 행사 때 금산봉 정기받은 건아들아 영원하라는 문구를 세운 기념비는 오늘도 학생들에게 큰 꿈을 키우며 날로 변화해 가는 사람이라는 교훈을 새겨주고 있다. 최필열 교장은 순창초의 교육목표는 도덕인창조인자주인건강인 양성을 목표로 삼는다면서 자기주도적 학습력을 갖추고, 개성과 소질을 계발하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자신을 가꾸는 학생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 동문회는 주춤 동문은 두각순창초는 기수별 동문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동문회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총동문회가 반짝 활약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기대했지만,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동문들을 규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순창초 졸업생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쪽은 정계법조계. 남매로 활약하는 여동생 전선미 국회의원(67회)과 진봉헌 변호사(58회)가 대표적이다. 순창초로 전학 간 정동영 국회의원을 포함하면 강대희김병윤 전 도의원(59회), 양영수 전 군의회의장(59회)이 정계, 김영기 변호사(48회)가 법조계 인사로 분류된다. 졸업생 중 공직자는 의외로 많은 편. 김재중 익산국토관리청 국장(39회), 제태환 정읍소방서장(51회), 김 신 전주시 문화경제국장(56회)이 현직에서 활동 중이다.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황만섭 양평한솔요양병원 이사장(48회)을 비롯해 김춘동 군산CC 회장(41회)과 제성환 거성그룹 회장(49회)은 성공한 기업가로 꼽힌다. 대한민국 예술원이 매년 시상해온 대한민국 예술원상 올해 미술 부분 수상자로 선정된 서양화가 박남재 화백(32회)은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담아 순창을 추억하기도 했다. △ 수업 혁신을 넘어 학교 혁신으로순창초는 지난해 혁신학교로 지정됐다. 하지만 혁신학교로 지정되기 전부터 순창초는 수업 혁신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전북교육청의 독서정책 연구학교(2004)를 비롯해 영어연구학교(2007~2009)와 다문화연구학교(2010~2012) 지정이 그 것이다.학습자 중심의 맞춤형 교육과정에 초점을 맞춘 순창초는 80분 단위 블록수업, 학력 신장을 위한 디딤돌 학습 프로그램, 자기주도적 학습노트인 순창꿈 자람터 제작활용을 통해 수업을 혁신했다. 김지연 양(6년)은 혁신학교가 되면서 1블럭 수업이 끝난 뒤 30분 동안 예습과 복습을 하고도 충분히 쉴 시간이 남았다면서 자람터노트가 생겨 매일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꿈을 위해 오늘 노력한 일, 책을 읽은 간단한 독후감 등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전임 교장들의 선견지명으로 5년 넘게 영어교육을 강화해온 결과 매년 영어의 날을 지정해 영어로 말하고 즐기는 Fun Fun한 Funglih Party 개최 등이 이어지면서 영어를 쉽고 재밌게 배우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솔선수범해 책을 읽는 학부모독서토론동아리와 교사독서동아리 덕분에 학생들은 체계적인 독서 습관을 익히고 있다.

  • 기획
  • 이화정
  • 2013.12.18 23:02

23. 진안초 - 광복 뒤 여학생반 따로 수업 '시대 앞선 교육'

진안초등학교(교장 박병래)의 얼굴은 학생 오케스트라다. 박병래 교장은 부임한 뒤 진안초 하면 연상되는 게 뭘까를 고심했다. 소외지역에 가까운 진안초 학생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깨워주기 위해 창단된 학생오케스트라가 대안. 2012년 첫 발을 디딘 학생오케스트라는 벌써 진안의 축제는 물론 행사장에 초청되는 귀한 손님이 됐다.△ 여성 인재 앞장선 진안초개교 102주년을 맞는 진안초는 졸업생이 2~10명 안팎인 진안연장진안서진안남(반월)초교가 합쳐진 학교다. 가장 많은 학생들이 오가던 진안초는 1만 2128명(2월 기준)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현재 전교생이 330여 명에 그친다. 진안초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향토사학자 최규영씨(47회)가 팔소매를 걷어부친 끝에 올해 진안초등학교 100년사가 발간됐다. 100주년 기념 행사 때 맞춰 출간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자료 수집이 어려워 2년이 꼬박 걸린 셈이다. 100년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전 군민들이 모여들어 축제처럼 열린 운동회, 삼삼오오 달뜬 표정으로 떠나는 소풍길, 경범죄 처벌법 준수하여 명랑 사회 이룩하자는 팻말을 들고 나서는 질서유지 캠페인 등은 지금은 생경한 장면들이다.진안초는 일찌감치 여학생 반을 따로 만드는 등 시대를 앞서간 학교이기도 했다. 송남오 전 진안부군수(39회)는 광복 후 학업을 다시 시작한 학생들로 인해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다. 그 가운데 여자반이 따로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재명 진안문화원장(54회)도 여학생들은 그러나 여자라는 이유로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 억척스러움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대한 아줌마, 위풍당당한 어머니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 정계교육문화계 동문기반 탄탄진안초의 자랑스런 동문은 이옥동 전 국회의원(24회)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 전 의원은 일본 유학생 시절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 돼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등 시대정신을 보여준 지식인으로 4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스물일곱에 국회의원 뱃지를 단 전휴상씨(35회) 역시 3선 국회의원이라는 보기 드문 영광을 누렸으나 일찍 운명을 달리 해 아쉬움이 적지 않다. 둘 다 39회 동기로 진안부군수를 거친 송남오씨와 반상석씨(전 정읍부시장)도 진안초의 든든한 조력자다. 진안초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는 윤석정 국제해운 대표(39회)는 목포해운항만청장을 지낸 공직자이나 이운룡 전 중부대 교수(40회)와 함께 문화계 인사로 분류된다. 윤 대표는 이 전 교수와의 인연으로 지역 문화계에서 보기 힘들게 통 큰 메세나를 지원, 국제해운문학상을 제정해 귀감을 사고 있다. 도내 최초로 여성 교육장을 한 김정자 전 진안교육장(43회)의 배출은 여성 인재 배출에 앞장서온 진안초의 자랑이며, 육군사관학교 출신 정충열 육군 준장(59회) 역시 진안초의 또 다른 자부심이다. 모교 출신으로 진안초 교장을 지낸 김창현씨(46회), 진안초에서 교장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 성귀자(47회)씨도 교육계 인맥이다.△ 수업 혁신으로 힐링 프로젝트 진안초는 혁신학교가 아니다. 그럼에도 수업 혁신이 이뤄진다. 전북교육청이 지난해 진안초를 JB초등교육과정 우수학교 1위로 지정한 이유다. 교사들의 자발적인 수업 혁신은 이제 학생학부모교사 모두가 함박웃음을 짓게 만들고 있다. 다른 학교에서 1~2회에 그치는 공개수업을 5회까지 늘려가며 시작한 것은 교사가 아닌 학생 관찰. 부모의 이혼으로 짜증이 잦거나 학업에 산만한 학생들이 교사들의 노력으로 밝아지고 수업에 열의를 보이는 건 기분 좋은 변화다.학생 위주로 시작된 독서토론논술교육은 교사에게까지 확대됐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이로 인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부터 수업 혁신을 고민하는 일까지 공유하게 됐다. 오케스트라 불모지에 탄생된 진안초 학생오케스트라는 진안초의 명물이다. 20일 제2회 정기연주회를 앞둔 오케스트라 학생들은 매주 지휘자 이일규씨의 지휘로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박병래 교장은 학생들이 노력한 1년의 결실이라면서 진안에 싹을 띄운 오케스트라가 잎이 무성해져 지역에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 기획
  • 이화정
  • 2013.12.04 23:02

