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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춘 거울에 비친 은발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60세까지만 해도 흰머리가 서릿발 같아 감추고만 싶었는데 고희를 넘긴 지금은 은발이 인생의 계급장 같아 빛나 보인다. 고희란 두보의 곡강시에서 비롯된 말로 옛날부터 70세까지 살기가 드문 일이라는 뜻에다. 두보가 활동하던 1200년 전에는 70세면 오래 산 나이지만 지금은 평균 수명에도 훨씬 못 미치는 나이다. 그래도 70이 넘으면 달마다 늙는다고 한다. 갈 길이 그리 멀지 않은 나이다. 고희는 인생 4계절 중 가을이다. 해 질 녘의 저녁노을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잎과 비교된다. 가을 산에 올라 일렁이는 황금들판을 바라보면 이른 봄부터 농부들이 씨 뿌리고 가꾼 땀의 결실들이 풍요롭다. 가을은 수확의 기쁨도 크지만 왠지 마음 한편이 허전해지는 계절이다. 가을밤에는 유난히 구슬프게 우는 풀벌레 소리, 귀뚜라미 울음소리, 가랑잎 구르는 소리들이 가슴을 파고들며 옛 추억을 떠 올리게 한다. 그래서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며 홀로 사는 사람들의 옆구리를 더욱 시리게 하는 계절이다. 붉게 물든 가을의 저녁노을은 한낮의 태양보다 더 뜨겁게 이글거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에 묻힐 것을 생각하면 허망하다. 아름답게 물든 단풍도 머지않아 나무와 작별을 하고 뿌리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가을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단풍잎들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봄부터 같이 지내던 어미나무와 이별의 아쉬움이 있을 법한데 아쉬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이미 이별의 약속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즐거운 파티에라도 가려는 모습으로 곱게 차려입고 소슬한 가을바람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며 작별한다. 그간 꼼짝 못하고 한곳에서 매달려 지낸 한을 풀려는 듯 사방으로 너울너울 춤을 추며 유유자적 한다. 낙엽의 모습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방랑자를 연상케 한다. 고추잠자리와 경쟁이라도 하듯 공중제비를 돌다가 어디론가 가버리는 녀석들도 있다.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자동차기 범람하는 도로 위를 뒹구는 처량한 녀석들도 있다. 얌전한 새색시마냥 한눈도 팔지 않고 사뿐히 뿌리로 내려앉아 효심을 다하려는 듯 알몸이 된 나무의 뿌리를 감싸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다. 낙엽들이 바람에 날려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아도 제 뿌리에 내려앉은 낙엽들이 참 많다. 그래서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 했나 보다. 계절마다 낙엽과 나이 들어가는 내 인생을 동일시하며 때로는 울적해 한다. 하지만 시들어 떨어지는 낙엽의 몸짓은 얼마나 고맙고 성스러운 것인가. 그 몸짓을 생의 소멸로만 읽어온 내 사색이야말로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낙엽은 봄과 여름엔 푸르름과 녹음으로 산에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린다. 가을이면 노랑, 빨강으로 멋진 수를 놓기도 한다. 그리고 뿌리에 내려앉은 낙엽들은 뿌리를 감싸주고, 알몸으로 엄동설한을 외롭게 보내는 나무들에게 따뜻한 이불이 되어 준다. 또한 내년 봄이면 새싹을 틔우는 데 필요한 영양을 공급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낙엽이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찬사를 보낸다. 어린 시절에는 곱게 물든 단풍잎을 책갈피에 끼워 두었다가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넣어 보내기도 하고 창문을 바를 때 같이 붙여 놓았던 생각이 난다. 나도 낙엽처럼 살고 싶다. 멋있고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며 살고 싶다. ------------------------------------- *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머슴들에게 영혼을〉이 있다. 현재 대한문학작가회, 영호남수필, 전북수필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철규 수필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가을을 보내는 것이 서러워서인지, 아니면 살바람에 폭설이 쏟아질 겨울이 다가옴을 두려워해서인지 직지사 일주문부터 대웅전 앞까지의 도로는 홍엽으로 단장한 실크로드다. 비에 젖은 홍엽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차마 밟혀 상처를 입지 않을까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듯이 몇 번이고 발밑을 보았다. 대웅전 부처님께 참배를 하고 나와 보니 비는 멈추고 화사한 오색단풍은 손짓을 하며 기념사진을 찍으라는 신호를 계속 보낸다. 마침 군산예술촌 동아리 문인 일행들과 함께 문학기행을 왔기에 합동기념촬영이 필요해 저마다 멋진 포즈로 몇 컷했다. 직지사 경내 어느 곳이든 가나는 사람들은 홍엽 꽃 속의 주인공들이다. 마치 음력 10월 초 하룻날이어서 절간의 고요함을 깨는 스님의 법문소리와 목탁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메아리 지고 있다. 숙연함 마저 감돌게 하는 침묵의 고요 속에 청아하게 울려 퍼지며 중생들을 일깨우는 소리가 백팔 번뇌 고깔모자를 쓰고 지나간다. 30여명의 일행은 끼리끼리 기념사진을 찍으며 자연과 어우러진 진풍경의 낙엽의 화두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사방에 둘러싸인 산은 구름의 자태로 장식되어 동양화 한 폭이다. 특히 박물관 옆길에 쏟아진 낙엽은 어느 소녀가 제 무게에 겨워 스스로 몸을 놓고 한없이 가벼움으로 세월에 날리는 파편을 주우려는 모습에 발걸음이 멈춘다. 홍엽의 양탄자를 걸으면서 흰 구름이 산자락을 휘어감은 모습에 취해 비를 멈춰준 하늘을 보느라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깜빡했다. 뒤늦은 달음박질은 약속장소인 일주문 앞에서 모두를 만날 수 있었다. 직지사에 인접해있는 백수 정완영 문학관을 찾았다. 우리나라 시조시학에 권위자중의 한사람으로 자연과 아름다운 삶을 노래한 백수의 <조국>시를 새삼스레 바라보며 마지막 소절인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를 되새겼다. 97년이란 긴 인생여정에서 생전인 2008년 국비, 도비, 시비 등 22억여 원으로 백수문학관을 세웠다는 설명에 아연했다. 왜냐하면 군산의 채만식문학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수문학관과 이웃한 몽향 최석채 선생 유적비와 세계 언론자유영웅 50인 기념비를 보았다. 몽향 최석채 선생은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주필,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의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세론을 대변하고 역사를 증언했다. 우리 언론사에 크게 새겨질 정론의 대 논객이었고, 직필의 참 언론인이었다. 같은 언론인 출신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비문을 새겨 읽으며 매주 한 차례 실리는 그의 칼럼은 서슬 퍼렇던 독재정부에서 한줄기 소나기였고, 핍박받는 자들의 위안이자 피난처였다는 업적에 고개를 숙였다. 세상이 잠시 홍엽으로 장엄하다. 홍엽들이 마지막 떠나가는 길 위에서 몸 버리는 저들 중에 어느 하나 생애에서 목마른 사랑을 이룬 자 있었을까? 저들만의 그리움이 안타깝게 쌓여가고 있다. 올가을의 동아리문학기행은 내 마음이 오색중 하나인 홍엽에 젖은 까닭을 묻고 있다. * 김철규 수필가는 전북일보 편집부국장과 논설위원을 거쳐 전라북도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한국문인협회 군산지부장과 새군산신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이숙자 수필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완주군 봉동읍 신봉암리 고향마을을 잊은 적이 없다. 마을 뒤쪽으로 봉실산이 우뚝 솟아있고 그 양쪽으로 활짝 편 매의 날개처럼 산줄기가 펼쳐져 있다. 바로 이 봉실메산 줄기가 동네를 보호한다고 한다. 정상의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농사철에 가뭄이 들면 동네어른들이 그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옥녀의 가랑이 사이로 오줌줄기 같은 물줄기가 가득 흐르기를 비는 것이다 마을 어귀에는 힘센 장사가 갖다 놓았다는 크고 검푸른 바위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동네를 수호하는 그 신성한 바위의 이름은 바우쟁이다. 신봉암리는 봉황이 알을 품은 형국인 명당이라 그런지 시골의 자그마한 동네에서 면장이 셋이나 났고 출향한 여섯 명의 목회자가 활동을 하고 있다. 조그만 산동네지만 별일들이 많다. 연애당 솔밭이라고 하는 곳에서 겨울이면 몇 쌍의 부부가 탄생하곤 했으니 말이다. 결혼식장이 없어 마을 처녀들이 결혼식장을 꾸미곤 했다. 색종이테이프를 사다가 솜씨를 부려 사철나무에 꽃처럼 꽂아서 식장을 마련했다. 시골마을에서의 결혼식은 곧 마을의 축제며 잔치이고 놀이였다. 워낙 빈궁한 시절이라 혼례 집의 잔치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너나없이 잔치의 주인공처럼 즐거워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나는 마을부녀회장을 5년이나 맡았다. 그때 우리마을은 120호로 이웃 간에 꽤 다정하게 지냈다. 동네 어른들은 마을길을 넓히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하느라 힘을 합쳤다. 가난의 배고픔을 눈물과 푸념을 섞어 나누며 서로 이해하고 살았다. 정월 초엿샛날엔 당산제를 지냈다.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언젠가부터 연례행사로 치러졌다. 마을의 재앙을 막고 가정마다 복되고 기쁜 일을 축원하며 일년 농사의 풍년을 소원하는 기복행사였다. 