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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교육청 미복귀 전교조 전임자 인사위 무산

전북교육청이 9일 오후 인사위원회를 열고 법외노조 판결 이후 소속 학교로 복귀하지 않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임자에 대한 징계 안건을 다루기로 했지만 전교조 전북지부와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로 무산됐다.이날 민주주의와 전교조지키기 전북도민행동소속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30여명은 인사위원회가 예정된 전북교육청 5층 정책협의실 입구를 막고, 미복귀 전교조 전임자에 대한 해고 절차 중단을 촉구했다. 이들의 농성으로 인사위원들은 회의실에 입장하지 못했고, 전북교육청은 인사위원회를 무기한 연기했다.전북교육청 관계자는 장소를 바꾸는 등의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회의를 무기한 연기했다면서 다시 적절한 날짜를 잡아 인사위원회를 열고 직권면직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앞서 전북교육청은 지난달 19일 징계위원회를 열고 도내 미복귀 전교조 전임자 3명 중 공립학교 소속 2명에 대한 직권면직 문제를 다뤘다. 이날 징계위원회에서 위원들은 미복귀 전임자에 대해 직권면직 의견을 냈다. 직권면직은 징계위원회 의결과 인사위원회 결정, 그리고 교육감 결재로 확정된다.

  • 교육일반
  • 김종표
  • 2016.06.10 23:02

학교 비정규직노조 파업, 15곳 급식 차질

조리종사원과 교무실무사 등 전북지역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9일 파업을 해 도내 15개 학교에서 급식 차질이 빚어졌다.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전북지부는 이날 전북교육청 앞에서 학교 비정규직노동자 차별철폐를 위한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고 방학 중 생계대책 마련과 기본급 인상 등을 요구했다.전북교육청에 따르면 이날 파업에는 95명의 학교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도내 공립 단설유치원 및 초중고교 등 전체 668개 공립학교 중 15개 학교에서 급식에 차질을 빚었다. 이들 학교에서는 교육청의 사전 안내에 따라 학생들에게 도시락을 지참하도록 하거나 빵과 음료 등을 제공했다.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전북지부는 최근 부산과 울산세종강원전남 등에서 상여금 지급을 통해 학교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방학 중 생계대책 마련에 합의했지만 전북교육청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앞으로 전북교육청과의 교섭 진행상황을 지켜보면서 투쟁을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전북지부는 △정기상여금 100만원 지급 △장기근무가산금 상한 폐지 △조리종사자 위험수당 10만원 지급 △공동조리학교 및 23식 학교 조리종사자 특별근무수당 지급 △전직종 기본급 인상 및 처우개선 수당 동일 지급 등을 요구하고 있다.