22. 김제 중앙초 - 의식있는 지주들 보루서 공원 같은 배움터로

김제중앙초등학교(교장 문홍근) 입구에 들어서면 왜 그린스쿨인가를 곧바로 알 수 있다. 편백나무 벽으로 건립된 건물과 소담한 숲길은 아토피 없는 아이들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건립한 연필 모양의 100주년 기념비는 과거 명문으로 꼽혔던 김제중앙초의 자부심을 대변하는 것이다.△ 지주의 자존심으로 건립된 김제중앙초1911년 설립된 김제중앙초는 올해로 개교 102주년을 맞았다. 최고의 곡창지대였던 김제는 일본이 가장 발빠르게 접수한 곳 중 하나. 일제강점기 문화통치 일환으로 세워진 김제중앙초는 그러나 의식있는 지주들이 지켜온 자존심의 마지막 보루였다. 조광수씨는 천석꾼이었던 증조부(조인행)가 김제중앙초 건축비로 1000원(75억 원)을 내놓았다. 건물의 앞 건물강당은 그렇게 설립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증조부의 유지(遺志)를 잇기 위한 공적비 건립을 추진했다가 무산된 사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전하면서도 김제중앙초를 향한 곡진한 애정은 유감없이 나타냈다.그럼에도 김제중앙초의 초창기 역사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심재만 총동문회 사무국장은 1960년대 교실이 모자라 강당에서 칸막이 수업을 받았는가 하면, 오전오후반으로 나뉘었다면서 그러나 교실은 언제나 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고 기억했다.문홍근 교장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지조와 강한 의지로 상징되는 소나무는 김제중앙초의 상징이라면서 학생들의 창의성과 인성이 함양되는 교육으로 교육가족이 만족하는 요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백영훈 KDI 원장 등 학교를 빛낸 동문 김제중앙초 총동문회의 결집력은 100주년 기념사업 때 빛을 발했다. 당초 100주년 기념사업 불가론이 나왔을 정도로 동문들은 회의적이었다. 학교 관련 자료는 물론 역사를 기억하는 동문들이 뿔뿔히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쇠락해가는 명운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빛낸 동문들은 김제중앙초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가장 전설적인 인물은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33회)일 것이다. 1960년대 정부의 대표단을 이끌고 서독의 경제부 노동국장을 만나 3000만 달러의 차관을 빌리는 조건으로 광부와 간호사를 서독에 파견하는 협상을 이끈 주인공. 그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비 유학생으로 서독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독일 박사 1호다.전 교육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유홍렬 덕암학원 이사장(40회)과 10년 넘게 총동문회장을 맡았던 김연준 전 전북법무협의회 회장(43회)은 김제중앙초를 대표하는 또다른 동문. 나우진 전 김제시의회 의장(39회), 조종곤 전 도의원(45회), 이광록 전 도의원(53회) 등 동문이 정계에 포진해 있으며, 김윤철 군산대 교수(57회)와 박종원 우리한방병원 원장(67회)은 학계와 의료계를 대표한다. 한 때 김제중앙초는 배드민턴 명문이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여자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정소영(68회) 덕분이다. 1980~90년대 세계여자 배드민턴계를 주름잡았던 그는 국제배드민턴연맹(IBF)의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 친환경 녹색학교 차별화김제중앙초는 2009년 그린스쿨로 지정됐다. 1년 공사 끝에 자연친화적 학교로 리모델링 된 김제중앙초 곳곳엔 나무와 생태형 연못을 조성해 공원에 버금가는 조경을 마련했다. 태양광 옥외 가로등을 설치해 지열을 이용한 에너지 설비를 갖췄으며, 아토피로 고생하는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편백나무와 친환경 페인트로 개보수했다. 송민영 교감은 학교 담을 없애는 대신 학교 숲을 조성했다. 그 결과 언제든지 주민들이 와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 됐다고 설명했다. 2010년 U-러닝 선도학교로 선정된 김제중앙초는 학생 1명 당 PC 1대를 사용할 만큼 자기주도적 학습을 위한 시설은 거의 빈틈이 없어 보인다. 배드민턴 선수 육성에서 최근 수영 선수 배출에 주력하고 있는 김제중앙초는 새로운 명문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 중이다. 문홍근 교장은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이고, 오늘은 선물이라면서 10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앙교육의 명성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온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 기획
  • 이화정
  • 2013.11.27 23:02