당산제를 열기 전에는 어떠한 살생도 금하였으며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냉수욕을 했다. 그리고 고깔을 쓰고 풍물소리에 맞춰 얼쑤덜쑤 춤을 추며 시멘트종이에 돼지머리를 근사하게 그려 깃발처럼 매단 장대를 앞세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 할머니들은 고쟁이 허리춤을 양손으로 벌려 배뿔뚝이마냥 몸을 흔들흔들하며 춤을 추었다. 아저씨들은 얼굴에 숯검댕이칠을 하고 다리를 들썩거리며 돌아다녔다. 마을의 액을 몰아내는 몸짓이었다. 그 춤의 행렬은 옹달샘에서 시작하여 마을의 모정과 우물, 공동변소까지 두루 돌아 바우쟁이의 바위장승에게까지 제사를 지냈다. 남녀노소 어우러져 경건한 맘으로 비손을 하고 함께 나눠먹는 신성한 축제였다. 동네어른들이 비록 배우지 못하고 가난했지만 착한 심성이 마을을 포근하고 그립게 만들었다. 해마다 새해는 오건만, 나는 추억으로 풍물을 치는 소리를 듣고 신명나게 춤을 춘다. 이미 귀천하신 어른들 .그분들은 생활의 고난과 고통을 신에게 맡기고 오직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할 뿐으로 살았을 것이다. 개인욕심보다는 그야말로 이웃사촌과 동고동락하는 화합과 우애의 정신으로 살았던 것 같다. 비록 궁핍했지만 나눌 줄 알았던 사람들. 서로서로 챙겨주며 도왔던 사람들. 초가삼간이나 오두막집의 산골마을이 정말 그립다. 산자락에 나락이 누렇게 익어가는 계절에 불현듯 친정나들이를 하고 싶다. * 이숙자 수필가는 <지구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할동하고 있다. 수필집 <늦은 햇살이 아름답다>가 있으며 현재는 시낭송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박순희 수필가 몇 달 전 여름이 가기 전, 남덕유산을 다녀왔다. 신 기슭의 야생화와 눈 맞추며 사진도 찍고 쉬엄쉬엄 세월아 가거라 해찰하며 오감을 즐겼다. 비단결 같은 햇살이 내려앉은 능선위로 여린 초목의 숨소리가 가빠진다. 갈맷빛 치마 주름의 능선에는 얇은 사(絲) 하얀 구름이 바람결 따라 가렸다 들쳤다 유혹하는 풍광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전망이 탁 트인 넓은 시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에 맞닿은 높은 봉우리와 깊숙이 내려앉은 계곡에 여기는 햇살이, 저 골짝엔 수묵화 한 점 덩그러니 내건 오솔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아련한 마을들이 정겹게 엎드려있다. 인생길과도 같은 산길! 산길을 걸으면 비단길만 있는 게 아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면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난코스도 자주 만난다.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바로 가는 길은 없다. 누구나 바닥에서부터 오르는 법이다. 때로는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깊은 수풀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처음에는 어느 골짜기나 다 낯설다. 아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세월의 켜가 온몸에 화인처럼 남아있다. 마디마디 삭풍과 타는 가뭄을 견딘 상흔으로 점철된 몸피가 애달프다. 길을 가던 나는 오한에 떨고 있는 노송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까맣게 옹이 뽑힌 그 아득한 시간의 틈새로 새떼들이 보이고 바람 부는 날이면 낡은 관악기 소리가 들리는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노송, 저문 날 꽃들의 유배가 하늘 길에 닿아있는 천년 서린 한에 검버섯 슬은 노송 앞에서 나는 문득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쭉쭉 벋은 소나무는 대들보 감으로 이미 뽑혀 갔지만 등이 굽은 나무는 땔감으로밖에 쓸모가 없어 아직도 남아있는 노송을 보며 조용히 귓속말을 전했다.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도 로키산맥의 3천 미터 수목한계선에서 자란나무로 만든단다. 모진 설한풍에 굽은 허리를 펼 날 없이 상처투성이로 박힌 옹이가 천상의 공명으로 맑은소리를 낸단다. 그때까지는 이 산을 지키며 기다려라. 사물의 정의는 생활과 문화의 트렌드에 따라 다르게 해석 된다. 먹고살기 급급했던 시대에는 꽃이나 분재에 눈 돌릴 새가 없었지만 삶의 질이 향상되어 집집마다 정원을 가꾸고 아파트마다 화분 몇 개씩은 들여 놓을 수 있는 살림이 되었다. 따라서 굽은 나무의 가치와 위상이 역전됐다. 이제 굽은 나무는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터줏대감이 되었고 굽은 나무분재는 칙사 대접을 받는다. 굽은 나무에 대한 가치와 인식을 백팔십도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굽은 나무의 옹이에서 인생의 간난신고를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은퇴를 한 후 전원생활을 꿈꾼다. 꿈을 실현하기 전원주택을 짓고 농지를 매입하고 제2의 인생을 구가한다. 등 굽은 소나무로 비유되는 터줏대감들은 귀농 귀촌인의 친절한 멘토까지 자임한다.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등 굽은 소나무의 주가는 상승일로에 있고 등 굽은 소나무가 있는 한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고 청청하다. 산을 내려갈 때에는 뻣뻣하게 세우고 내려갈 수는 없다. 언제나 허리를 낮추어야 한다. 고개도 숙여야 한다.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산길에서 배운 진리를 되새기며 귀가를 했다. * 박순희 수필가는 <한국문인>으로 등단하였으며 행촌수필 문학상 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행촌수필 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수필집 <꽃으로 말한다>, <대체로 맑음>이 있다.
이용미 마이산은 내가 태어난 고장의 명산이면서 내 노년의 삶과 놀이터다. 결혼 전 짧은 직장생활 외엔 살림만 하던 주부가 21C들어 처음으로 시행한 문화관광해설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가는 삶을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있으랴. 마이산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과연 있었을런지. 조선 태조가 왕이 되기 전, 선인으로부터 왕권의 상징인 금자(金尺)를 받는 꿈을 꾸는데 그곳이 마이산으로 전해진다. 당시 고려 장수이던 이성계는 그 꿈을 꾼 얼마 뒤 남원 운봉까지 쳐들어온 왜군을 크게 이긴 후 개선 길에 특이한 봉우리를 만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꿈속에서 받았던 금자를 뭉텅이로 묶어 놓은 것 같아 속금산(束金山-금자를 묶어놓은 산)이라 명하고 돌아간 12년 뒤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이후 결코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마이산을 형상화한 일월오봉도를 항상 용상 뒤에 두어 든든한 울타리로 왕을 지키는 왕의 상징물이 되었다는 등 역사와 야사, 전설과 설화가 어우러진 갖가지 이야기 속에는 청실배나무도 함께한다. 청실배나무 이성계 고려 말 장수 시절 시간만 나면 전국 명산을 돌며 기도를 했는데 마이산에도 들러 기도의 증표로 심었다는 돌배나무 일종인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다. 은수사(銀水寺) 배나무 옆에는 사찰명의 유래가 되는 맑은 우물이 있다. 그 우물 뒤로 수마이봉이 위용을 자랑하고 그 바로 아래는 신라 시대부터 나라에서 제를 올리던 제사 터로 지금까지도 매년 군민의 날 전날 산신제를 올리고 있는 신성한 자리다. 그 아래 우물과 그 옆 배나무라면 옛이야기 속 풍경이 떠오르고 배나무의 장수(長壽) 이유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런 청실배나무와 나와의 인연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엮은 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전국대회 수상이다. 상금과 함께 자신감과 자부심 그리고 열망 등 내게 참 많은 것이 주어졌다. 사오정, 오륙도라는 빠른 정년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는 신조어가 떠돈 지 오래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 세대를 넘어 집 장만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해 오포 세대라는 젊은이들의 실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정년을 하고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로 아직은 더 일하고 싶은 나이 많은 젊은이가 주위에는 너무 많다. 남편도 그중 한 사람이다. 35년 직장생활이 즐겁기만 했을 리 없는데 퇴직 후 내 출근길을 도우며 정류장에서 부러운 듯 배웅하는 모습이 짠할 때가 많다. 내 하는 일과 일터가 그래서 더 고맙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남과 소통은 삶의 활력이 되면서 걷는 그 길은 바로 자연스러운 내 운동장이 된다. 엄니 어디 가요?/속꼼산(마이산)에/왜요?/니(너) 잘되라고 빌러 말을 아끼며 바쁘게 집을 나서던 어머니는 나들이 차림에 쌀자루였겠지, 작은 보퉁이 하나 머리에 이고 계셨다. 가지각색으로 피어나던 꽃들 이울고 나뭇잎 차츰 무성해지는 사월 초파일이면 연례행사로 이어지던 어머니의 마이산 행이었을 텐데. 칠십이 멀지 않은 내가 아직도 건강히 일과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이 축복과 고마움에 예닐곱 살 때쯤이었을 그날의 짧은 대화 속 정경을 자주 떠올린다. 마이산에 다녀온 그 날 밤 어머니 꿈속에서 날 위한 목자(木尺) 하나 받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모자라면 채우려 노력하고 넘치면 덜어내는 여유, 마이산은 그런 마음의 여유로 꿈을 꾸며 사랑을 생각하는 이야기 동산이다. 거기에 각자의 사랑 이야기 한 자락 넓게 펼치거나 걸쳐놓아도 탓하거나 흉보는 이 없는 너르고 편안한 나의 놀이터다. * 이용미 수필가는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하여 현재 마이산 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수필집 「그 사람」외 2권을 펴냈으며, 행촌수필문학상과 진안문학상을 수상했다.