  • 교육일반
  • 김종표
  • 2016.06.10 23:02

[6·10 만세운동과 6월 민주항쟁]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잇다

■ 주제 다가서기1926년 6월 10일은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장례일이자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또한,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던 날이다. 31 운동이 고종의 장례식에 맞추어 일어난 것이라면, 610 만세운동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에 맞추어 전개되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6월 10일에 예정대로 서울 거리로 뛰쳐나왔다. 61년이라는 역사가 흘러 1987년 6월 10일 정부의 무자비한 독재와 탄압을 참지 못한 학생과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이것이 바로 6월 민주항쟁이다. 그래서 6월 10일은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잇는 뜻 깊은 날이다. 1926년과 1987년의 6월 10일 그날의 사건을 재조명하여 소중한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 의미를 새겨봤으면 한다.■ 주제 관련 신문기사[읽기자료 1] 뉴시스, 2012년 6월 10일, 영원히 계승해야 할 민주정신, 군사독재 몰아낸 610민주항쟁[읽기자료 2] 대경일보, 2016년 5월 24일, 제2의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90주년)[읽기자료 2] 뉴시스, 2009년 6월 10일, 6월10일은 韓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 신문읽기[읽기자료 1]영원히 계승해야 할 민주정신610 민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큰 분수령이었다. 국민의 힘으로 서슬 퍼런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민주화의 서막을 알리는 커다란 전환점이었다.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이 20여 일 동안 자발적으로 거리로 몰려나와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역사적으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국민 스스로 주인임을 자각했다는 점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1979년 1212사태(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로 정권을 잡은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은 1985년 간선제로 선출됐다. 전 대통령의 군부 정권은 도덕성 결여와 비민주성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야권과 재야세력의 직선제 개헌 공세 대상이 됐다.1986년 개헌 서명운동에 1000만 명이 동참하는 것은 물론 여야가 헌법 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1987년 4월13일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이른바 413 호헌(護憲) 조치를 통해 독재군부정권 유지 뜻을 천명한다.이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씨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하던 중 1월14일 숨졌다.당시 경찰은 조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억하며 쓰러졌다고 발표하며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축소 발표했다.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 소식을 접한 국민들의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6월9일 연세대 2학년이던 이한열은 학교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 뒤 사경을 헤매다 7월5일 끝내 숨졌다.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은 길거리로 나섰고, 꽃다운 두 젊은이의 희생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5월 27일 꾸려진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6월 10일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개최했다. 박 군의 고문치사 사건 조작은폐를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였다.주요 도시 곳곳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로 거리가 메워졌다. 주요 도로 곳곳의 교통이 마비됐지만 시민들은 시위대를 지지하며 손수건과 자동차 경적으로 호응했다.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는 전국에서 울려퍼졌다. 이날만 22개 지역에서 24만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주최 측은 추산했다. 경찰에 연행된 시위대도 수천 명에 달했다. 구속된 이들은 국본 간부를 포함한 220여명이다.대항쟁은 멈추지 않았다. 5일여 동안 명동성당에서 집회가 이어졌고 낮에는 넥타이부대와 일반시민들이 지원시위가 끊이지 않았다.6월15일 다시 전국적으로 되살아난 시위 불씨는 26일 전국 30여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까지 계속됐다. 이 때까지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5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결국 전 대통령은 이에 굴복, 민주정의당(민정당) 노태우 당시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골자로 한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이는 민중의 힘으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킨 1960년 419혁명과 같이,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한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과 같이 민중 역사의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우리 사회에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 6월 항쟁은 그해 12월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미완의 역사로 마무리됐다.6월 항쟁 25주년 행사 국민추진위원회 서우영 조직팀장은 6월 항쟁은 민주화를 간절히 열망했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경찰의 최루탄 가스와 폭력에 맞서며 거세게 저항한 투쟁의 역사라며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며 이뤄낸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이어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와 제도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6월 항쟁의 민주정신은 단순하게 기록된 역사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함께 영원히 계승해야 할 살아있는 민주주의 역사라고 덧붙였다. 〈뉴시스, 2012년 6월 10일, 박성환 기자〉[읽기자료 2]제2의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순종) 인산일, 곧 장례일을 기해 일어난 제2의 만세운동이다. 4월 25일 융희황제가 서거하자 610만세운동이 추진됐다. 이를 이끌어 낸 인물이 바로 경북 안동의 권오설(權五卨, 1879~1930,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과 김천 출신의 김단야(金丹冶, 1900~1938, 본명 김태연,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다. 원래 이들은 5월 1일 서울에서 메이데이 시위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순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일에 대중적 시위를 일으키는 쪽으로 운동 방향을 바꿔 4월 말부터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다.권오설은 1926년 5월 1일 상주 차림으로 변장하고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갔다.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김단야를 만나 활동 방향을 논의했는데, 만세시위 곧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국내로 돌아온 권오설은 조선공산당의 동의를 얻고,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만세 준비에 나섰다.만세운동을 펼칠 조건은 31운동 때보다 훨씬 나빴다. 31운동을 경험한 일제는 순종의 장례에 있을 저항을 미리 막고자 군대와 경찰을 모두 동원해 물샐틈 없는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례일에 맞춰 시위를 일으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권오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전 민족이 참여한 독립만세를 이끌어 내기 위해 통일전선체 조직에 나섰다. 권오설은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이를 31운동 때와 같이 전 민족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학생계를 망라한 통일전선 조직을 구상했다. 그 결과 국외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상해의 임시정부 및 그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천도교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일본유학생과 국내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비롯한 학생 등 다양한 주체들이 정치적 이념을 초월해 연대를 이뤘으며, 그 지도기관으로 대한독립당도 만들었다. 상해에 있던 김단야는 민중들에게 알리는 격문을 직접 썼다. 그리고 5천매를 인쇄해 국내로 들여보냈다.그런데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3일 전인 6월 7일 격고문이 발각돼 권오설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어 이튿날인 6월 8일, 일제는 거의 전 지역에서 철야 경계에 돌입했다. 장례에 참여코자 서울로 오는 사람들을 미리 막아,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될 여지를 막기 위함이었다. 끝내 200여 명이 체포되고, 610만세 추진위원회가 구상했던 지방으로의 연락 계획도 좌절되고 말았다.더 이상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6월 10일 기습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권오설과 함께 만세를 준비했던 학생들이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경북 안동 예안면 부포마을 출신의 이선호(李先鎬, 1904.7.12.~?,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다.장례 행렬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자 중앙고보생이었던 이선호가 길 가운데로 뛰어나오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610만세운동의 신호탄이 됐다. 