21. 부안초 - 관악부 '전국 명성'…창의·인성교육 선도

뭐니뭐니 해도 관악부는 우리 학교가 전국 최고입니다.고광태 부안초등학교 교장은 관악부를 가리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최근에야 정부가 한국형 엘 시스테마(El Sistema) 열풍을 선도해 문화소외계층 청소년들에게 음악교육을 하고 있지만, 30년 전만 하더라도 음악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삶에 희망과 꿈을 채워주겠다는 발상은 아주 앞서간 것이었다.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오케스트라 교육을 뜻한다.△ 두 번의 화마에도 역사는 계속된다부안초등학교의 역사 되짚기는 암중모색(暗中摸索)이었다. 1912년 개교와 1981년 부안초 병설유치원 개설 사이의 역사는 빈 칸에 가까웠다. 기록조차 찾기 어려운 두 번의 화마(火魔)로 인해 지난해 100주년 기념행사도 어렵사리 치렀을 만큼 학교자료가 거의 소실됐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전교생이 2500~3000명을 차지할 정도로 부안군에서는 제일 가는 역사와 규모를 자랑했으나 농어촌 학생수 급감을 피하지 못하면서 예전의 위용을 잃어버린 상태다. 지난 2월 기준 졸업생은 2만2471명. 현재 특수학급을 포함해 22학급이다.고광태 교장은 개교 100년의 역사적 발자취를 거울 삼아 창의인성교육을 선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관악부를 비롯해 축구부, 합창부, 씨름부가 전국대회에 참여해 우수한 성적을 거둬 학교와 지역사회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100주년 기점 동문회 시작지난해 100주년 행사 때 총동문회가 재조직됐다. 총동문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와해됐다고 할 만큼 활동 자체가 없었다. 학교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학생수가 워낙 많아 반창회 중심으로 모였다가 뒤늦게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동문들을 규합하려다 보니 연락망이 연결되지 않았던 것. 지난해 총동문회장을 맡게 된 노일천 전 부안교육문화회관 관장은 지난해 100주년 기념행사 때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졸업생 600여 명이 모였다면서도 다만 자료 소실로 인해 100주년 기념자료집을 내놓지 못한 게 안타깝다고 했다. 총동문회를 통해 파악된 역대 동문들도 40~50회 경계에 있는 졸업생들에 그쳤다. 그럼에도 정계법조계교육계에 진출한 이들은 꽤 많았다. 이 시기에 정계에 진출한 김종수 전 도의원(41회), 장석종 전 부안군의회 의장(48회), 장세환 전 국회의원(51회)이 눈길을 끈다. 장세환 전 의원과 오랜 지기인 노일천 전 관장은 장세환 전 의원은 부안초 5학년 재학 도중 전학을 갔으나 부안초 졸업생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고 했다. 법무법인 바른의 고문변호사로 활동 중인 박재윤 전 대법관(45회)과 조광제 전 국정원 국장(51회), 박희원 전 전북경찰청장(42회)이 법조계행정계의 파워 인맥이다. 교육계 진출은 꽤 많은 편이다. 6년 선후배인 임영식(42회) 송경식(48회)이 전 부안교육장을 비롯해 노일천 전 부안교육문화회관 관장(51회), 강귀자 부안동초 교장(50회), 서춘국 군산마룡초 교장 등이 진출해 있다. △ 전국 명문 관악부 두각이의문 부안초 교감의 말을 빌리자면 이곳 관악부는 대한민국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을 자랑한다. 대한민국 관악경연대회에서 종합대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휩쓴 학교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4~6학년 학생 62명으로 구성된 관악부는 플루트클라리넷트럼펫 등 다양한 관악기를 자유자재로 소화한다. 30년 째 관악부 터줏대감을 맡고 있는 최홍열씨는 아이들이 얼렁뚱땅하지 않고 열심히 따라주고, 학부형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준다.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고 웃으며 말했다. 고광태 교장도 관악부처럼 목표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바를 얻게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면서 이것은 비밀이고, 또 비법이라고 귀띔했다. 부안초는 창의인성교육연구학교(2011~2013)와 창의영어모델학교(2012~2014)를 운영 중이다. 2011년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 선정을 계기로 창의인성교육 연구학교로 지정 돼 자율봉사활동에 중점을 둔 창의적 체험에 주력하고 있다. 영어동아리방과후프로그램영어독서 활성화, 영어 페스티벌 개최 등도 창의영어모델학교 운영의 결과다. 부안초는 지난해 전국 학부모 참여교육 우수학교 지정으로 인해 올해 학부모 참여교육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저소득층 지원사업인 엄마품 온종일 돌봄교실, 교육복지사업 등도 내실을 기하고 있다는 평가다.

  • 기획
  • 이화정
  • 2013.11.20 23:02

20. 전주 기전여고·기전중 - 일제 신사참배 저항한 기독교 전통 학교

"지금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행복했다네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전주기전중(교장 황치형)여고(교장 원광연)에서는 학교 밖으로 떠나는 부적응 학생의 문제는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교무실에서 양치질을 해도, 교장실을 수시로 드나들어도 원광연 전주기전여고 교장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한 술 더 떠 스스로를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낮췄다. '권위'와 '격식' 대신 '배려'를 선택한 학교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에 둔 전인교육의 현장이다. △ 선교의 헌신, 기독 사학 명문전주 기전학교의 역사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와 포개진다. 베일에 싸인 역사는 선교사들이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려졌다. 기전학교의 첫 삽은 1900년 4월 24일로 간주한다. 미국 선교사 테이트(최마태)가 전주성 내 초가집에서 소녀 6명을 불러 가르쳤다는 편지가 뒤늦게 발견돼서다. 이후 선교사 출신 전킨(전 마리아) 랭킨(나은희) 교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1913년 1회 졸업생이 배출되는 역사적 순간과 열강의 침략으로 인한 굴욕적인 순간을 거치며 기전학교는 성장해왔다.1919년 학생들이 치마 속에 태극기를 숨기고 남문시장에 나가 31 운동을 하면서 13명이 옥고를 치렀고, 1930년 광주학생운동으로 만세운동을 하다 37명이 구속되는 아픔도 있었다. 일본의 강압적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를 선택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946년 해방과 복교를 거치면서 중학교고등학교가 분리되며 내실화에 힘썼다. 기전여중여고는 1956년 화산동 시대를 거쳐 2004년 효자동 시대를 맞았다. 남녀공학으로 새롭게 출발한 기전중은 기전여고와 함께 기독 사학 명문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창조적 여성 인재 요람최근에야 미래학자들이 21세기가 '여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성 교육에 큰 열을 올리지 않았던 과거엔 졸업장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그럼에도 기전여고 졸업생들은 '여학생'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꿈을 당당하게 펼치는 '신여성'이 꽤 많았다. 우리나라 초대 상공부 장관을 지냈으며 중앙대 설립자이기도 한 임영신(복교 전 4회)과 20세기 말 '90년대 최고의 책'이라는 평가를 받은 대하소설 '혼불'을 쓴 소설가 최명희(9회)는 기전여고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졸업생이다.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오영륜 성균관대 의대서울삼성병원 교수(27회), 전북대병원에 근무하는 방해미(30회)와 연세대 부교수인 천근아(31회)도 눈에 띈다.CBS전북방송 본부장을 지낸 뒤 C채널방송 대표이사를 맡은 허미숙(16회)을 비롯해 장혜윤 KBS 기자(32회), 박혜진 MBC 아나운서(40회), 조수진 동아일보 기자(33회), 박민희 한겨레신문 기자(33회)까지 언론계 진출도 눈부시다.전주지방법원전주지법 군산지원 부장판사로 있는 김양희(29회) 최유정(31회)과 전주지검 검사로 있는 고은별(40회)은 기전여고 선후배. 서울행정법원 판사인 손화정(45회)과 국제변호사 정노아(47회), 변호사 김수정(32회) 양지은(43회)까지 짱짱한 법조계 인맥을 자랑한다. 김수진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 종신교수(27회)와 세계보도사진전 심사위원울산국제사진페스티벌 전시기획자로 활동한 송수정(31회)은 기전여고, 지난 2009년 안타깝게 하늘로 간 배우 장진영은 기전중 졸업생이다. △ 학업인성 두 마리 토끼 '성공'기전여고와 기전중의 학부모 선호도가 높아진 것은 아무래도 월등한 입시 성적 때문이다. 일각에선 기전여고와 기전중이 효자동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이 대거 입학한 데서 비결을 찾지만, 교사들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반응이다. 평준화 이후부터 학교 성적이 꾸준히 올랐기 때문이다. 기전여고가 평준화 이후 지난 30년(1982~2012) 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울교대를 비롯해 전국 대학의 의예과치의예과 등에 진학한 학생은 1400여 명이나 된다. 전주의 중학교 중 성적이 가장 우수한 곳을 꼽으라면 기전중이 단연 앞선다. 하지만 기전여고기전중 교사들은 "특별한 비결은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신앙을 믿는 교사들의 열정과 성실함이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것.오히려 학교에서 독려하는 건 봉사동아리 활동 등이었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한국어영어일어중국어로 안내하는 소책자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해온 '기전전북사랑회', 전국고교합창대회의 금상지휘자상 수상 기념으로 받은 상금을 아픈 학우를 돕는 데 쓰는 '합창부', 영어 글쓰기에 능통해 책자까지 척척 만드는 '기전타임즈'까지 학생들의 적극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1999년부터 일본캐나다중국 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어온 기전여고는 매년 학생교사들이 오가는 문화교류도 꾸준히 한 결과 올해 미국캐나다 학생 2명이 기전여고에서 수학하는 등 글로벌 학교로 진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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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3.11.06 23:02

