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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

▲ 전성권

홍시는 제철 맛을 잃지 않는다. 설령 설익은 홍시라 할지라도 얼고 녹으면서 그 맛을 더한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김치냉장고 덕에 논에서 우려먹던 도사리, 대청마루와 채반 위, 뒤란 큰 항아리 속의 홍시를 사철 맛보고 있다.

 

오래 전부터 우리 집 김치냉장고에는 일 년 내내 떡하니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있다. 비닐봉지에 두 개씩 담겨 김치통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바로 대봉이다. 늦가을 첫서리가 올 때쯤 몇 접을 주문하여 거실에 쫙 깔아놓고 적당히 홍시가 되면 냉동 보관한다. 대봉은 이듬해 가을이 익어서야 그 자리를 잠시 비워주고는 다시 냉동 칸 전부를 차지한다. 식구들도 여간해서 먹을 수 없다. 손님 대접용이기 때문이다. 도시생활에서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오는 손님마다 전원생활이기에 가능하다며 한마디씩 한다.

 

회사에 다닐 때였다. 직장선배가 집에 왔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원생활을 하는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선배였다. 말은 야외나들이 나왔다가 내가 생각나 들렸다고 했지만. 수직 관계는 이미 무너졌고, 어느 순간 나는 전원생활의 선배로서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해거름이 되었다. 마당 울타리에 태양이 붉게 내려앉기 시작하자 낮 동안 해를 이고 있던 지붕이 더는 못 참았는지 급기야 거실로 열기를 쏟아냈다. 거실을 둘러보더니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보이지 않자 체념했는지 선배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 둘 풀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기운이 쇠한 해가 축 늘어져 기대고 있는 서 창가에 놓고 대봉을 꺼내 놓고 녹기만을 기다렸다.

 

돌덩이 같던 연주황색의 대봉에 얇은 성에가 낄 때쯤 선배는 묘한 미소를 띠더니 대접에 물을 떠 오라 했다. ‘목이 마른가’라고 혼잣말을 하며 컵에 물을 떠다 줬다.

 

선배는 크게 웃으며, “대접 두 개에 물을 삼 분의 이 정도 받아오게”라고 하였다.

 

대접에 수돗물을 받아오자 감을 담그며,

 

“이야기하다 보면 감이 녹을 거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 이게 이한치한(以寒治寒)이여. 동상을 찬물로 서서히 빼는 거와 같아. 밖의 열로 녹이면 겉은 물컹하고 안은 얼음덩이야.”라고 했다.

 

이야기하는 중에 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감 표면에 제법 쌓인 눈처럼 짙은 성에가 드리우더니 살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감색은 자주색으로 짙어만 가고 얼음은 전등 빛에 반짝거렸다. 신기한 듯 감을 굴리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였는지 선배는 웃기만 하였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갑더니 대접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 참을 지나자 “이제 됐을 거야. 물 버리고 수저 좀 가져오게”라고 했다.

 

한 술 떠서 오물거리며 상글방글 “이게 바로 천연 아이스크림이여. ‘쥐도 늙은 쥐가 사는 게 낫다’는 말이 있잖아.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요즘 사람들이 날고 긴다 해도 옛 어른들의 지혜는 배워야 혀”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수필가 전성권 씨(53)는 진안 출신으로 지난 2011년 〈문예연구〉로 등단해 순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북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KDC 기획총괄본부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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