이선호의 뒤를 이어 중앙고보생들이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와 격문을 뿌렸으며, 만세소리가 거리 곳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관수교觀水橋경성사범학교 앞훈련원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에서도 많은 민중이 호응했다. 이 과정에서 안동 출신의 권오설, 권오상(權五尙), 권오운(權五雲), 권태성(權泰晟), 류면희(柳冕熙), 이선호(李先鎬), 이수원(李壽元)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철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일제 당국은 기습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있자, 7천여 명의 보병기병포병을 각 요소에 배치했다. 그리고 더 이상 사태가 커지지 못하도록 무차별 검거에 나섰다. 검거된 중앙고보 학생 가운데 하나는 매를 맞아 머리에 선혈이 흐르기도 했다. 만세 현장에서만 100여 명이 체포되고, 이들 가운데 이선호를 비롯한 대표자 11명이 기소됐다.이선호의 법정투쟁은 610만세운동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동아일보(1926.11.4)에 따르면 이선호는 법정에서 자유를 부르짖으면 반드시 자유가 온다는 굳은 신념 아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한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또 이듬해 3월, 복심법원 공판에서도 나는 자유의 나라를 동경하고 있다. 신학기를 맞아 공부하고 싶어서 양심에 없는 답변이라도 하고 싶으나, 지금도 역시 마음은 변하지 않았노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선호는 국권과 자유를 회복키 위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취지와 뜻을 끝내 꺾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징역 1년형을 받았으나, 실제로 그가 풀려난 때는 1927년 9월 20일이다. 1년 3개월도 넘는 동안 감옥에서 고생한 것이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선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건너가 1930년대까지 항일투쟁을 이어 갔다.이날의 만세투쟁은 비록 31독립만세운동처럼 크게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31운동을 경험했던 일제의 삼엄한 경계 아래 전개됐다는 점.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그 밖에도 독립운동사에서 값진 열매를 맺었다. 첫째, 사회주의운동의 추진 주체들이 민족혁명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민족주의자들과 연대를 이뤄 민족통일전선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 둘째, 민족통일전선을 이뤄 신간회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 셋째, 학생운동에 영향을 줘 1928년 광주학생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발전해 갈 수 있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출처 : 대경일보, 2016년 5월 24일, 안상수 기자〉[읽기자료 3]6월10일은 韓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6월10일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적지 않은 상징성을 지닌다.1926년 6월10일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융희(隆熙) 순종 황제의 출상일을 기해 일어난 독립운동을 일컫는다. 병인(丙寅) 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31운동 이후 노골화된 일제의 조선인 학생 차별이 이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연희전문의 이병립박하균, YMCA 영어과의 박두종 등이 주도해 서울 종로3가 단성사에서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을 외쳤다. 이후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당시 전국적으로 1000여 명 이상이 경찰에 체포투옥됐다.1987년 6월10일 일어난 610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413호헌조치에 반발해 재야와 통일민주당 등이 연대해 만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이끌어냈다.국민운동본부는 이날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해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지를 다졌다.같은 날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위이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됐다.이후 500여 만 명이 넘는 기록적인 시위인파가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민주화를 요구했다.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이같은 국민적 요구에 따라 직선제개헌과 평화적 정권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610민주항쟁은 전두환정권의 권위주의적 권력유지를 민주세력과 시민의 역량으로 저지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민주당과 시민단체 등이 10일 오후 7시 서울광장에서 개최하는 610 민주회복 범국민대회는 610민주항쟁 22주년을 기념한 것이다.〈출처 : 뉴시스, 2009년 6월 10일, 변휘기자〉■ 생각열기(1) [읽기자료 1]을 읽고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나기 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어떻게 뽑았는지, 전두환 대통령은 왜 헌법을 고치지 않으려고 했는지 친구들과 토의해보자.(2) [읽기자료 1]과 [읽기자료 2]를 읽고 6월 민주 항쟁과 6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배경과 전개과정, 그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3) [읽기자료 3]를 읽고 6월 민주항쟁과 만세운동이 한국 근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 친구들과 토의해보자.■ 생각 키우기(1) [읽기자료 1]과 [읽기자료 2]를 읽고 6월 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 당시 사회의 모습과 6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26년 당시 사회의 모습을 비교해보자(2) 일본에 강제로 합병당한 후 우리는 굴하지 않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계속 독립운동을 해 나갔으며 민주주의 국가에서 독재 정치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는 정부 앞에 우리 국민은 계속해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3.1 운동, 6.10 만세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419 혁명, 6월 항쟁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일본과 독재에 빼앗긴 자유를 찾으려는 꿈이 이어져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다음 자료는 6월 항쟁 당시 널리 불렸던 대표적인 민중가요이다. 이 노래가 불렸던 이유를 생각해보고 느낀 점을 친구들과 이야기해보자.그날이 오면 한 밤의 꿈은 아니리/오랜 고통 다한 후에/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뜨거운 눈물들//한줄기 강물로 흘러/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드 넓은 평화의 바다에/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그날이 오면/그날이 오면//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그 아픈 추억도/아 짧았던 내 젊음도/헛된 꿈이 아니었으리//(중략)/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헛된 꿈이 아니었으리//그날이 오면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6월7일)(3) 다른 나라의 독립 민주화 운동의 사례를 조사해보자. 예를 들어, 영국의 시민혁명, 프랑스의 시민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7월 혁명과 2월 혁명,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 등이 있다.■ 학생의 글- 6월 10일,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1987년 6월 10일은 민주주의를 향해 가까이 내딛게 했던 6월 항쟁이 일어났던 날이다. 서로서로 희생하면서까지 우리 모두를 위해 운동을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깐 내 나라를 사랑하고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라는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운동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고,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있었던 것 같다.1926년 6월 10일에는 우리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독립의 소망을 품고 손을 잡고 한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있었다. 6월 10일 만세운동은 민족 대표가 주도했던 3.1운동과는 달리 학생들끼리 계획하고, 추진한 운동이라고 한다.과거 많은 사람이 그리고 학생들조차도 우리나라를 위해 이런 일을 했다면,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무엇을 노력해야 할까? 우선 어른들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다. 어리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계속해보게 된다.먼저 우리나라의 기념일들을 찾아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고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열심히 공부해서 널리 알리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사는 것도 전부 옛날 분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그것을 머릿속에 새기며 감사해야겠다.달력을 보면 우리나라 중요한 역사가 있었던 날은 빨간색으로 공휴일 표시를 해둔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날에 놀러 가기에만 급급하기만 하고 그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6월 10일은 공휴일도 아닌데, 사람들은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날의 의미도 모른 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6월 10일 그날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 같다.마지막으로 선생님이 NIE 시간에 우리에게 던지셨던 우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마음에 남기며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가꿔 나가야겠다. 최수현(토기장이학교 6학년)