19. 전주생명과학고 - '농업 한류' 주도하는 젊은 영농인 양성 요람

'K-Pop'만 한류(韓流)가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의 농업기술도 전 세계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러한 농업 한류의 중심은 농업 인재들이 주도한다. 전북의 농업교육 선봉장에 있었던 전주생명과학고(교장 김진곤)는 농생명 산업의 특성화고다. 김진곤 교장은 "과거에는 아무 기술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 농사라고 했지만 이제는 공부하지 않고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면서 "졸업생 가운데 '억대' 농부들이 꽤 많다"고 했다.△ 농업 전문가 꾸준히 육성조선 말까지도 체계적인 농업교육기관이 없었다. 1906년 고종은 부강한 나라를 위해 농업의 근대화를 추진해 실업학교를 건립했다. 국내에선 8번 째로 공립전주농업학교가 1910년 개교했다. 36년 간 일본의 식민통치, 625 전쟁을 거치면서 공백기도 있었으나 전주공립중학교, 전주공립농림중학교, 전주농림고등학교 등으로 개편되면서 격변기를 겪었다. 졸업생 이만상 원광대 명예교수는 "1950년대 4.3 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겨우 입학이 가능했다"고 기억했다. 농업은 1960년대 중반까지 중요한 1차산업이었다. 덕분에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1964년 원예과와 식품가공과가, 1970년 농업의 기계화로 인해 농업기계과도 신설됐다. 농업 시장이 개방된 지 18년이 지난 현재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농민도 여전히 많지만, 개방 충격을 의연히 버텨내고 있는 건 전주생명과학고 등에서 농업인재들을 배출해온 덕분이라는 평가도 많다. △ 정계재계문화예술계 망라생명과학고 동문은 정계재계문화예술체육계까지 두루 망라한다. 박정근 전 도지사(2회)는 한국농업 개척의 선구자다. 도지사, 국회의원을 역임한 그는 (사)한국축산물수출산업회 회장을 맡으면서 수출 100억불 달성의 금자탑을 세웠다. 김용철 전 고려대 교수(22회)는 국내 육종학의 석학으로 농업 근대화는 물론 채소원예학종묘생산학 등 연구하면서 신품종 개발로 공적을 남겼다. 김동성 전 몬산토코리아주식회사 사장(36회)은 세계 최초로 수도용 제초제를 개발했으며, 파킨슨병에도 불구하고 잡초의 형태생리생태를 집약시킨 국내 최초의 '잡초도감'을 완간한 주인공이다. 정계 쪽으로 이존일 전 도지사(29회)와 최성식 전 국회의원(38회) 심 민 전 임실 부군수(53회), 재계 쪽은 최주호 동양고속건설회장(22회), 백승운 (주)하림 부사장(22회)가 있다. 언론계에선 소용호 전 전북일보 편집국장(49회)이 두드러진다. 셔틀콕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박주봉(69회)을 비롯해 기라성 같은 국가대표선수가 전주농고를 거쳐 한국 배드민턴의 본류(本流)를 형성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냈던 한성귀(54회) 권승택(62회) 등은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를 재패한 뒤 지도자로 명성을 날렸고, 올림픽에서 금메달 등을 안긴 김동문하태권(80회) 역시 전주생명과학고의 이름을 빛낸 배드민턴 선수들이다. 문화계 쪽에선 동양적 춤사위와 현대적 미학의 조화를 선보여온 안무가 국수호(전 중앙대 교수53회)를 비롯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풍물반을 만들고 학생들을 지도해온 정인삼 한국민속촌 농악단장, 이 바통을 넘겨받아 풍물반을 지도 중인 허영욱 전주농악전수관 단장이 뒤따른다. △ 산학연계 맞춤형 인력사업 등 두각전주생명과학고는 크게 생명자원과, 환경산업과, 식품과학과로 운영된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 골목을 점거하기 전까지 풍요를 누렸던 동네빵집의 영향으로 입학생이 몰리는 식품과학과는 물론 뜨는 산업으로 평가받는 골프업계 기능인을 배출하는 환경산업과, 조경기능사화훼장식기술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생명자원과 등이다. 특히 골프경영관리과는 전국 농업계 골프학과 중 최고급 시설을 갖춰 학생들의 선호도가 높고, 전국 최초로 애견훈련학교 교사를 임용해 수업을 진행하는 애완동물과는 안팎에서 관심이 높다.김진곤 교장 취임 이후 생명과학고는 좁은 취업문을 넓히기 위해 특성화고 명장육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젊은 영농 후계자와는 별개로 맞춤형 교육을 통한 인력을 양성하는 과정이 눈에 띈다. 지난해부터 중소기업청이 주관한 산학연계 맞춤형 인력양성사업에 선정된 생명과학고는 30여 명을 대상으로 유망한 중소기업과 연계해 강도 높은 직업훈련을 거치고 있다. 농업 기계화로 필요해진 특수용접기술 등을 5년 간 배운 뒤 자격증을 따면 병역특례를 해주는 '일석이조' 과정. 김진곤 교장은 "교육과정을 마치면 학생들 통장에 종잣돈 1억이 모일 수 있도록 재무설계까지 연계시켰으나 학부모들의 관심 부족과 고된 과정으로 참가자들이 크게 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면서도 "학생들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아 적극적으로 미래를 개척하도록 일조하겠다"고 덧붙였다.