홍성주 수필가 내 고향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이고 지금의 장류단지가 위치한 아미산의 남쪽 금과면 연화리이다. 나는 연화리에서 태어나 금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때부터 광주로 나가 생활하였고 경기도에서 공직생활을 하였기에 평생을 객지를 떠돌며 살아왔다. 누구나 그러하듯 고향은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곳이기에 나 역시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으며 학창시절 호오손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을 읽으면서 아미산을 연관시켜 생각해 오던 내 삶이었다. 왜냐하면 아미산 정상에는 암벽으로 된 커다란 봉우리가 자라잡고 있으면서 사람의 이마처럼 보이기에 아미산(峨嵋山)이라고 하였던 것 같고 그 봉우리에 있는 바위를 덤 바위라고 불러 왔기 때문이다. 덤 바위의 뜻은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덤으로 더 준다는 말이나 무덤에서의 덤과 같은 의미에서 많다크다넉넉하다의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닌가 하는 나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덤 바위의 본뜻은 덕(德)바위가 와전되어 덤 바위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따라서 덤 바위는 넉넉한 어머니의 품으로서 금과 면민과 순창군민을 껴안아 왔고 이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은 순하고도 순한 양으로서 강간, 강도, 살인폭력의 수배전단에 한번도 오르내리지 않는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고장이 된 것이리라. 내동리(내동리는 법정리고 연화리는 내동리에 속하면서 행정리로 떨어진 자연부락임)는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되어 마을 입구에 정부에서 세워놓은 범죄없는 마을이라는 간판이 방문객을 제일 먼저 맞이하고 있기도 하다. 누구나 갖고 있는 어렸을 때의 추억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미산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아미산 바로 아래 첫 마을에서 태어났고 아미산을 오르내리며 자랐기 때문이다. 아미산에는 산토끼는 물론 다람쥐, 노루, 오소리, 멧돼지 등의 산짐승과 각종 산새 및 갖가지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자연의 보고이자 섬진강 상류의 청정지역 보금자리다. 그러기에 정부에서는 전국 시범 전원주택단지로 지정하여 농어촌공사에서 추진 조성했다. 어렸을 때 산에 올라 가을이면 으름다래머루깨금 등을 따 먹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몇 년 전 늦은 봄에 아미산을 올라보니 울창한 소나무 밑에 피어난 철쭉꽃이 솔향과 함께 장관을 이루어 전국 어느곳과 겨누어도 절대 빠지지 않는 명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정상에 쉽게 오르도록 철사다리가 만들어져서 등산하기가 쉬워졌고 금과에서 아미산 중턱을 가로질러 순창 장류단지 옆의 강천산 입구까지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함으로서 세상 정말 좋아졌다는 것을 실감케 하기도 한다. 이제 금과에도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선 것을 보면 금과(金果)라고 하는 지명대로 금 열매가 맺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여 혼자 기뻐해 보기도 한다. 일지기 선친께서도 훈장을 하시면서 연동 팔경기라는 글을 남기셨지만 선친께서 팔경기에 쓰신 것처럼 내고향은 경관이 아주 빼어난 곳은 아니지만 사람살기에 아주 좋은 고장임에는 틀림없기에 내 고장을 사랑하는 것이다. 고향이 발전되기를 바라는 것은 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고 고향을 떠난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리라. 이름 그대로 순창군 금과면이 참으로 순박하고 금과실 같은 아름답고 값진 결실이 맺어지기를 거듭거듭 비는 마음일러니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진실로 나타나기를! △홍성주 수필가는 <문학춘추>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순창문인협회 지부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삶의 길목에서>, <휴당산방의 겨울 아침>, <영원 속의 기다림> 등이 있다.
이재숙 내 고향은 무주 안성면 금평리 궁대마을이다. 나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 궁대에서 태어났다. 다른 때 같으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동네 사람들 모여 삶은 옥수수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지만 그 해엔 완전히 세상이 달랐다. 지금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는 막내 작은할머니의 말씀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된다. 아야! 하늘엔 쌕쌕이가 날고 불빛만 보면 폭격을 하니께 호롱불을 요강 안에 켜놓고 네 에미가 널 낳았다. 미역국도 못 먹고 낳아 농게 딸인디, 어찌나 울어대던지, 그도 잉 너 땜에 네 애미가 살았어 밤에 덕유산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오면 젊은 여자보고 눈빛이 달라져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머리에 얹고 산속으로 데려가기도 할 때잉게, 이제 막 얼라를 낳은 산모라 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단다. 네 할미가 대신 보리쌀이랑 산으로 이어다 주었었지. 이렇게 말하는 게 대수롭지 않은 그 옛날 일이 실은 큰 변란과 슬픔의 이야기다. 밤에 보리쌀을 이어다 준 일로 빨갱이로 몰려 할머니는 둘째 아들을 잃었고, 밤엔 빨치산들에게 반역자로 몰려 아들 둘을 한꺼번에 잃었다. 많은 젊은이가 죽어 나갔고 휴전이 되자 아버지와 작은삼촌 두 명만 살아남았다. 궁대마을은 독특한 지형을 갖춘 동네다. 뒷산은 적당히 높아 땔감을 구하거나 산나물을 깨러 아낙들이 오르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앞산이라 불렀던 산은 뾰족하게 솟은 커다란 한 개의 봉우리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남자 상징의 앞산 때문에 우리 동네에는 남자아이들이 넘쳐났다 한다. 나도 아들 사형제에 외동딸이었고 아버지도 여자 형제가 없었고 할아버지도 4명의 남자 형제들만 있었다. 명실공히 삼대에 걸쳐 딸이 하나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나의 또 다른 이름은 양념딸이다. 지금은 사전 마을 옆으로 길이 넓게 나고 큰길에서 몇백 미터만 들어가면 궁대마을을 만날 수 있었지만, 예전에는 안성면 소재지로 나오려면 짱짱하게 10리를 걸어 금평리를 지나야 갈 수 있어 어린 나에겐 멀고 먼 길이었다. 찐 감자나 고구마를 손수건에 싸 들고 한없이 걸어야 했다. 유독 걷기 싫어하는 엄청 귀한 양념딸을 위해 아버지는 대처로 우리들을 내보내셨을 것이리라. 우리는 담력을 시험한다고 어둑해지면 앞산에 가려고 오랫동안 모의도 하고, 내기를 걸곤 했지만 나는 한 번도 아장터가 있는 곳은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장터에서 흘러오는 냇물은 너무도 깨끗하고 시원해서 여름엔 여자아이들도 목욕하곤 했다. 물론 서너 명 이상 모여서 말이다. 우리는 뻐꾸기 울음에도 깜짝 놀라 팬티만 입고 도망 오곤 했다. 지금은 칠현계곡 쪽에서 명천을 지나 우리 동네 뒤쪽으로 2차선 도로가 나 있다. 앞산에 살던 호랑이 부부는 덕유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양지바른 앞산 모퉁이에서 깊은 잠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대단한 교육열 덕분에 전주에 나와 공부할 수 있었다. 앞산의 정기인지 덕유산 치맛자락 끝, 그 바람 덕인지 우리 형제들은 잘 자랐고 일 년에 두어 번씩 안성 궁대 허물어지진 집터에 차들을 대고 동네 어른들을 찾아뵙고 성묘를 하곤 한다. 지금은 열댓 집에만 사람이 사는 궁대마을은 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조상님들이 나지막한 선산에서 지키고 계신다. 나는 어디서나 자랑스럽게 무주 안성사람이라고 말한다. 왼쪽 멀리 덕유산을 두어 따뜻한 그림자가 깊고 앞산의 봉우리는 힘이 넘쳐 자손들이 번성했다. 앞산을 싸고 흐르다 고인 작은 호수는 자비로움과 인정을 배우게 했다. ================================================================ △이재숙 수필가는 전주일보 신춘문예와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문입협회, 전북시인협회 등에서 활동 중이다. 열린시문학상, 국제해운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젖은 것들은 향기가 있다>를 냈다.