  • 교육일반
  • 기고
  • 2016.06.10 23:02

남원시의회, '서남대 폐교' 관련 교육부 규탄

남원시의회(의장 장종한)는 8일 성명을 내고 서남대학교 의대 폐과 및 사실상 폐교 수순을 밟고 있는 교육부를 강력 규탄했다.남원시의회는 이날 성명에서 서남대 구 재단은 횡령과 비리 등으로 대학경영 부실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다시 대학의 운명을 결정짓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더욱이 교육부가 부실의 책임이 있는 구 재단의 자체 자구계획안을 여과 없이 발표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처사로, 대학 구성원의 힘겨운 정상화 노력을 짓밟는 행위라고 주장했다.이어 현재 서남대는 대학 맞춤형 컨설팅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재정기여자인 명지의료재단의 정상화 계획 제출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면서 서남대 정상화는 컨설팅 결과와 재정기여자 등 진행 경과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신중하게 추진해 나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시의회는 또 교육부가 국민건강과 의료복지 및 의료인의 보충 안배를 위해 만든 서남대 의대를 이런 식으로 폐쇄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지역 주민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일방적 조치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전북도민과 남원시민을 무시하는 일이며 나아가 지역 간의 갈등만 조장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이어 남원시의회는 지역 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서남대에 아낌없는 지원을 기대하며 서남대 정상 운영으로 학생과 교직원, 나아가 지역 전체의 권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서남대 의대 폐과는 물론 남원캠퍼스 폐교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 대학
  • 신기철
  • 2016.06.09 23:02

서남대 사실상 폐교 수순 논란 확산

교육부가 발표한 서남대 옛 재단의 대학 정상화 방안이 사실상 남원 서남대와 전남 광양의 한려대 폐교 및 충남 아산의 통합대학(가칭 서한대) 육성 수순인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서남대 옛 재단은 최근 교육부에 제출한 대학 정상화 계획서를 통해 2018학년도부터 남원캠퍼스는 평생교육원으로 활용하고 충남 아산 1개 캠퍼스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자구책을 내놓았다. 특히 한려대를 폐교하고 서남대는 주력인 의과대학을 폐과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한려대는 홈페이지에 올린 안내문을 통해 이번에 제출된 계획(안)의 요지는 한려대와 서남대를 통합하고 충남 아산 소재의 가칭 서한대학교로 일원화 해 집중 육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교육부의 이번 발표는 서남대와 한려대 통합을 위한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결국 옛 재단에서 내놓은 자구책은 서남대 남원캠퍼스를 평생교육기관으로 전환하고, 서남대 아산캠퍼스와 한려대를 통합해 2018년 충남 아산에 새로운 통합대학을 세우는 것이 핵심인 셈이다.이에 대해 서남대는 옛 재단의 정상화 계획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서남대는 8일 보도자료를 내고 옛 재단이 제출한 대학 정상화 계획서를 마치 확정된 사실인 것처럼 발표한 교육부의 저의가 의심스럽다면서 정상화 계획서를 심의해야 할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권한을 무력화 했다는 점에서도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이 대학은 또 그동안 교육부가 요구했던 재정기여자의 정상화 계획 선결요건이 옛 재단에게는 한층 완화됐고, 이는 결국 비리로 얼룩진 옛 재단에게 학교를 되돌려주기 위한 음모로 의심된다며 지역 정치권과 연대해서 교육부와 옛 재단을 상대로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덧붙였다.교육부는 옛 재단이 내놓은 정상화 방안에 대해 강도 높은 컨설팅을 통해 정상화 여부를 검토하겠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옛 재단의 정상화 계획에 대해 컨설팅을 실시하고 이후 이행계획서를 제출하면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 안건으로 상정, 정상화 절차를 밟을 계획이라며 컨설팅 과정에 옛 재단과 함께 대학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방안도 제안했다고 밝혔다.이 관계자는 또 현 임시이사회 측에는 지난 2월 25일 제출한 정상화계획서에 대해 4월 15일까지 보완을 요구했지만 아직껏 제출하지 않고 있다면서 임시이사회에서 정상화계획서를 내면 역시 심의 대상이 되겠지만 옛 재단의 정상화 방안이 심의를 통과한 후에 제출된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관선이사들로 구성된 서남대 임시이사회는 재정기여 우선협상대상자인 명지의료재단에서 최종 시한인 8일까지 재정확보 방안을 제출하지 못함에 따라 오는 12일 이사회를 열고 재정기여 우선협상대상자 재공모 여부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