  • 기획
  • 이화정
  • 2013.10.30 23:02

18. 정읍 태인초 - 일제 강점기 민족교육 선봉…이젠 디지털 선도학교

정읍 태인초등학교를 지키고 있는 개교 100주년 기념탑은 '영원한 등불'을 상징한다. 시대적 어둠을 밝혀주고 희망을 제시한 등댓불 역할을 해온 것. 이 학교 총동창회장을 지냈던 홍성대 상산고 이사장은 "'크게 어질다'는 뜻을 나타내는 태인(泰仁) 땅에 세워진 태인초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희망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선현들에 의해 문을 열었다"고 했다.△ 1911년 9월 개교일제강점기인 1911년 9월 25일 태인보통학교로 문을 연 태인초등은 그동안 졸업생 1만7000여 명을 배출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나라 잃은 설움으로 일장기를 걸어놓고 칠판에는 '총성'이나 '일장기' 등 한자를 써놓고 따라 읽던 치욕의 시대도 겪었다. 태인동화중(도래미산)에서 신사를 참배하던 학생들의 긴 줄을 떠올리던 동문들은 그 역사적 상흔을 축구로 달랬다. 1920년 조선체육회 창립을 계기로 시작된 축구는 일제강점기 질곡의 역사 속 숨통을 트여준 유일한 스포츠다. 강제 해산된 조선체육회의 재조직으로 태인초 축구부는 다시 기지개를 켜며 축구 인재 배출로 이어졌다. 태인초는 태인제일공립심상소학교, 태인중앙공립국민학교, 태인공립국민학교 등을 거쳐 보림오봉초등학교와 통폐합됐다. 태인초 최초의 한국인 교사인 정방모 선생은 학교 부지 일부를 기증해 식민지 통치 아래 민족혼을 일깨운 주인공이다. 지난 2011년 총동문회장이었던 홍성대 상산고 이사장 주축으로 100년 역사를 집대성한 '100주년 기념관'을 열고 영원한 등불을 주제로 한 '100주년 기념탑'을 세웠다. 동문들도 흩어져 있던 사진을 기증해 운동회소풍수업 풍광 등 학교 변천사를 정리했으며, 자긍심 넘치는 교육자 출신 졸업생들이 '태인초등학교 100년사' 편찬에 일조했다. 플라타너스나무 아래 야외학습하던 추억을 되새기던 동문들의 헌수로 새롭게 조성된 학교 숲에서 열린 100주년 동문대축제에서는 1600여 명의 동문들이 하나가 됐다.△ 자랑스러운 동문들태인초 동문들이 헌사를 아끼지 않는 인물 중 하나가 '수학의 정석'의 저자인 홍성대 상산고 이사장(37회)이다. 그는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에 팔소매를 걷어부친 주역일 만큼 모교에 관한 애정이 남달랐다. 홍 이사장은 "7남매가 모두 태인초 동문인 데다 조카들도 여기에서 배움을 닦았으니 우리 집안은 3대가 거쳤다"고 했다. 100주년을 기점으로 '송암장학회'를 통해 모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쾌척해오고 있는 송희용 전 송암내과 원장(23회)도 드러내지 않고 학교에 힘을 보태는 졸업생. 홍 이사장의 바통을 넘겨 받아 총동문회를 이끄는 김영구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장(42회)은 국회의원을 지냈고, 김경안 전 도의원(54회)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브라운관에서 자주 만났던 가수 송대관(44회)과 아나운서 출신인 성경환 TBS 교통방송 대표(54회)도 태인초 졸업생. 박순호 원광대 명예교수(42회)와 여형구 호원대 호텔관광학과 교수(56회)는 학계에서 자리를 잡았다.전북 축구의 역사는 태인초 축구부와 일정 부분 궤와 함께 한다. 대한축구협회 일급 심판원 출신으로 전북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이희근(41회), 조흥은행 축구선수로 활약한 이희성(46회), 모교에서 축구팀 사령탑을 이끈 김동주(48회), 유일하게 축구 국가대표를 지낸 조관섭(58회), '일화' 축구선수를 지낸 장창선(61회) 등은 태인 축구의 산증인이다. △ 스마트 교육 환경 구축'꿈, 창조, 사랑'으로 세계 인재 육성을 기본 방향으로 정한 태인초는 지역사회와 학부모가 함께하는 학교를 목표로 삼고 있다. 전국적 분위기이긴 하나 최근 10년 사이 학생수가 급감해 현재 전교생이 110여 명까지 줄어든 상태. 태인초는 학년 별로 반도 1개에 그친다.그럼에도 태인초는 2009년 도교육청의 디지털 교과서 연구학교(2009~2010년), 디지털산업 선도학교(2011년)로 선정되면서 스마트한 학업 환경 구축을 통해 '맞춤형 학습'과 '자기주도형 학습'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교과서문제집학습사전멀티미디어 자료 등이 포함된 미래형 디지털 교과서를 선보여 4~5학년 사회과학수업에 활용하고 있으며, 태블릿 PC와 전자칠판을 활용한 스마트한 혁명을 선도해나가고 있다. 100주년 때 시작된 학교 숲 조성을 기점으로 태인초는 교목인 소나무 등을 심고 인조 잔디 등이 깔려 산림욕을 해도 좋은 환경을 갖추게 됐다. 태인초는 예절교육과 사물놀이 등으로도 태산선비문화권의 명맥을 잇고 있다. 2002년부터 시작된 하모니카 연주회와 이달의 하모니카 연주 동요 선정 등은 감성 교육과 함께 분기별 사제간 체육대회는 태인초의 아름다운 전통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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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3.10.23 23:02

17. 전주초등학교 - 과거 전북 신교육 1번지…혁신학교로 재도약 부푼 꿈

"우리 학교요? 과거엔 전북 신교육의 1번지였죠."지난 14일 만난 송경오 전주초등학교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명문학교로 군림했던 전주초의 위상은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잔뜩 움츠러들었다. 학생수 급감으로 교가의 가사를 바꿔 부를 정도로 졸업생들이 느끼는 격세지감(隔世之感)은 커 보인다. 다행스럽게 2006년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학생수가 늘고 있는 데다 올해 혁신학교로 지정되면서 학교가 활력을 되찾는 분위기다. 교내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잔재와 삐걱거리는 낡은 건물은 학교의 오랜 흥망성쇠를 가늠케 한다.△ 전북 신교육의 1번지 전주초의 전신(前身)은 교동 58번지의 양사재(養士齋)였다. 양사재는 향교의 부속 건물로 서당 공부를 마친 특출난 유생들이 생원진사 공부를 하던 곳이다. 양사재는 1896년 전북공립소학교 인가를 받아 이듬해 7월 개교했다. 당시 교사가 3명, 학생이 37명에 불과했다. 서당을 다닌 8~16세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중도 탈락자들이 많았다. 1906년 현재 위치에 전주초가 지어지면서 비로소 졸업생 배출이 안착됐다. 지난 2월까지 공식 집계된 졸업생은 3만4600여 명. 송경오 교장은 "당시 전주여자공립보통학교, 전주공립공업보수학교, 전주공립상업보수학교 등이 전주초와 한 몸이었다"면서 "전주초가 전북 신교육의 1번지라 불리는 이유"라고 했다.청산되어야 할 일제의 잔재도 있다. 교정에 일본 천황을 사진을 보관하던 '봉안전'의 흔적이 그것이다. 봉안전 주변엔 병풍처럼 두른 정원과 작은 폭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학생들이 이 앞을 지날 때마다 억지로 경례를 해야 했던 치욕스런 장소다. 학교 측은 해방 뒤 봉안전을 철거하고 시멘트로 조악하게 만든 기단 위에 대한독립을 기념하는 비를 대신 세웠다. 이 일대 흩어져 있던 일제 정원석(지성원대화원인애원충효원)은 현재 전주역사박물관에 기증 돼 있다. 1930년대 초반에 지어진 강당은 낡을대로 낡아 한쪽 바닥이 아예 무너져 내년 신축을 앞두고 있다. △ 정동영김명곤 정계문화계 동문 두각오랜 역사가 무색할 만큼 총동창회 활동은 뜨뜻미지근하다. 지난 100주년 때 만든 기념문집'양사재의 그 뒤'가 거의 유일한 사료. 이를 참고하면 졸업생 중 정계 진출자가 두드러진다. 네 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유 청(21회)은 기념문집을 통해 당시 반 학생 32명 중 31명이 전주보통(북중) 전원 합격했을 만큼 전주초가 명문 예비학교였다고 소개했다. 전 청와대 대변인(34회)를 지낸 임방현, 전 완주군수를 했던 임명환(36회)도 넓은 운동장에서 찰밤 도시락 잔치로 어우러진 모교 운동회의 추억담을 전했다. 임병찬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36회)는 전주초에 다니면서 신문 배달을 하며 공납금을 힘겹게 댔던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56회 졸업생 중에는 이례적으로 장관이 두 명이나 배출됐다.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과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다. 정 전 장관은 "학생이 5000명이나 되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학교였다"면서 "크고 넓은 운동장, 야외 수영장, 동물원까지 갖춘 명문 중 명문이었다"고 기억했다. '특종왕 기자' 출신이었던 최규식 전 국회의원(57회)도 전주초의 졸업생이다.△ 자기주도적 학습권 위한 혁신학교 첫 발지난 3월에 선정된 혁신학교는 걸음마 단계다. 송 교장이 1년 간 교사들을 설득한 끝에 이뤄낸 결과. 송 교장은 "무너지는 공교육을 바로잡는 첫 단추는 수업에 있다"고 봤다. 한희정 전주초 교사는 "대개 교사들은 서로의 수업을 공개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다"면서 "그래서 수업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동료 간 벽을 허무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구속 받는 걸 싫어하는 아이들이 수업의 주최자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의제를 설정하는 것은 교사의 몫. 교사들은 아이들의 정서 순화를 위해 자연에 관심을 갖는 창의체험을 내놨다. 전주의제21과 같은 NGO단체와의 협조로 교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생태교육은 아이들의 감성을 깨우는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2007년 태권도 창단식을 기점으로 전주초 학생들이 전국 태권도대회에서 각종 상을 휩쓸면서 태권도 꿈나무 양성에도 기대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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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3.10.16 23:02