안관엽 나는 몇 년 전 쇠락해 가는 구도심에 서울의 아파트 가격 반의반 값도 안 되는 주택을 하나 구매했다. 비록 싼 가격이지만 제법 널찍한 화단을 조성하고 조그마한 텃밭도 만들어 푸성귀는 자급자족하고 있다. 그리고 마당에 자갈을 깔아 오솔길을 만들어 가끔 맨발로 지압운동도 하며 소일하고 있다. 작은 화단에는 상록수 몇 그루와 더불어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나무를 심었더니 보기도 그럴 싸 하다. 이전에는 공터로 비워두어 잡초만 무성하고 험상한 모습이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웃 사람들이나 지나는 사람들도 형형색색의 조화로운 꽃과 향기에 취해 가던 걸음을 멈춘다. 텃밭에 심어놓은 가지와 고추는 허튼 꽃을 피우는 법이 없으니 변변찮은 식탁에는 훌륭한 찬거리가 되고 있다. 특히 화학비료를 주지 않아 맛도 시장에서 파는 물건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오늘도 폭염에 구슬땀을 흘리며 폭염을 견디고 살아남은 꽃들과 채소를 돌보면서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눈다. 가을이 익어 가면서 기온이 내려가고 하늘이 맑아지니 꽃 색깔도 선명해지고 채소들의 잎새도 싱싱함이 더해진다. 올여름을 되돌아보면 지구 온난화로 인한 온도의 상승으로 기상 관측 사상 유례가 없는 더위가 몰려 왔다. 그런데 앞으로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벌써 내년이 걱정된다. 지구 온난화 주범 중에는 각종 공해 물질의 배출이 큰 요인이다. 그런데 우스갯소리 같지만, 미국 한 연구소에서 소들이 뀌는 방귀도 한 몫을 차지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소나 돼지의 방귀와 트림, 분뇨에서 나오는 메탄가스 때문인데,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23배나 강한 온실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 육식을 즐겨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육식을 하면 소 방귀 보다 훨씬 고약한 사람 방귀의 우려 때문이다. 아파트에 살면서 못하나 마음대로 박아보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 사는 곳은 큰소리로 부부싸움을 한들 누구 하나 간섭하는 이가 없다. 옆집 사는 사람들이 귀가 어두워진 노인들일까? 아니면 세상 풍파 다 겪었기에 모르는 척하는 걸까? 이 생각에 저 생각에 잠 못 이루며 상념을 풀었다 되감기를 몇 번 하는 날 밤은 방귀가 밀려나온다. 오늘도 어제 저녁 재종형님과 몇 잔 나눈 막걸리가 제대로 발효가 되었는지 방귀가 밀려나온다. 고가 아파트 가지고 종부세 내며 사는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면서도 중화작용을 하는 나무하나 풀 한 포기 심지 않았기 때문에 방귀를 뀔 자격도 없다. 하지만 나는 전원주택에 살면서 화단과 텃밭에 각종 상록수와 화초들을 많이 심은 사람으로서 방귀를 뀔 자격이 충분하다. 그래서 오늘은 시원스럽게 방귀를 뀌어 본다. 그러면 화단의 나무들이 내가 배출한 배기가스를 중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푸른 초장의 작은 초목들도 한몫 거들 것이다. 우리는 평생 건강과 행복과 사랑과 돈을 찾아 헤맨다. 하나를 성취해 정상에 올랐다 한들 또 다른 욕구와 고통이 생기며 생각대로 꾸준한 행복이 지속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원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속에 근심 걱정 응어리 모두 방귀로 배출하고 마음을 비운 채 항상 오늘을 축제처럼 살자. 여러분은 이런 방귀를 뀔 자격이 있다. ================================================================= △안관엽 씨는 소방공무원으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지금은 취미로 정원관리사와 공인중개사로 일하고 있다. 가끔 시간 나는 대로 글을 쓰고 있으며 올해 말 시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내 고향은 푸른 산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산 높고 물 맑은 청정지역 노적마을이다. 노적마을엔 산이 깊어 아침 해는 늦게 떠오르고 석양 노을도 늦게까지 머물러 있어 해가 질 무렵이면 적막감이 감도는 마을이다.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변산 지역에 위치한 노적마을은 변산에서 두 번째로 높고 덕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진 삼예봉(三藝峯) 줄기 노적봉 밑에 노적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좌측에는 거석천, 우측에는 청림천이 있어 좌우 두 냇물이 모이는 양수 합이라 예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산 가운데 마을로서 형국이 좁지만, 평원을 이뤄 땅이 비옥하고 논이 밭보다 많은 특이한 지형이라고 평하며 길지(吉地)라서 귀인이 난다고 했다. 명산은 인걸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이 마을에서 조선시대 때 11명의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었다. 문과 홍문관 교리 1명, 무과 1명, 진사 7명, 중추원 의관 1명, 금부도사 1명 등이다. 그중 밀양박씨와 전주이씨 댁에서 진사 3명이, 그 외 여덟 분은 모두 우리 고가(高家)집안의 선조다. 우리 마을 앞 한가운데 효죽(孝竹)거리가 있다. 예부터 과거에 급제하면 으레 나무로 용을 만들고 파란 물감을 칠하여 높은 대나무 끝에 매달아 놓고 과거 급제자들의 영광을 축하하는 풍속이 있었다. 효죽을 세웠던 그 길거리를 효죽거리라 부른다. 본인과 가문의 영광은 물론, 부안군과 호남지방, 나아가 전국적인 위상을 높인 쾌거라 할 수 있다. 효죽대로 뽑힌 그 대나무는 크고, 곧고, 높이 잘 자라서 우수한 효죽대로 한 역할을 맡았다. 수많은 대나무 중 우수한 장대로 뽑혔으니 그 대 역시 큰 영광을 얻었다. 조선시대에 세웠던 효죽거리의 효죽은 간데없고 지금은 그 유허지에 옛 선현의 발자취만 남아있다. 요즘 사회와 비교하면 과거급제는 고등고시 격이다. 한 명의 과거 급제자도 없는 마을이 많은데, 한 마을에서 11명이나 합격자가 나왔으니 희귀한 사례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지역은 오지여서 경제 사회적 문화가 미급한 환경이지만 많은 인사가 탄생한 점 그리고 위 선인들의 높은 학덕과 명성을 오래도록 기리고 후세에 길이 귀감이 되도록 하고자 그 옛날 효죽을 세웠던 거리였는데 요즈음은 조금 뜸하여 하루빨리 고향마을에 효죽 기념비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 고향 노적마을은 과거급제자가 많이 탄생한 만큼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은 마을이다. 50세대가 살았지만, 예의범절과 인심이 후하고 도둑이 없어 인근 마을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불행한 6.25사변을 겪는 동안 밤이면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와 주민의 재산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갔으며 내변산 주민 600여 세대가 모두 피난길에 나섰다. 이후 피눈물 젖은 피난살이를 하며 통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빨치산이 완전히 소탕되어 지역주민들은 복귀하라는 통보를 받는 순간 다시 광명을 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옛날 오지였던 지역이 변산반도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청정한 관광지를 찾는 탐방객들의 주목을 받는 명승지가 되었다. 영롱한 별빛과 은은한 달빛이 언제나 어둠까지도 밝혀주는 내 고향 노적리. 가을이 깊어가는 이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눈을 감으니 고향 동산에서 뛰놀던 내 유년의 추억이 영화의 스크린처럼 스쳐 간다. ============================================ △고재흠 수필가는 월간 문학공간으로 등단했다. 행촌수필문학회 회장과 한국신문학인협회 전북지회장을 역임했다. 수필집 <초록빛 추억>이 있다. 전북수필문학상과 부안예술상을 수상했다.
황춘택 새알같이 작은 공 하나가 내 앞에 굴러온다. 세 살 어린이가 부모 앞에 굴려 보내는 공처럼 귀엽고 애교스럽다. 얼른 손에 쥐어보면 차가운 듯하지만 금세 체온에 젖어 들어 부드럽다. 탁구장에는 똑딱똑딱 공치는 소리가 창가에 빗방울 소리처럼 들린다. 마치 그들의 놀이터 인양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며 자랑스럽게 구르고 있다. 탁구대에 튀어 오른 공이 탁구채에 맞아 빗살같이 달리고 공중 높이 올라가 떨어질 때는 목표 지점에 이른다. 기묘한 모습에 관중의 박수 소리가 진동한다. 또 공이 네트 위를 징검다리 건너가듯 튕기며 다른 곳으로 떨어질 때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잘 못 맞은 공이 엉뚱한 곳으로 달아나면 고개를 갸우뚱 한숨을 내쉬게 한다. 작은 탁구공이 무대의 주역으로 드라마를 엮어내고 있다. 탁구는 남녀노소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 좋다. 가족과 친구들 모임에 친목으로 할 수 있다. 탁구공이 손에 잡히면 탁구대에 힘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힘이 솟아오른다. 집에서 여유 시간이 있을 때는 가까운 노인복지관 탁구장으로 간다. 실내에 들어서면 오가는 탁구공이 운동하는 사람의 도구로 빛살처럼 날아다닌다.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리면 실수로 공이 천정으로 튕겨 나가서다. 타자는 그런 실수 없이 잘 치고 싶은 마음으로 쥐어진 탁구공을 마주 보며 소원을 빌어 본다. 탁구공아!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잘 좀 움직여다오. 말없이 부탁한다. 탁구공은 그 뜻에 따라준다는 약속을 하고 상대 코트 안으로 힘차게 달려간다. 빗살같이 넘어간 공으로 후련한 마음이다. 순간 넘어갔던 공이 이쪽으로 다시 잽싸게 넘어오니 아니, 이럴 수가! 탁구공에 속아준 내가 바보로 여겨진다. 귀엽게만 보이던 공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흔들 줄은 몰랐다. 탁구장에서 운동하고 차례를 기다릴 때는 탁구공의 움직임에 시선이 쏠린다. 모든 잡념은 물로 씻은 듯이 없어지고 즐거움만 남는다. 물총새가 냇물 속의 물고기를 순간에 챙겨 먹듯이 탁구채를 잽싸게 휘둘러 상대 코트에 떨어뜨리면 관중은 그 소리에 눈길을 끈다. 그때마다 탁구의 참 맛이 보이고 흥미롭다. 탁구장에서 터지는 웃음은 한 달 동안 웃을 수 있는 양만큼 짧은 시간에 웃어 준다고 할 수 있다. 웃음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할 때 매일 이렇게 웃음이 있어 얼마나 좋을까! TV를 볼 때나 친구 모임에 특별한 태도나 유머로 웃음을 만들어 주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지름 40㎜ 무게 2.7g의 작은 공이 관중 앞에서 사람과 사람의 우정을 자아낸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의 국교를 트이게 해 준 것도 탁구공의 외교 덕이었다. 평창올림픽에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해 남북화해의 길을 열어 준 역할도 했다. 작은 것이 큰일을 못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작은 나사못이 사닥다리를 받쳐주고, 다이너마이트 한 알이 바위산을 부수는 예와 같다. 손에 쥔 핸드폰이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소리를 끌어 드린다. 작은 것이 작동하여 세상을 변질시킨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평소 작은 일에 소홀하지 말고 지혜를 쏟아 가치를 추구하며 탁구공처럼 열심히 움직이며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남겨준다. 탁구공은 나의 친구요 애인 같다. 오래오래 부드럽게 같이 지내고 싶다. 운동경기가 끝나 공을 바구니에 담으려니 그동안 웃음과 즐거움을 안겨준 작은 공의 고마움을 품에 안겼다. ================================================================= △황춘택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대한문학작가회 이사, 행촌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영호남수필문학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이다.