  • 대학
  • 김종표
  • 2016.06.09 23:02

서남대 옛 재단 측 "의대 폐과하겠다"

설립자의 교비 횡령과 부실대학 지정으로 위기에 놓인 서남대가 대학 구조조정의 갈림길에 섰다.교육부는 서남대 옛 재단이 한려대 폐교와 서남대 의과대학 폐과를 골자로 한 대학 정상화 방안을 제출했다고 7일 밝혔다.서남대는 지난해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 1주기 평가에서 최하위 등급인 E등급을 받아 재정지원 제한 및 장학금학자금 대출 제한 대학으로 지정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교육부에 따르면 서남대 옛 재단은 정상화 계획서를 통해 전남 광양시에 위치한 한려대를 폐교하고 설립자의 교비 횡령액 330억 원을 보전해 서남대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호하기로 했다. 또 2018학년도부터 남원캠퍼스는 일부만 평생교육원으로 활용하고 충남 아산 1개 캠퍼스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계획이다. 서남대와 한려대신경대광양보건대 등 4개 대학의 설립자는 교비 횡령 혐의로 최근 실형이 확정된 이홍하 씨다.특히 옛 재단 측에서는 서남대의 주력인 의과대학을 폐과하고 녹십자병원남광병원 등 약 460억 원에 이르는 유휴 교육용 기본재산을 매각해 교육여건을 개선하겠다는 방침이다. 이같은 대학정상화 방안은 추후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교육부는 서남대 옛 재단이 제출한 정상화방안에 대해 강도 높은 컨설팅 통해 정상화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교육부 관계자는 이번 서남대 정상화 방안은 부실대학 폐교의 신호탄으로 대학구조개혁평가 하위등급에 있는 대학들에게 큰 자극제가 될 것이라며 서남대처럼 한 설립자(법인)가 여러 대학을 운영하는 경우 통폐합 또는 자진폐교를 통해 발전 가능성 있는 대학에 투자하거나 대학간 통폐합 활성화의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이에 대해 서남대 측은 교육부가 파견한 임시이사와 대학 구성원들도 전혀 모르는 옛 재단 측의 일방적인 계획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이 대학 관계자는 교육부의 맞춤형 컨설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육부가 옛 재단 측이 내놓은 정상화방안을 발표해 당혹스럽다면서 임원 승인이 취소된 옛 재단측의 정상화 계획서를 그대로 발표한 교육부의 의도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옛 재단은 의과대학 폐과 등 대학 자구계획을 추진할 권한 자체가 없다는 설명이다.

  • 대학
  • 김종표
  • 2016.06.08 23:02

전북교육청, 도서벽지 여교사 77명…"지역사회와 대책 세워야"

최근 전남의 한 섬에서 학부모와 주민 남성들이 초등학교 여교사를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전북지역 도서벽지에 근무하는 유치원 및 초중고교의 여교사는 모두 77명으로 집계됐다.학교급별로는 공립 유치원이 16명이며, 초등학교 48명, 중고교가 13명이다.전북교육청은 도서벽지에 신규 교사를 배치하지 않는다는 인사규정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도서벽지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승진가산점을 받기 위해 스스로 지원한 40대 경력 교사가 대부분이라는 게 교육청의 설명이다.다만 도서벽지 학교에도 젊은 교사를 배치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해 공립 중등학교 교사 임용시험에서 해당 학교 8년 의무근무를 조건으로 도서벽지 학교 교사를 별도로 선발, 올해 처음으로 11명의 신규교사를 발령했다. 이렇게 뽑힌 도서벽지 중등학교 신규 교사 중에서 여성은 2명이 포함됐다.도교육청은 이번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사건으로 도서벽지 학교 의무근무 신규교원 선발 제도를 유지할 지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하기로 했다. 또 도서벽지 학교 관사 CCTV 설치 및 잠금장치방범창 점검 등 안전대책을 추진할 계획이다.전북교육청 관계자는 초등학교의 경우 여교사가 80% 이상이고 승진가산점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도서벽지에 여교사를 배치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궁극적으로는 여성교원이 근무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지역사회와 공동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교육일반
  • 김종표
  • 2016.06.08 23:02