16. 신흥중·고 - 호남 최초 근대교육…전북 기독교 선교 이끈 '맏형 학교'

전주 신흥중과 신흥고 졸업생들에게 '당신이 꼽는 모교의 자산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봤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답변은 인성교육이다. 기독교 신앙을 근간에 둔 예배, 채플 수업 등을 통한 인성교육이 개교 113년 학교의 저력을 대변해줄 수 있다는 것. 신흥고 김영기 교장과 조재승 교감은 물론 신흥중 소병은 교장과 김동수 교감도 학교폭력, 왕따, 학습부진 등과 같은 부적응 학생이 다른 학교에 비교해 적은 수준이라고 자신했다.△호남최초 근대교육 요람 '신흥학교'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호남 지역 최초로 근대교육을 시작한 학교, 전북의 기독교 선교를 이끈 '맏형' 학교, 항일민족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학교 등 113주년이란 역사만큼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해왔다.신흥학교의 첫 삽은 1900년 9월 미국남장로교회 선교회가 떴다. 이것이 호남 지역 최초의 근대교육 시발점이다. 선교사 이눌서(William Reynolds)가 자신의 집에서 학생들을 차곡차곡 배출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졸업생 2만1142명(2월 기준)에 이른다.개교 이래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을 기른다'는 건학이념은 지금도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온다. 일제 식민주의에 나라의 안위를 염려한 교사와 학생들은 1919년 319 운동과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등을 통해 전주의 항일민족운동 불씨를 당겼다. 1937년 다가공원에 있는 일본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해방 때까지 폐교되는 아픔도 겪었다. 625 당시 수많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참전했고, 1980년 신군부의 강압에 맞선 527 시위는 고교생이 벌인 전국 최초의 시도였다. 개교 100주년을 맞는 2000년은 신흥인들을 하나로 모은 해였다. 총동문회가 힘을 모아 개교 100주년 기념 행사를 연 것을 계기로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동문회 활동이 탄력을 받았다. 그 해 31 운동 기념탑을 건립했고, 동문들로부터 20억원을 모아 100주년 기념관 겸 기숙사를 짓게 됐다. △종교정치교육계 인재 배출신흥고 인맥은 짱짱하기로 유명하다. 종교계를 비롯해 정계, 재계, 교육계 등 폭넓게 포진해 있다. 해방 전 초대 서울시장을 지낸 김형민(10회), 반일 저항시인 김해강(22회), 조선대 총장을 지낸 박철웅(30회), 거창고를 설립한 전영창(37회), 차병원을 만든 차경섭 등이 눈에 띈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애정과 존경을 담은 건학 이념은 세계적인 민중신학자로 평가받은 서남동 목사, 국제종교문제연구소를 연 탁명환 등의 배출로 이어졌다. 국내 최초 하버드 졸업생이 된 하경덕은 연희전문대 교수로 재직하다 흥사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으며, 815 광복 뒤 코리아타임즈와 서울신문 창간에 주춧돌을 세웠다. 재경동문회를 활성화시킨 장두원 전 KBS 전주총국장, 홍성주 전 전북은행장, 송계일 전 전북대 교수는 신흥고 58회 동기. 신일균 신경외과원장(59회)은 1982년 동문회를 조직한 산증인이다. 김수곤 전 전북대 총장과 전주군산시장을 거쳐 행정부지사를 지낸 김인식, 전 안디옥교회 목사를 지낸 이동휘 목사(56회), 오세영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정옥동 중국 연변대학부설복지병원 이사장(60회)도 이곳 출신이다. 최인 CBS 상무, 임채청 동아일보 상무, 송호성 전주MBC 특임국장, 한제욱 전북일보 이사, 김정기 KBS 전주방송총국 PD도 76회 동기로 언론계 파워인맥이다. 정계는 신흥고 출신이 접수한 지역이 수두룩하다. 민주당 대표를 지낸 정세균 국회의원(69회)을 필두로 김생기 정읍시장(66회), 이환주 남원시장(79회), 도의원 노석만(69회), 전주시의원 박병술(72회)김남규(77회)송성환(88회), 김제시의원 온주현(68회), 장수군의원 김홍기(66회), 부안군의원 장공현(67회)오세웅(68회), 진안군의원 김현철(85회)까지 화려하다.재계는 70회 동기인 오공균 (사)한국선급 회장, 이중길 전 KCC 사장이 중심이다. 전일환 전 전주대 부총장(64회)과 은희천 전주대 교수(68회), 이철량 전북대 교수(70회), 이태영 전북대 박물관장(74회), 이용승 서해대 총장과 황금택 서울대 교수(75회), 김동문 완산교회 담임목사(77회), 강신재 한국탄소융합기술원장(78회)이 신흥 인맥을 잇고 있다. 변호사 이종기(86회) 김수태(92회) 조하영(77회) 등은 법조계 신흥인이다.강세인 신흥고에 비해 신흥중은 약세다. 서거석 전북대 총장을 비롯해 유성엽 국회의원, 진성준 국회의원 등을 들 수 있다.