안영 수필가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김제 궁지마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내 고향은 황금 물결이 출렁이는 맛과 멋의 고장이다. 동네 앞에는 활처럼 생긴 연못이 있고 이웃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쟁이처럼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사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버스도 다니지 않은 황톳길의 질퍽질퍽한 마을인데 중학교 다닐 적에야 환한 전기가 들어왔다. 마을에는 우물이 두 곳 있었는데 동네 어귀 윗 우물물을 먹는 사람들은 아들을 많이 낳고, 동네 끝자락의 아랫 우물물을 먹은 사람들은 딸을 많이 낳는다는 설이 있다. 우리 집은 맨 윗집인데 어머니는 매년 정월 초하룻날 첫닭이 울기 전 제일 먼저 일어나 샘물로 정화수를 떠놓고 빌고 빌었다. 일등을 양보하지 않으셨던 덕택에 지금의 우리들이 있다. 지금도 매년 칠석날이면 청년들이 우물을 청소하고 돼지를 잡아 참외와 수박 그리고 노란 옥수수 등과 함께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낸다. 또 하나 우리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백산서원이 있다. 1928년 3칸의 맞배지붕으로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으며 측면 벽이 용마루까지 삼각형으로 아주 잘 지어졌다. 우리가 숨바꼭질할 때마다 기대어 놀던 아름드리 기둥은 백두산에서 벌채한 나무로 지금은 나무 사이에 틈이 갈라져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2000년 6월 전라북도 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돼 이 또한 자랑거리다. 사당과 내외 삼문이 있고 강당은 무인과 무관들이 모여 강의를 하던 곳으로 5칸의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다. 매년 음력 2월이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지금은 김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백산서원은 모든 생활의 중심이었다. 동네 어르신들의 모임 장소, 아이들의 놀이터,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였다. 우리 집도 한때는 정원이 좋고 수목이 울창한 아주 멋진 집터였지만 팔순의 어머니가 혼자 사시기에 버거워 읍으로 이사를 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그 옛집을 잊을 수 없어 오빠가 다시 그 집을 사서 편리하게 구조 변경을 하니 어느 펜션 부럽지 않게 되었다. 내 고향에 백산서원이 우뚝 서 있는 한 모든 재앙을 막아줄 것이다. 최근 3년 동안 농촌 건강 장수마을로 지정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농촌소득사업과 건강복지사업을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으니 얼마나 청정한 곳인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내 고향 궁지마을은 백산서원을 중심으로 바로 맞은편에 근대에서 현대로 넘나드는 삶들이 숨을 쉬고 있는 새마을구판장이 있고 지금도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이 있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마을에 예부터 전해오는 모심는 소리, 논 메는 소리, 산야 소리, 집터 다지는 소리, 상엿소리 등 노동요 5곡 자료가 남아 있어 재현하고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오늘도 찬바람 서성이는 대숲의 백산서원은 흐트러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효부와 열녀가 많이 났다는 백산서원의 마당에서 보리밥에 우렁이 된장국을 끓여 쓱쓱 비벼 먹던 그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안영 수필가는 문예사조에서 수필로, 한국문학예술에서 시로 등단했다. 전주여성의쉼터 원장을 역임했고 전북문인협회, 가톨릭전북문우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내 안에 숨겨진 바다> 등이 있다.
김종필 동화작가 남녘에서부터 사람들 가슴에 꽃불을 싸지르며 올라온 벚꽃이 마침내 왕궁리 5층 석탑 앞에 도착하면 나의 봄도 시작된다. 봄볕의 나른함에 등을 기대고 까무룩 선잠이 들면 석탑 쪽에서 천 년 전 석공이 다가와 요즘 사는 게 어떠냐고 물어 온다. 7월 20일. 익산 문화재 야행은 출발부터 가마솥더위였다. 마지막 코스인 왕궁리 유적 전시실에서야 땀이 좀 식었다. 백제의 첨단 화장실과 왕궁 지붕의 연꽃무늬 수막새와 수부(首府)라고 찍힌 기와를 보았다. 수부는 수도라는 뜻인데 왕궁리가 백제의 수도였음을 보여주는 빼박(빼도 박도 못하는) 증좌란다. 검은 나무막대에 붙은 기생충 알에서 화장실을 유추해내는 고고학자의 혜안이 놀랍다. 사람은 사라져도 유물은 남는다. 동아시아 최대 사찰 미륵사를 세운 백제 무왕의 무소불위 권력도, 이름 모를 석공의 고된 숨소리도 이슬처럼 사라졌지만 수부(首府)가 새겨진 기와와 천 년을 버텨 온 석탑은 남아 있다. 밤에는 탑돌이 행사에 참여했다. 올해 뽑힌 서동과 선화공주를 따라 퍼포먼스를 하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조롱박으로 만든 소원 등에 촛불을 켜고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욕심과 이기심과 오만과 독선을 반성했다. 나는 이 년 전 큰 병을 앓았다. 배를 열고 간을 반쯤 잘라냈다. 병원에 누워 지낸 보름은 다시 경험하기 싫은 악몽이었다. 같은 병실을 쓰던 환우 중 어떤 이는 유언을 녹음했고, 또 어떤 이는 산속으로 가겠다며 한밤중에 허름한 봇짐을 싸기도 했다. 모두 잠에 들면 혼자 깨어 창밖을 바라보며 속절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고맙다 미안하다 소리를 되뇌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남은 삶을 걱정했다. 오늘 내가 쉬는 숨은 덤이다. 고맙다 미안하다 두 낱말만 화두로 삼고 살기로 수없이 다짐했는데 그 실천이 쉽지 않다. 매양 이 모양이다. 드디어 탑돌이가 시작됐다. 조명을 받은 5층 석탑은 신비롭고 장엄했으며 이 시간 우주의 중심은 나라는 듯 당당했다. 여름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천 년 전 석공이 늦은 밤까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우주에서는 어떤 별빛이 출발했을 것이고 나는 시방 그 별빛을 보고 있다. 별빛 속에서 정을 든 석공을 만난다. 그가 상처투성이의 투박한 손을 내민다. 사는 게 어떠냐고 오래 묵은 친구처럼 오늘도 묻는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는다. 돌을 어루만지며 평생을 살았지만 이름 석 자도 남기지 못했다며 석공이 털털하게 웃는다. 그래도 이렇게 분신이 밤마다 달빛, 별빛을 축복을 받으며 천년을 살았고 앞으로 천년도 끄떡없을 테니 이만하면 괜찮게 산 거 아니냐고 내게 묻는다. 울적하거나 좀 쉬고 싶다면 왕궁리 5층 석탑으로 가보라. 벚꽃 찬란한 봄날이든, 나락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날이든, 별빛 달빛 찬란한 깊은 밤이든. 언제나 그곳에 가면 괜찮게 한세상 살다 간 석공의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종필 동화작가는 문예사조 동화 부문 신인상과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땅아 땅아 우리 땅아>, <아빠와 삼겹살을>, <앙코르 왕국에서 날아온 나비> 등이 있다. 제1회 공무원문예대전 대통령상, 참교육문학상, 환경동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북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고삼곤 수필가 계화도 앞바다 북서풍 바람결에 파도 소리 들려오는 갯마을 삼간평에서 출생해 자라온 유소년 시절의 아련한 추억에 잠겨본다. 필자는 열세 명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눈만 뜨면 바닷물 들랑거리는 갯벌 위에서 뛰놀고 도깨비둠벙에서 물놀이를 즐기며 성장했다. 갯벌 바탕에는 갈게와 칡게, 농갈게, 배꼽조개, 꼬막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배고픈 시절 구멍 망둥어와 갈게를 잡아 지푸라기로 묶어 끓는 물에 익혀서 친구들과 맛있게 나눠 먹었던 그때 그 시절 죽마고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인생은 오면 가는 것이 철칙이던가!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 따라 벌써 여덟 명 친구들이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이 세상을 뒤로하고 말았다. 한반도의 지도를 바꾼 장엄한 새만금 탄생을 보지도 못한 채 먼 길 떠난 친구들이 마냥 안타깝고 그립다. 도랑물을 식수로 마시며 근근이 연명했던 그 시절이 회상될 때가 많다.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정든 벗들이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 놓고 멀리멀리 떠나갔다. 괴롭고 슬픈 지난날들을 추억할 때마다 눈시울이 적셔 오곤 한다. 갯벌 넓은 둔치에 지천으로 자생하는 붉은빛 나문재 풀 잎사귀를 구럭 망태기가 터지도록 뜯어다 삶아 된장 무침을 해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시래기 죽사발에 진절머리가 났다. 남의 집 품팔이도 했었다. 겨울철에는 바다오리를 왱이 그물과 차시, 올가미 등으로 잡아서 학비를 마련했고 봄부터 가을철까지는 참게, 풍천장어, 가물치 붕어 등 물고기를 잡아서 초중고교를 다녀야만 했다. 고교 3년 진학할 무렵 학생복 차림으로 공군 부사관을 지원 입대해 고향을 떠나 58년 동안 타관 객지 생활을 해왔으나 마음은 항상 내 고향 새만금 삼간평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1962년 봄 계화도 섬을 연결하는 간척지 개발 공사로 방조제가 축성된 공사 현장 근로자 33명이 각종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분들의 피땀 흘린 노력과 혼이 숨 쉬는 간척 농지 황금 들녘에서 품질 좋은 쌀이 생산되고 있다. 새만금, 착공 19년의 장구한 세월 따라 천신만고 끝에 부안에서 군산까지 33.3㎞ 세계 최대 해상 방조제와 450톤짜리 배수갑문 17개의 위용도 장관 거리이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새만금이여 이제 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비상하리라. 오대양 육대주 해양 물류 항으로 발돋움할 것이고 대형 선박 건조, 자동차 생산 수출 등의 아름다운 미항에는 위그선 프로펠러 소리와 더불어 특급열차가 달리며 크루즈 여객선 뱃고동 소리 울려 퍼지고 지구촌 관광객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올 것이다. 새만금 신항에 해상 레저타운이 완성되고, 칠산바다와 동지나 해역을 넘나드는 어선들이 자유롭게 입출항하면서 어획량을 많이 올릴 것이다. 매머드 호텔들이 속속 들어서고 초대형 타워가 세워져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관광 명소 한국판 두바이로 성장하리라 전망해 본다. 그 관망대에 올라서 보고 싶다. 또한 최첨단 기계화 수출산업단지와 중소도시 주거지가 완성되고, OCI 등 각종 기업체에서 수출 제품들이 해외로 선적돼 출향할 것이다. △고삼곤 수필가는 중국 연변대경찰대전북대 등 초빙강사,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변산호랑이>, <삶의 나루터에서>, <인생의 오솔길에서> 등이 있다.