[호국보훈의 달] 우리가 재조명해야 할 역사 속 독립투사

■ 주제 다가서기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5월이 가족 구성원들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며 이를 서로 표현하는 가정의 달이었다면, 6월은 확대된 범위의 가족과 가정 즉 국가를 생각하는 달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본인의 목숨마저 아깝게 여기지 않았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일은 시대에 따라 형식과 절차가 변화할 뿐 존재의 근거는 여전히 중요하다. 이번 주에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주제 관련 신문기사△ 한국일보 2016년 2월 29일 이화학당 31운동 열정 뒤엔 그녀가 있었다△ 전남일보 2016년 2월 15일 안중근 의사와 어머니△ 조선일보 2016년 2월 3일 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 志士, 공군 임명장 복원■ 신문 읽기〈읽기 자료 1〉이화학당 31운동 뒤엔 그녀가 있었다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본명 김란사, 1872~1919)는 대중에게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독립운동가하면 총칼을 들고 일제에 맞서 싸우거나 옥고를 치른 인물을 떠올리기 쉬운 탓에 여성 독립운동가 역시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정도다. 하지만 하란사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31운동을 태동시킨 주역이었다. 고종이 1919년 파리국제강화회의에 파견할 밀사로 점찍는 등 독립의 숨은 공로자였으나 후손조차 그의 활약을 뒤늦게 알 만큼 잊혀 왔다.구한말 평양에서 태어난 하란사(남편 성을 따름)는 일찌감치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스물한 살에 결혼한 뒤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린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기혼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자 외국인 교장을 찾아가 등잔불을 끄고 내 인생은 한밤중처럼 어둡다. 학문의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설득해 기어이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졸업 후에는 미국 웨슬리안대로 유학해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따기도 했다.그는 귀국 후 여성이 주도하는 비폭력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화학당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이끌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유관순 열사도 그 중 하나였다. 제자였던 유 열사에게 이문회 가입을 권유한 뒤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최초의 여학사, 하란사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논문을 쓴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이화학당 학생들이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데에는 하란사의 영향이 컸다고 평가했다.실패로 끝난 파리강화회의 밀사 파견 계획은 독립운동가 하란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후세대가 그를 외면해 온 이유로 꼽힌다. 고종은 그가 유학 당시 의친왕과 웨슬리안대를 함께 다닌 인연을 알고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밀사로 선발했다. 자금으로 쓰라며 궁중 패물까지 손수 쥐어 줬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계획은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후 하란사는 그해 4월 중국 베이징에서 한 교민의 환영 만찬에 참석했다가 음식을 먹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는 장례식 참석 선교사의 증언,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던 배정자가 살해했다는 이야기 등 여러 독살설이 전해질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하란사가 무장투쟁을 하지 않았고, 뚜렷한 족적이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라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략〉〈읽기 자료 2〉안중근 의사와 어머니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일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식민지회를 주도한 원흉으로 꼽히는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초대 내각총리 대신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일본 관헌에 넘겨진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직접 지은 수의와 함께 편지 한통을 보냈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네가 늙은 어미 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의연히 목숨을 버리거라. 너의 목숨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다.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너의 의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리.편지글을 본 일본인조차 시모시자(是母是子)라는 표현으로 이들을 칭송했다고 한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일본 현병들이 몰려와 자식교육을 잘못시켜 두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났다고 윽박질렀을 때도 두려움이나 주저함은 없었다. 조마리아 여사는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 된 의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아들을 따라 죽을 따름이다며 당당히 항변했다고 한다.본명은 조성녀로 천주교 세례명을 쓰던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처형 후에도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면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황해도 해주의 덕망 있는 부잣집 현감의 며느리이자 진사 태훈의 아내였던 그는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1926년에는 직접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창립총회에서 안창호, 조상섭 등과 함께 정위원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아들을 먼저 보내는 아픔 속에서도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독립운동가 이길 자처한 의연함과 강인함에 숙연해지는 2월이다.〈출처 : 전남일보 2016년 2월 15일〉〈읽기 자료 3〉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 임명장 복원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였던 권기옥(1901~1988) 애국지사의 활동을 입증하는 주요 기록물들이 복원됐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2일 권 지사가 중국 항공학교에서 받았던 필업증서(졸업장)와 중국 국민정부군 공군 임명장, 한국 국군 수첩 등 관련 기록물 7건(24매)을 복원했다고 밝혔다.권 지사는 독립운동과 한국 공군 창설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나 숭의여고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평남도청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던 192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항저우에서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여학교를 졸업한 건 지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 4월 중국 윈난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다. 1925년 2월 졸업하면서 한국여성으로는 첫 비행사가 됐다.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을 품었던 권 지사는 1926년부터 10여 년간 중국 공군으로 활약하면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7000여 시간을 비행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충칭에 있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임명됐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오자 한국 애국부인회를 재건했다. 1945년 3월엔 한국광복군 비행대 편성과 공습 작전 계획을 임시정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면서 실행하지 못했다.권 지사는 1948년 귀국 후 국방위 전문위원을 맡아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권 지사의 남편은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이상정이다.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이다.〈출처 : 조선일보 2016. 2. 3.〉■ 생각 열기기본활동 1) 〈읽기자료 1〉을 읽고, 하란사가 이화학당 입학을 거부당한 이유를 찾아 쓰시오.기본활동 2) 〈읽기자료 1〉을 읽고 이문회에 대해 설명하시오.기본활동 3) 〈읽기자료 2〉를 읽고,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이유를 찾아 쓰시오.기본활동 4) 〈읽기자료 2〉를 읽고, 조마리아 여사의 독립운동 활동 내용을 찾아 쓰시오.기본활동 5) 〈읽기자료 3〉을 읽고, 복원된 권기옥 지사의 애국활동 입증 자료를 찾아 쓰시오.■ 심화활동△ 〈읽기 자료2〉에서 안중근과 조마리아를 시모시자(是母是子)라고 표현한 이유를 쓰고, 일본인들이 이를 높이 평가한 까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200자 내외로 서술해보자.△ 역사는 영웅만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역사 속에 기억되는 인물들은 극적인 삶을 살다간 걸출한 영웅호걸이 대다수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수많은 이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애국심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애국심을 보인 다수 민중은 역사에 기록될 수 없다. 알 수 없고, 알려질 수 없는 이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200자 내외로 서술해보자.■ 생각 더하기△ 세계는 점차 국가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과거 국가는 자신이 선택하기보다는 숙명적인 선택받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다문화 사회, 글로벌 사회가 되면서 이제 국가는 언제라도 선택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때에 애국심을 강조하고, 호국보훈 의식을 강화해야한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각 영역에서 국경이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국가를 강조하는 애국정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400자 내외로 정리하시오.△ 애국자는 개인의 삶만 놓고 봤을 때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한 삶을 산 경우가 많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시킨 애국지사를 그래서 우리는 존경하고, 기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의 삶은 공동체 속에 파편화되기보다 개개인의 권리를 찾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개인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정의실현 혹은 정의구현이라는 가치 갈등 사이의 답은 고정불변의 것일까?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400자 내외로 서술하시오.■ 생각키우기△ 호국보훈 기념일■ 참고자료△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정운현 지음/ 인문서원/ 2016.3.대갓집 마님에서 신여성까지, 일제와 맞서 싸운 24인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이 책은 유관순 열사 이외에 수많은 여성이 남성 못지않게 헌신적으로 평생을 바쳐 투쟁했음을 일깨워준다. 신채호 선생의 아내였던 박자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엘리트 신여성 출신 항일투사 김마리아 등 24명의 일대기가 담겼다.△ 동주개요 : 드라마, 한국, 110분, 2016.02.17 개봉감독 : 이준익출연 : 강하늘(윤동주) 박정민(송몽규) 김인우(고등형사)