  • 기획
  • 이화정
  • 2013.10.09 23:02

15. 임실초 - 학생수 늘고 학업성취 높아져 '지역 명문' 재도약

24일 임실군 성가리 202번지에 위치한 임실초등학교. 지난 2010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100주년 개교 기념탑이 기자를 맞았다. 16.5㎡ 남짓 되는 아담한 교무실엔 아직도 분필 칠판이 걸려 있을 만큼 옛 교실 풍광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급감하는 학생수 걱정 '안녕'개교 103주년을 맞은 임실초는 1911년 9월10일 문을 열었다. 194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해온 배경은 확실치 않으나 박민 교감은 "만석꾼 집안이 성가리로 학교를 유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올해 제100회 졸업생까지 포함하면 총 1만1955명이 이곳을 거쳐갔다. 현재 이 학교 학생수는 300여 명(남 168명여 132명). 1950년대만 해도 학생수가 3000여 명이 넘었다는 졸업생들의 구전을 빌리자면 지금 규모는 한참 쪼그라든 셈이다. 제47회 졸업생인 최명옥씨는 "당시에는 한 반에 70~80명 씩 학년별로 8반까지 있었다"면서 "운동회가 열릴 때면 학교가 사람들로 버글버글했다"고 기억했다.제47회 졸업생 박서빈씨도 "5학년 때 7살을 더 먹은 형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면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장가간 친구도 있었다"고 전했다. 당시 한국전쟁이 끝난 뒤 가정형편이 어려워 뒤늦게 진학한 친구들도 많았고, 점심시간에 50% 이상 학생들이 밥을 굶고 물로 배 채우는 일이 허다했다. 최근 반가운 소식은 임실초가 내년부터 3개 반을 추가해 운영하게 됐다는 것이다. 일진그룹이 임실에 공장을 지으면서 새롭게 유입된 학생 70여 명이 임실초에 입학하게 된 것. 권기호 교장은 "갈수록 학생수가 줄어 걱정하는 학교도 많은데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며 즐거워하고 있다.△정계재계 진출 두각박민 교감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총동창회 활동이 주춤하고 기수별 동창회 활동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제47회 동창회 경우 개교 30주년을 기점으로 1990년부터 5년 주기로 은사를 모시고 행사를 열어왔으나 다른 기수 활동은 뜸하다는 것. 다만 역대 졸업생 앨범과 한창 활동이 두드러진 제47회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정계재계법조계에 진출한 졸업생들이 적지 않았다. 졸업 연도를 알 수 없는 박세경 전(前) 국회의원(변호사)을 필두로 진직현 전 국회의원(4회), 엄병학 전 참의원(18회), 이정우 전 전북도지사(19회), 엄병건 전 전주시장(21회), 김철호 전 명성그룹 회장(33회), 이상칠 전 전북부지사(34회), 박세두 전 전주완산구청장(36회), 탁병호 전 서울시 부시장(47회), 최명옥 종로엠스쿨 대표(전 서울시의원47회) 등이 뒤따른다. 문화계에선 비운의 죽음을 맞은 것으로 알려진 '38선의 봄'을 부른 가수 최갑석씨(38회)를 꼽을 수 있다.△기초학력체력 신장 등 두 마리 토끼 잡기 최근 임실초가 강조하는 교육철학 중 하나가 기초학력 신장이다. 지난해까지 2년 연속 교과부의 학력향상형 창의경영학교로 지정된 임실초는 학업성취도 평가 기초학력 미달 비율을 6.8%(2010)에서 0%(2010)로 뚝 떨어뜨린 공로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주 3회 영어수업은 물론 매주 토요일 퇴직 교사들이 영어수학 특별 지도를 해온 덕분이다. 앞서 임실초는 2009년 종합장학지도 우수학교 선정(2009), 학교평가 우수학교(2010) 등을 수상했었다.임실초는 일본필리핀 등 다문화학생 12명을 포함한 전교생들을 위한 '2013 다꿈키움학교'도 운영 중이어서 관심을 모은다. 매주 일본어 학습과 사물놀이를 운영하는 한편 매학기 다문화주간을 선정해 다양한 프로그램도 내놓고 있다. 최근 담배를 끊은 박민 교감을 필두로 교사학생들은 가두 캠페인, 가정에 금연엽서 보내기, 콩나물 키우기 등을 통해 금연을 장려하고, 학생들의 균형 잡힌 식단을 위해 매주 금요일 '채식의 날'도 운영 중이다. 학력신장이 중요하기는 해도 몸과 마음이 건강한 학생들로 성장시키기 위한 배려라는 게 학교 측의 설명이다.

  • 기획
  • 이화정
  • 2013.09.25 23:02

14. 무주초 - 변치 않는 교육 신념으로 '지역 최고 명문' 일궜다

개교 103주년을 맞은 무주초등학교(교장 조현종)는 무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명문학교 지존의 자리를 철옹성처럼 굳게 지켜왔다. 무주군 무주읍에 위치한 무주초등학교는 무주중앙초등학교를 비롯해 용포장백내도가옥대차오산분교장의 전신으로 학교의 산파역을 해왔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 교장의 부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역사도 존재했지만 첫 한국인 교장으로 부임한 임종성 전 교장과 그의 바통을 넘겨 받은 김환형 전 교장이 장기 재직하면서 학교는 안정화 궤도에 올랐다. 학생수 급감으로 시골학교의 명운이 엇갈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무주초등의 아성(牙城)이 지켜질 수 있을 지 졸업생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 교훈 등 전통을 지켜온 학교 한때 변화를 주도한 무주초등은 이젠 전통에 충실한 학교로 정평이 났다. 1947년 김환형 전 교장이 제작한 교훈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는 유일한 학교다. 교훈인 '고운 마음씨, 깨끗한 맵시, 뛰어난 슬기'를 가리켜 조용현 교장은 "시대의 흐름을 뒤쳐진다고 여길 법한 슬로건이지만 지금껏 학교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일관된 교육 신념과 철학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꽃이름을 딴 반도 그대로다. 학년별로 국화난초매화백합장미옥잠석류반 등 7개 반이 있었으나 최근엔 학생수가 줄어 국화난초반만 운영 중이다.반면 무주초등은 학업열로 시대를 앞서갔다. 1960년대 시작된 수준별 수업은 학생들의 학력 신장을 위한 자극제가 됐다. 동문들은 "무슨 반이었느냐에 따라 성적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한 반에 60~70명 씩 꽉 찬 학생들을 감당 못해 뒷동산 야외수업을 간다든가, 일주일 중 하루는 오전오후반 수업을 했을 만큼 이 명문 초등학교는 한때 학생들로 차고 넘쳤던 시절이다. 특히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은 운동장이 인산인해가 됐다. 백경태 도의원은 "분교 학생들까지 운동장에 꾸역꾸역 몰려오는 통에 도시락을 들고 뒤늦게 찾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찾지 못해 쫄쫄 굶기도 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정계 등 우수한 인재 배출도 숱하게 배출된 학생들이 우수한 인재 양성으로 이어졌다. 이 학교 졸업생 가운데는 김덕규 전 국회부의장(42회), 장세환 전 국회의원(53회), 김세웅 전 국회의원 및 무주군수(53회), 백경태 도의원(62회) 등 정계 인사가 유독 많지만, 문화예술계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평론가 김환태(9회) 정도에 그친다. 백경태 의원 부자(父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주초등을 졸업한 선후배. 조용현 교장도 무주초등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퇴임을 앞두고 고향에 살고 싶어 이사를 온 경우다. 다른 학교와 비해 총동문회의 활동이 두각을 보이진 않으나, 끈끈한 인연을 앞세워 지난 2010년 백경태 도의원을 주축으로 합심해 100주년 기념탑을 세웠다. 행정구역상 전북에 포함되나 생활권은 충청에 더 가까워 졸업생들이 갈수록 대전서울로 진학하는 분위기가 안타깝지만 특별한 대안은 없어 보인다. △ 학습 부진아 줄이기 위한 교육 무주초등은 지난해 도교육청으로부터 '학력 향상형 창의경영학교'로 지정됐다. 기초 학력을 높이기 위한 주제별 연구수업을 바탕에 둔 프로그램 개발로 학습 부진아 등을 줄이기 위한 프로젝트. 조 교장은 "학습권이 소외된 학생들이 갈수록 눈에 띄게 줄고 있다"고 봤다.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한 자기주도적 학습 방법, 사이버 가정학습(전북 e스쿨)의 연계, 독서를 통한 글쓰기 교육 등도 학습 능력을 높이기 위한 포석이다. 학교 폭력왕따 문제 해결과 같은 인성 교육을 특히 챙기는 조 교장은 "학교 폭력왕따 등과 같은 문제가 불거지게 된 근본 이유는 공동체 문화가 깨진 탓"이라며 "이전엔 동네별로 학생 등학교를 전담하는 애향단이 있을 정도로 합심하는 교육 공동체였다. 공동체 문화의 복원이 인성교육의 첫 걸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이화정
  • 2013.09.11 23:02