▲ 박동수“여기에 발 빠지면 프라이부르크 사람하고 결혼한대요” 프라이부르크(Freiburg) 중심가를 걸으며 어떻게 시내에 실개천이 흐를까! 감탄하는 나에게 유학생이 프라이부르크의 속담을 들려준다. 나는 23년 전에 독일에 머물고 있을 때, 프라이부르크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 부부의 초청을 받아 그 도시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때 시내 구경을 하러 나갔다가 시내 여기저기를 흐르는 실개천을 봤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어느 도시에도 실개천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보는 실개천이 아주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감탄스럽기도 했다. 프라이부르크의 실개천은 14세기 때부터 가축에게 물을 주고 더위를 식히고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실개천은 총길이가 20㎞ 정도로 시내 전체를 흐른다. 그런 도시에서 오래 살다 보면 실개천에 발도 빠지고 좋은 사람도 만나서 결혼하게 될 것이다. 전주에도 한옥마을에 실개천이 있다. 6백 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 은행로에 500m 정도의 실개천이 있다. 나는 이 길에 나갈 때마다 실개천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옥마을의 중심거리 중 하나인 은행로는 주말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밀려다니고 길 양편에는 수많은 상점이 들어서 있다. 완전히 디즈니피케이션(disneyfication)이 돼버렸다. 닭꼬치, 핫도그, 찹쌀떡, 꽈배기를 파는 가게들, 초코파이를 파는 빵집들, 수많은 핑거 푸드(finger food) 가게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언제부터 전주의 대표 음식이 떡갈비였는가 할 정도로 떡갈비 집들이 많다. 거기에다가 젊은이들은 전동기를 타고 이 거리를 휘젓고 다닌다. 도대체 도시 전체가 국제슬로시티라는 전주의 한옥마을에서조차 우리는 느림을 누릴 수 없고,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라는 전주의 한옥마을에서조차 핑거 푸드와 인스턴트 음식이 넘쳐 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옥마을 은행로에 폭 50㎝ 정도의 화강암으로 만들어 놓은 500m 정도의 물길, 실개천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실개천은 겨울 한 철을 빼놓고는 늘 지하수를 끌어올린 물이 좔좔 흐른다. 독일의 환경수도, 실개천의 원류 프라이부르크에 비하면 너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실개천을 따라 걷다 보면 조금의 느림과 조금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한옥마을에는 느림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옥마을 전체에 실개천이 흘렀으면 좋겠다. 2~3㎞면 충분하다. 태조로, 은행로, 동문로, 천변동로, 경기전길, 향교길 등 한옥마을의 큰길을 모두 합쳐도 2~3㎞이기 때문에 그 길이만큼 실개천을 만들면 된다. 아니 아예, 프라이부르크처럼 전주시 전체에 실개천이 흐르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국제슬로시티와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 전주의 성격을 살리는 길이 기도할 것이다. 요새 전주시는 도시 열섬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서 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물론 도움이 될 것이다. 실개천도 나무만큼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주가 많은 사람에게 조금의 여유라도 가지고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실개천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괴테는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실개천을 따라 걸으면서 위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문화특별시를 지향하는 전주시가 진정한 국제슬로시티와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서는 프라이부르크처럼 시내 전체에 실개천이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 △박동수 수필가는 전주대 부총장과 전북수필문학회장을 역임했다.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수염을 깎지 않아서 좋은 날> 등 수필집 5권을 발간했다. 전라북도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 은종삼 아내가 냉동고에서 꺼내 준 얼음수박인데요. 36도 더위가 맛을 더해주네요. 카페의 몇천 원짜리 아이스크림 저리 가라네요. 창밖의 땡볕에 뭉게구름, 생명력 넘치는 진녹색 기린봉 바라보며 얼음수박 입안 가득 더위를 즐기고 있습니다. 같은 수박도 어느 때 먹느냐에 따라서 맛이 다르죠. 더위야 고맙다. 페친님들 미안합니다. 이상은 최근 먹음직스러운 얼음수박 사진과 함께 나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넘 좋습니다. 부럽네요. 무더위를 슬기롭게 건너가고 있으시군요. 등 페친들의 댓글이 달렸다. 한여름의 더위가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재난급 폭염이라고 한다. 8월 들어 40도를 오르내리자 기상관측 이래 111년 만의 최고치 기록을 세웠다고 대서특필이다. 초열대야에 에어컨 찾아 떠도는 폭염 난민 불지옥이라는 표제어도 나와 있다. 온열질환자가 3천 명이 넘어섰고 사망자만도 40여 명에 이르고 닭 350만 마리를 비롯하여 373만 마리 가축이 죽어 나갔다고 뉴스는 전한다. 참으로 소름 끼치는 더위다. 세상은 온통 폭염과의 전쟁 중이다. 휴대폰에 폭염경보 메시지가 일상인 듯 뜨고 있다. 더위를 피하고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 이런 와중(渦中)에 나는 더위를 즐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인가. 덥지 않아 흰 여름 양복을 입은 나에게 빈정대는 말투였다. 더워서 좋은데 친지는 나의 이 생뚱맞은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여름이니까 더워야지, 덥지 않으면 여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얼핏 들으면 역설적 궤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참으로 더워서 좋다는 나의 이 말은 진심의 토로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 얼마나 좋은가. 참으로 축복받은 백성이다. 여름이 덥지 않고 겨울이 춥지 않다면 사계절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봄의 꽃놀이, 여름의 물놀이, 가을의 단풍놀이, 겨울의 눈놀이 사계절이 언제나 즐거운 놀이터다. 이 어찌 생명체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연일 섭씨 36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고통은 아닌 듯싶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러나 자연과 교감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고통일 수도 행복이 될 수도 있다. 잠깐 눈을 돌려 창밖을 보자. 푸른 하늘 한여름 뭉게구름이 아름답고 시원하지 않은가. 초목은 무성하게 힘찬 기운을 뿜어내고 들녘은 희망찬 곡식이 패고 있다. 감, 밤, 대추, 석류가 알알이 굵어가고 사과와 배가 새콤달콤 맛 들어가고 있다. 참으로 한여름 더위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등골 가슴골 땀이 축축하다. 에어컨은 아예 없고 선풍기와 창밖의 자연 바람이 땀을 닦아주고 있다. 에어컨이 없어도 그다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나 피서(避暑)보다는 더위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이다. 정자에서 부채 하나로 시조를 읊조리던 우리 선인들의 여름나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 펄펄 끓는 삼계탕 나르는 음식점 아줌마 등 더위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을 떠올리면 에어컨은 사치다. 안도현 시인은 다슬기 냉채를 먹으며 어찌나 시원한지 에어컨을 끄고 먹었다고 여름 일기를 썼다. 더위가 가져다준 행복 일기다. 더위야 고맙다. △은종삼 수필가는 진안 마령고 교장으로 정년퇴임 후 계간지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장을 역임하고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칼럼수필집 <청와대의 침묵>, <행복은 제정신>이 있다.