  • 교육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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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03 23:02

술 마시고 여학생 볼 깨문 남교사

전북지역 모 고등학교 교사가 여학생의 볼을 깨무는 등 수시로 학생들을 성추행성희롱 한 사실이 전북학생인권교육센터 조사 결과 드러났다. 또 도내 한 초등학교 교사는 학생들이 가져온 세월호 리본을 보고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까지 추모할 필요가 없다며 리본을 달지 못하도록 해 논란을 일으켰다.전북교육청 학생인권교육센터는 학생인권심의위원회 심의를 통해 지난해 11월부터 올 5월까지 학생인권 침해로 결정한 사례를 1일 공개했다. 해당 학교와 당사자는 익명으로 처리했다.학생인권교육센터에 따르면 도내 A고교 B교사(남성)는 지난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테니스채 등으로 학생 체벌을 일삼고, 학생들의 음주사실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휴대전화를 강제로 열어보기도 했다. B교사는 또 흡연학생들을 파악한다며 학생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제 소변검사를 하기도 했다.게다가 평소 학생들에게 자주 욕설을 퍼붓고, 치마 입은 여학생을 보고는 강당에서 모두의 눈에 불편하다. 앞으로 치마입지 마라. 바지 살 돈 없느냐등 수치심과 모욕감을 주는 막말도 했다.특히 2014년 67월께에는 술을 마신 상태로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여학생을 학생부실로 불러내 1대 1 상담을 하면서 학생의 얼굴을 깨물어 자국을 내고, 두팔로 끌어안은 것으로 조사됐다. B교사는 여학생이 잘못해서 학생부실에 불려오면 뽀뽀하면 봐주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으며 운동장을 걷는 여학생을 뒤에서 껴안기도 했다.또 체육시간, 체육복 안에 교복을 입었는지 검사한다며 여학생들의 체육복 상의 지퍼를 내려 확인하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강은옥 전북학생인권교육센터장(인권옹호관)은 음주상태에서 여학생의 볼을 깨문 B교사의 행위는 성희롱의 범주를 넘어 성추행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면서 해당 교사에 대해서는 교육감에게 형사고발을 권고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4년 8월 전북학생인권교육센터 개소 이후 특정 교사에 대한 고발을 교육감에게 권고한 것은 이번이 첫 사례다.이에 대해 해당 학교측에서는 학생인권심의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며 항변했다.이 학교 관계자는 학생 선도과정에서 해당 교사의 체벌 사실은 인정하지만 성추행 부분은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내용이 적지 않다면서 학부모회와 학교운영위원회, 그리고 연루된 학생의 부모들이 해당 교사를 위해 올초 학생인권교육센터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도내 C초등학교 6학년 담임 D교사는 지난 4월 학생들이 가져온 세월호 리본을 보고 나라를 구하려고 돌아가신 군인들은 추모하지 않으면서 2년이 지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까지 추모할 필요가 없다며 리본을 달지 못하도록 했다. D교사는 또 학생들의 생활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3일 동안 쉬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학생인권심의위원회는 D교사가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와 휴식권을 침해했다며 신분상의 처분을 교육감에게 권고했다.

