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하면 으례 떠오르는 사람이 미국의 헬렌 켈러여사이다. 그녀는 어려서 중병을 앓아 시각과 청각을 잃었으며 말도 하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가정교사 설리번의 도움으로 처절할 정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미국의 저명한 저술가·교육자로 성공하여 ‘인간승리’의 표본이 됐다.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이해심,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소아마비로 휠체어 신세를 진 장애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중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꼽힌다. 그의 성공 역시 자신의 눈물겨운 노력 못지않게 장애인을 정상인과 똑같은 인격체로 존중하는 서구사회의 인본주의가 뒷받침 됐음은 물론이다. 세계적 천체물리학자인 영국의 스티븐 호킹박사 또한 고개마저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장애인이지만 그의 학문적 업적이 장애로 인해 굴절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중시하는 유교적 인습으로 인해 신체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질시, 사회적 냉대가 너무 심하다. 선천적 장애이거나 후천적 장애이거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아무리 장애인 복지를위해 정책적인 배려를 해도 기업이나 학교, 심지어 복지시설마저도 이들을 외면하는 일이 많다. 이러고도 어떻게 우리가 루즈벨트 재단으로부터 국제 장애인상까지 받는 나라가 됐는지 부끄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엊그제 ‘아들이 평생을 장애인으로 고통받으며 살게 할 수 없다’며 일곱살짜리 아들을 목졸라 숨지게 한 30대 주부의 애절한 사연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의 행위는 분명 천륜을 저버린 악행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오죽했으면…’이라는 일말의 동정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장애때문에 놀림감이 되고 ‘왕따’당하는 어린이들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장애를 극복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타의에 의해 생을 마감해야 하는 장애인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는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복지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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