▲ 이종희교육부가 내놓은 학생부 개선안이 시민단체의 반대로 흔들리고 있다. 정책을 수립함에 있어 국민의 관점에서 심도 있게 바라보고, 시행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파열음을 최소화하는 시안 마련에 미흡했다는 말이다. 유치원의 방과 후 영어교육 문제도 같은 형태로 갈등이 야기되고 있다. 선행학습이 아닌 놀이 중심의 교육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과 조기 영어교육의 도입으로 유아기 모국어 완성을 저해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육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귀에 익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지금까지의 교육정책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찬사를 받았는가? 좌충우돌로 수요자인 국민들에게 불신만 키워왔다. 수도권 몇몇 대학의 입시전형에 따라 달라지는 일관성 없는 교육행정으로 학생들만 어리둥절하지 않은가. 문재인 정부 들어 국가 정책을 수립하면서 공론화 시도를 하고 있지만, 곳곳에서 부딪히고 있다. 정책은 주관하는 측에서 체계적 이론을 바탕으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시행착오까지도 예의 분석해 국민적 여론을 묻는 것이 순서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두려워 미흡한 정책을 공론화한다면 언제라도 이런 사태는 도래할 것이다. 지금 학교현장에서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열정을 쏟는지 들여다 볼일이다. 왜냐하면 정부 정책의 실종으로 구성원 간에 불신만 커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개인적인 요구는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제 교육부는 책임 있는 정책을 입안해 국민들의 눈높이와 맞추었으면 좋겠다. 교육의 중요성이 직급을 부총리로까지 격상하지 않았는가? 교육부의 수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한국교육의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해 주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론만이 아니고 현장 감각을 갖춘 인사를 교육부에 배치하고, 교육현장과 소통하며 정부의 주관부처로서의 소명을 다했으면 좋겠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사회가 변하면 개인적인 욕구가 커짐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개인의 욕구가 먼저인지 공동의 이익이 먼저인지 따져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개인의 욕구를 해결하면 개인적으로는 쾌락을 느낄 수 있지만, 반대로 나로 인해 피해 볼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앞으로 전개되는 사회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정에서 가장이 성실하면 자녀들이 활기차고, 자녀들이 밖에 나가서 즐겁게 놀면 부모의 얼굴이 환해진다. 학교에서도 학교장이 투철한 교육관을 가지고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교사를 지원하고, 교사는 학생 교육의 본질을 알고 개개인의 재능과 성격 그리고 취미를 살려 꿈을 키워주는 조력자이길 바란다. 또 학부모는 함께 커가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눈길을 주는 혜안이 필요한 시대다. 촛불혁명은 국민운동이었다. 정부 정책을 국민들에게 맡기라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는 정책을 책임 있게 수립하고 의견을 묻기 바라며, 학부모는 내 아이에서 주변의 아이도 챙기는 성숙한 모습, 학자들은 심오한 학문을 현장에 접목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해박한 연구를 주문한다. 다시는 교육문제가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지 않기를 바란다. △이종희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하고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 회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초원을 찾은 나그네>를 펴냈다.
▲ 나인구술은 술시에 마셔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술시라고 하면 저녁 7시에서 9시로 해가 지고 난 뒤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어우러져 한잔한다는 데서 붙여진 이야기일 것이다. 대학 시절 나는 전주 고사동 오거리 극장가 근처에서 하숙한 일이 있었다. 당시 1960년대에는 시골에서 전주로 유학을 온 학생들은 늘 용돈이 궁했다. 그런데 영문학과 학생인 나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시장 아들이나 높은 지위의 자녀들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잘나가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제법 용돈도 여유가 있어 유행하던 검은 바바리코트를 맞춰 입고 술집도 드나들 수 있었다. 그때 시골에서 올라온 내 또래 친구 몇 사람과 후배인 국문과생들이 저녁이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 하숙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우리는 번화가 S극장 앞길에 H집이라는 막걸리 집을 찾았다. 대개가 개근상을 주어도 될 정도로 술꾼 친구들이었다. 당시 문학도라는 어설픈 미명 아래 드나든 H술집을 회상해 본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세 명이 앉으면 비좁은 의자 두 개였는데 그 자리도 늦으면 서서 마시는 일명 다찌노미 신세가 되었다. 여름엔 사카린을 가미한 냉 막걸리를 빈 맥주병에 담아 파는 게 유행이었다. 술병들이 얼마나 길게 많이 세워졌느냐가 다른 주당들과의 경쟁이었다. 안주래야 밥반찬 몇 가지와 젓갈류나 풋고추와 된장이면 족했다. 밤 12시면 야간통행금지라서 그 안에 더 많이 더 빨리 마셔야 했다. 날마다 만나도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는지 친구가 말실수하면 바로 가로채 안줏거리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투박한 막걸리 잔으로 한 잔씩 주고받으며 고상한 얘기가 오가다 말소리가 해롱거릴 때쯤 되면 자리에 없는 친구를 안주 삼았다. 심지어는 자리에 없는 여학생들을 술상에 올려놓고 씹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을 안주 삼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누구와 거시기 한다느니, 누구와 뭣 했다더라는 등 해서는 안 될 얘기까지 안주는 풍성했다. 술집 주인의 아들은 서울 S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구정물통에 손 담그며 번 돈으로 아들을 뒷바라지한다는 동정의 손님들이 아주 많이 찾았다. 지금은 그 술집도 없어져 달짝지근한 냉 막걸리도 맛볼 수가 없고 같이 술집을 드나들었던 친구도 몇 년 전 두 명이나 먼저 저승으로 가버렸다. 술은 마음을 따라 주고 진실을 마셔야 우정이라는 진가가 나오는 것이다. 흰 눈이 소록소록 내리던 날밤 목로주점에서 어깨너머로 풍겨오던 담배 연기와 함께 릴케나 헤밍웨이를 노닥거리며 마셨던 막걸리 집의 추억이 그립다. 술집을 인생강의실이라고 하며 고전이나, 사르트르를 말하던 막걸리 집의 운치를 잊을 수 없다. 나는 가끔 옛 친구와 애주의 소야곡을 듣고 싶다. 어느새 고희를 넘겼지만, 옛 친구를 만나면 한 잔 술부터 이놈 저놈 하며 마시고 싶다. 주유별장(酒有別腸)이라 했던가. 나도 지금은 건강상 술을 못하지만 옛날에는 마시면 솔직해지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즐거울 때 마시면 박장대소나 세레나데가 흘러나오고, 슬플 때 마시면 수심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누군가는 술은 비와 같다고 했다. 진흙에 내리면 진흙탕이 되고, 옥토에 내리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술은 자유를 얻고, 건강과 기쁨을 얻지만, 방종과 오만, 망언 등 성후회(醒後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따라 애주의 소야곡을 들으면서 술 한 잔 생각이 난다. △나인구 수필가는 ‘대한문학’에서 시, 수필로 등단한 뒤 전북문인협회 이사, 전북수필문학회 이사로 활동했다. 현재 대한문학작가회 회장으로 전북수필문학상을 받았다.