  • 교육일반
  • 김종표
  • 2016.06.02 23:02

"소규모 교육지원청 통폐합 반대"

교육부가 학생수 감소 추세에 따라 관할 학생 수가 3000명 미만인 소규모 교육지원청의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전북교육청이 이에 대한 반대입장을 명확히 밝혔다.교육부가 1일 발표한 소규모 교육지원청 조직 효율화 계획에 따르면 우선 인구 3만명, 학생수 3000명 미만인 교육지원청은 과를 설치할 수 없도록 법령을 개정해 현행 2개과에서 사실상 1개과 수준으로 조직을 축소할 계획이다. 이같은 법령의 규정이 유예기간을 거쳐 오는 2019년부터 시행되면 해당 교육지원청은 인력이 크게 줄고 교육장의 위상도 낮아지게 된다.전북지역에서 인구 3만명 미만, 또는 학생수 3000명 미만에 해당되는 지역은 진안과 무주장수임실순창 등 5곳이다. 이들 5곳의 학생수는 약 2200~2800 명에 이른다.전국적으로 이같은 기준에 해당하는 교육지원청은 총 25곳인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부는 이들 교육지원청이 자율적으로 통폐합을 추진할 경우 총액인건비를 현재 인원 기준으로 4년간 지원하고 특별교부금도 지원할 계획이다. 또 교육지원청이 폐지되는 지역에는 가칭 교육지원센터를 설치해 학교 현장을 지원할 방침이다.이 같은 방침에 대해 전북교육청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전북교육청 관계자는 소규모 교육지원청을 통폐합 할 경우 교육행정에 대한 지원이 원활하지 않아 일선 학교에 불편을 줄 수 있고 지역의 공공기관이 없어지는 데 따른 주민들의 반발도 예상된다면서 설령 통폐합을 추진한다 해도 통합 교육지원청을 어느 지역에 둘 것인가를 놓고 주민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교육일반
  • 김종표
  • 2016.06.02 23:02

김승환 교육감 "절차 진행하는데도…교육부 고발권 남용"

교육부가 미복귀 전교조 전임자를 직권면직하라는 직무이행명령을 제때 따르지 않은 교육감들을 직무유기 혐의로 지난 25일 검찰에 고발한 가운데 김승환 전북교육감이 고발권 남용이라며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현재 교육청에서 해당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데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앞서 교육부는 지난 1월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이 정당하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오자 노조 전임자들에 대해 학교 복귀를 명령한데 이어, 미복귀 전임자들에 대해서는 인사권자인 교육감이 직권면직하라고 각 시도교육청에 지시했다.교육부의 고발 대상은 전국 17개 교육청 가운데 전교조 전임자에 대한 직권면직 절차를 완료하지 않은 서울과 충남, 경남, 충북, 부산, 강원, 전북, 광주 등 8곳의 교육감이다.이에 대해 김승환 전북교육감은 30일 확대간부회의에서 직무유기는 직무를 의식적으로 포기하거나 방임했을 때 성립되며, 직무를 계속 진행하고 있으면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그런데도 교육감들을 고발한 교육부가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전북교육청은 지난 19일 징계위원회를 개최한데 이어 조만간 인사위원회를 열고 미복귀 전교조 전임자에 대한 직권면직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 교육일반
  • 김종표
  • 2016.05.31 23:02

전북대, 우간다 농생명산업 개발 이끈다

전북대가 한국과 우간다의 농생명산업 분야 국제 협력사업을 주도한다.전북대는 우간다를 방문 중인 이남호 총장이 농축산 분야 전문인력 양성 지원과 함께 수출 주도형 고부가가치 농축산 산업단지 조성사업을 공식 제안했다고 30일 밝혔다.이 총장은 지난 29일(현지 시각)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 열린 한-우간다 비즈니스 포럼에서 우간다 수출 주도형 농축산 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제안했다. 우간다에 생산과 가공유통이 결합된 한국형 6차 산업단지를 조성, 농가 소득향상과 고용창출을 유도하고 농업 전문인력을 양성하자는 취지다.또 30일에는 동아프리카 최고 대학으로 꼽히는 우간다 국립 마케레레대학과 협약을 체결, 2017년부터 매년 20여명의 축산수의대 졸업생들을 전북대로 초청해 농축산 분야 산학연계형 석사를 양성하기로 했다.대학 측에 따르면 이번 포럼에서 이 총장은 우간다와의 농생명 산업 협력의 당위성과 추진방향, 기대효과 등을 밝혀 우간다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특히 30일 오전에는 양국 대통령과 이남호 전북대 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나라가 지원하여 설립된 우간다 농업지도연수원 개소식이 현지에서 열렸다. 이에 앞서 전북대는 이달 초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공모한 우간다 농업지도연수원(NFLC) 운영체계 구축사업에 선정됐다. 이에 따라 전북대는 우간다 농산업 발전을 이끌 농업 전문인력 양성에 적극 나설 예정이다.이와 함께 전북대는 우유 생산량이 월등히 많은 우리 나라 젖소를 우간다에 공급하는 사업을 마케레레대학과 협력해 추진하고 있다.이남호 총장은 이번 협력 사업은 개발도상국에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줘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며 수출 주도형 농산업단지 조성 등 농업 협력을 통해 양국 우호관계가 보다 단단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대학
  • 김종표
  • 2016.05.31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