13. 고창 흥덕초 - 고창의 관문에 자리…작지만 강한 학교 육성

△학교가 걸어온 길고창 흥덕초등학교(교장 최재수)는 1909년 4년제로 인가 받은 흥덕학원을 모태로 한다.이후 1922년 6년제로 인가를 받고,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1회 졸업생(1924년)을 배출하게 된다.1981년에는 병설유치원을 설립하고, 1996년 범국가적 일본제국주의 잔재 청산 정책에 따라 흥덕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학교 주위에는 인재배출의 요람으로 알려진 고창북고등학교가 있고, 흥성동헌(전북유형문화제 77호)이 자리잡고 있다. 대나무와 큰 나무들로 병풍을 두른 듯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는 흥덕면은 고려충선왕 재위 때(1308~1312) 설립됐고, 소개비에는 '흥성'은 '흥덕'의 옛 지명이라는 것과 장덕을 흥덕으로 고쳤으며, 고종32년(1895년)에 군으로 승격했다고 적혀 있다.또한 1914년 일제의 '부군폐합령'에 의해 무장과 함께 고창군에 통폐합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전 지역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고창군의 경우 이미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고창갯벌과 운곡습지, 고인돌 세계문화유산, 선운산도립공원, 동림저수지 야생동물보호구역 등을 품으며 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이처럼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속해온 흥덕초는 인성과 실력을 아우르는 교육관을 기치로 내걸고 참인재 육성에 매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흥덕지역은 옛부터 고창으로 들어서는 대부분의 물자와 사람들을 맞이하는 입구 역할을 하며, 번성가도를 달리기도 했다.하지만 농촌지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인구유출 현상이 심화하면서 흥덕초는 학생수가 급감했지만, 대신 작지만 강한 학교를 지향하고 있다.한편 올해 제90회 졸업식을 연 흥덕초를 거쳐간 학생은 현재까지 모두 1만36명에 달한다.△학교를 빛낸 인물흥덕초는 오랜 역사 만큼이나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김영근 전 대전지방국세청장(44회)은 전주고와 서울시립대를 나와 제23회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들어섰다. 그는 서울청 조사3국 4과장, 국세청 국제세원관리담당관, 소득세과장, 정보개발1담당관, 광주청 조사2국장, 서울청 납세지원국장 등을 두루 지냈다. 꼼꼼한 일처리와 원만한 대인관계로 따르는 후배들이 많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이민영 한국미래문화연구원장(47회)는 2000년 문화법인으로 연구원을 설립, 문학을 중심으로 다른 장르와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문화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으며, 해마다 '한국미래문학'을 발간하고 있다.이 학교 48회 졸업생인 원찬희 전북대 교수도 환경교육 활성화 및 지역환경보전노력 등의 공로로 2001년 대통령표창을 수상하는 등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원 교수는 전북녹색환경지원센터장을 맡다 전주시 기후변화대응 종합계획 용역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주시는 향후 체계적인 기후변화 대응 종합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원 교수는 지역내 환경교육 및 조사연구개발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각종 환경위원회에 참여해 환경행정에 관한 조언과 자문을 아끼지 않은 점 등이 널리 평가받고 있다. 또 2001년에는 전북지역환경기술개발센터 설립을 주도했고, 2003년 8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센터장을 역임하면서 지역환경현안에 대한 조사연구 및 정책개발, 기업환경지원사업 등을 수행하기도 했다.도교육청 교육연구관에서 지난 1일자로 신임 교육장으로 임명된 김국재 고창교육장(49회)은 앞으로 고향인 고창지역 교육을 이끌게 됐다. 정책공보 분야에서 탁월한 기획력을 자랑하는 김 교육장은 앞으로 최장 2년간 교육장으로 일하게 될 예정이다.이와 함께 민학기 변호사(48회), 전 전북대 로스쿨 민법당당 교수와 전주지법 판사를 역임한 남준희 변호사(56회)가 법조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도약을 위한 노력흥덕초는 특색사업으로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한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능력 배양을 교육목표로 삼고 있다.이에 스마트 기기를 보급, 역사문화 등 사회과목 뿐만 아니라 국영수 등 주요 교과에 관해서도 최신 교육정보를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또한 학습모델 개발 및 디지털교과서 활용수업도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 사업은 사이버 가정학습(전북 e스쿨)과 연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됐다.이와 함께 독서교육을 통한 글쓰기 능력 향상에도 주력하고 있다.학년별 주제에 맞는 다양한 독서체험활동을 실시하고 있으며, 아침 독서 20분 운동을 통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학교는 스포츠 종목 육성에도 매진하고 있다. 특히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 엘리트 선수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이에 각종 전국대회에서 상위 성적을 내고 있다. 학부모 등 지역주민으로 구성된 후원회도 왕성한 활동을 통해 막후에서 선수들을 지원하고 있다.최재수 교장은 "단 한 명의 학생도 정상적인 교육과정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며 "학생들이 훌륭한 선배들처럼 미래 한국사회를 이끄는 인재로 자랄 수 있도록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9.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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