▲ 백봉기 나의 고향은 군산이다. 군산에서 태어나 초중고는 물론 대학과 대학원까지 다녔다. 선산도 군산에 있고 형제 친척들도 대부분 군산에서 살고 있다. 또한 30년 직장생활 중 절반을 군산에서 보냈다. 내가 다니던 군산 KBS가 폐쇄되지 않았다면 나는 군산에서 정년을 맞았을 것이다. KBS 시절 서울에 가면 군산사람 왔다고 인사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나는 군산사람으로 통했다. 그래서 군산 쪽에 방송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나를 찾았다. 하지만 내가 자칭 군산사람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나의 유별난 애향심 때문이다. 옛날의 군산은 흔히 말하는 물 맑고 공기 좋고, 먹을 것 많고, 인심 좋은 곳과는 거리가 있었다. 항구도시지만 바닷물은 탁하고, 아무렇게나 내버려 진 어구가 바닷가에 즐비하게 방치돼 있었다. 다른 항구도시처럼 바닷길 따라 낭만의 해변로 하나 없었다. 새만금사업이나 고군산 관광지 개발이라는 꿈이 요원했던 때였다. 그래도 나는 군산에 대한 애정이 컸으며 군산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앞장서고 싶었다. KBS 재직시절 6시 내 고향을 제작할 때도 군산의 명소를 먼저 찾아 소개했고, 다른 지역에서 해오던 임해 공개방송도 군산으로 유치해 결국 금강 하굿둑 광장에서 한여름 밤 금강 콘서트로 바꿔 시작했다. 행사는 대성공이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0년이 넘도록 계속됐다. 군산의 농구를 지원하기 위해 꿈나무 어린이 농구대회를 수년간 개최해 우수한 선수를 발굴했고, 당시 10년 넘도록 방영했던 KBS 열린 주부 마당도 내가 처음 군산에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이밖에도 고군산 사진 촬영대회, 금강권 학생서화전 등 돌이켜보면 나의 애향심 하나로 시작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생각할수록 마음 아픈 일이 있다. 1998년쯤 군산시가 주최한 군산 발전 세미나에서 나는 지정발표자로 나가 평소에 생각했던 군산을 대표할 수 있는 축제 두 가지를 강력히 요구했었다. 불꽃 축제와 군산 뜬다리 축제였다. 당시 전국이 온통 축제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는데 군산은 이렇다 할 대표적 축제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지역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불꽃 축제를 제안했다. 이 축제가 군산에서 필요한 이유는 최무선 장군이 처음 화약을 만들어 군산 앞바다에서 왜군을 무찌른 역사적 땅이었고 해망동 앞바다에 있는 62만 평의 인공섬이 불꽃 축제를 하기에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뜬다리 축제는 군산항에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뜬다리가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다양한 해양축제를 개최하자는 것이었다. 그 뒤로 여러 차례 군산시에 추진 방향을 이야기했지만 환경오염, 해양부의 승인 그리고 이웃 충남 장항과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흐지부지 꼬리를 내리고 말았던 일이다. 요즈음 서울 한강과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불꽃 축제를 보면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도 내 고향 군산에는 대표할 만한 축제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요즘 지방선거를 마치고 입지적인 인물들의 얼굴이 연일 신문에 오른다. 그런데 나의 눈은 군산지역 당선자들의 이름과 프로필에만 시선이 쏠린다. 몸은 전주에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군산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 등장한 선량들에게 내 고장 군산에 전국 최고의 축제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한다. 나도 언제든지 나의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이것이 나의 꿈이고 마지막 애향심이다. △백봉기 수필가는 KBS 제작부장, 편성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예총 전북연합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온글문학회 회장으로 <팔짱녀> 등 3권의 수필집을 냈다
▲ 최기춘지난 5월 초 내 고향 임실 옥정호반 요산공원에서는 올해로 두 번째 ‘꽃걸음 빛바람 축제’가 면민의 날과 더불어 사흘 동안 열렸다. 축제장에 가면 오랜만에 많은 고향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간다. 축제장은 빨간 꽃 잔디가 화선지에 그려진 듯 선명하게 아름답고, 주변에는 이팝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리며 반겨준다. 그리고 노란 갓 꽃과 유채꽃이 활짝 피어 축제장을 찾은 사람들을 웃으며 환영해 준다. 농촌을 떠나 도회지 도로변 공터의 화단을 방황하던 허수아비들도 멋진 패션으로 돌아와 막걸리에 취했는지 필봉농악의 장단에 맞춰 건들건들 춤을 추며 관람객들을 반긴다. 시인 정지용이 ‘얼굴 하나야 손가락 둘로 푹 가릴 수 있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옥정호도 이날 따라 잔잔히 출렁대며 보고 싶은 마음들을 채워주고 있었다. 면민의 날 기념행사로 효자·효부를 선발하여 상을 주고, 지역 발전에 이바지한 분들에 대한 공로패도 주며 또한 고향을 떠난 익명의 독지가가 고향 후학들을 위해 장학금도 기탁해 축제장은 훈훈한 고향의 정을 느끼게 했다. 관광객들을 위해 임실필봉굿을 비롯해 청소년 댄스경연대회, 통기타 경연대회, 주민 장기자랑, 자전거 체험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알차고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고향 사람들은 모처럼 바쁜 농사일을 뒤로하고 축제장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향수에 취하고 술에 취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관광객들도 축제장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며 민물 매운탕과 붕어찜 등 주변의 다채로운 먹을거리에 눈도 입도 일품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옥정호는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 자락의 데미샘에서 발원해 임실군 관촌, 신평, 운암, 강진의 산과 들을 끼고 굽이굽이 섬진강으로 흐르다가 1965년 강진면 수방리에 섬진강 다목적댐이 축조되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호수의 물이 구슬처럼 맑고 깨끗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발전전용수와 상수도, 농업용수 등 다목적으로 이용되고 홍수 조절에도 큰 역할을 한다. 호수 전체가 옥같이 아름답지만, 행사장인 요산공원 주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요산공원에는 임진왜란 때 3등 공신 성균관 진사였던 최응숙 선생이 낙향해 400여 년 전에 지은 양요정이란 고색창연의 정자가 있다. 양요란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에서 비롯되어 산과 물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리고 섬진댐 수몰민들의 슬픔을 달래려고 세운 망향탑도 있다. 전설과 신화를 간직한 국사봉에 올라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요산공원과 생긴 모양이 붕어 같다 하여 붙여진 붕어섬이 한눈에 보인다. 옥정호 수변도로는 전국의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돼 젊은 청춘남녀들과 가족들이 찾는 명소다. 마암리에서 용운리까지 13㎞ 마실길은 걷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나는 축제가 끝난 요즈음 축제 때만 찾는 것보다는 4계절 내내 내방객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로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기관에서 특색 있고 매력적인 관광 개발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 주민들이 옥정호의 물이 맑고 깨끗하게 유지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대한문학작가회 전북지회장, 영호남수필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으로 <머슴들에게 영혼을>이 있다.
▲ 임두환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건강상 짚고 다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중절모를 쓰고 팔자걸음 걸으며 모양을 내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100세 시대여서인지 건강상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지팡이는 ‘단장(短杖)’과 ‘행장(行杖)’이 있다. 단장은 짧으며 손잡이가 있는 것이고, 행장은 길면서 손잡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얼마 전 TV에서 어느 노인정에 명아주 지팡이를 만들어 기증하는 것을 보았다. 그 뒤 나도 명아주 지팡이를 손수 만들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불진화대로 선발돼 전주수목원 근처에서 근무할 때였다. 업무 특성상 관내를 순찰하는 일이 일상이어서 하루에 1만 보 이상은 걸어야 했다. 그런데 2월 중순쯤이었을까? 순찰하다 보니 길가에 묵정밭이 보였다. 그곳에는 대부분 개망초가 자리를 잡는 게 보통인데 뜻밖에도 내가 찾던 명아주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명아주는 들에서 자라는 한해살이 잡풀이다. 환경에 맞으면 키가 1~2m까지 자라는데 봄에는 어린 순을 데쳐서 나물로 먹기도 하고 생즙은 일사병과 독충에 물렸을 때 쓰인다. 또한 건위, 강장, 해열, 살균·해독의 효능이 있어 잎과 줄기를 말려 민간요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을철에는 곧고 크게 자라서 가공하면 명아주 지팡이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팡이 중에 제일이라는 청려장(靑藜杖)이다. 비록 나무가 아니라 일년생잡초지만 재질이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고 질겨서 지팡이로는 제격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 바로 지팡이를 만들었다. 지팡이로 만들려면 가을에 줄기를 자르지 않고 뿌리째 뽑아야 한다. 지상으로 성장하는 경계점에 울퉁불퉁한 옹이가 있어 가공해 놓으면 이 부분이 마치 용의 형상을 나타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겨울이 지나 봄이다 보니 뿌리가 썩어 어쩔 수 없이 밑동을 잘라야 했다. 그래서 비록 손잡이 없는 행장이 되었지만 아쉬웠다. 다 된 지팡이를 짚고 보니 지나온 세월이 뇌리를 스쳤다. 흙수저로 태어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홀로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산비탈을 걸어왔다. 묵정밭에서 자란 명아주 역시 험한 세상을 이겨오며 뼈아픈 고통을 겪은 흔적이 마디마디 굳어진 옹이로 나타나 마치 나의 생애를 보는 듯 애처로웠다. 그래서일까?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은 효자가 부모에게 바치는 선물이 되었다. 중국 명나라 때 의서 〈본초강목>에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을 예방하고 중풍이 걸렸던 사람도 쉽게 낫는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는 부모 나이 50이 되면 자식들이 명아주 지팡이를 만들어 드렸다고 한다. 부모들이 이 지팡이로 땅을 치고 걸으면 불빛이 환하게 일어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청려장이다. 이 지팡이는 주인이 집에 있을 땐 말 없는 문지기요, 문밖에 나서면 그림자처럼 따르니 어느 자식이 이 충직만 하랴? 요즘 들어 세상 좋아지다 보니, 등산용 플라스틱 지팡이가 판을 치고 있다. 그렇지만, 누가 무어라 한다 해도 지팡이 중 제일을 꼽는다면,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이 존경받아 마땅하리라. 그보다는 100세 시대와 더불어 우리의 청려장 같은 효심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두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해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문학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행촌수필문학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수필집으로 <뚝심대장 임장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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