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진 논설위원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앨 고어는 2000년 10월, 전격적으로 선거 패배를 선언했다. 전국 유권자 투표에서 54만표를 더 얻고도 선거인단 확보에서 진 것이다. 하지만 플로리다 주에선 선거 부정이 드러나 재검표가 진행중이었다. 선거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 중대 고비였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은 이를 위헌이라며 중단을 명령했다. 고어는 대법원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깨끗이 승복했다. 국민들이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고어에게 '승리를 사기당한 패배자'라는 동정 여론이 쏟아졌다.
그후 그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더 큰 일에 나섰다. 인류를 위해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환경운동가가 된 것이다. '불편한 진실'이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해 8월 경선에서 패배하자, 그 자리에서 "오늘부터 당원의 본분으로 돌아가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그녀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기고도 여론조사에서 져, 이명박 후보에게 1.5%차로 역전 당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언론은 '아름다운 패배(승복)'라 불렀다. 이번 총선에선 '친 이명박'측의 '친박(親朴)밀어내기'에 굴하지 않고 건재함을 보여줬다. 박근혜에게 5년후 대선 레이스는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다.
정동영 전 장관은 지난 대선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것도 531만 표라는 대선 사상 최대의 격차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도 승리의 여신은 손짓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DJ의 가신그룹에 대항해 정풍운동을 주도했다. 또 새천년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전국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비판도 없지 않았으나 큰 흐름은 옳았다. 그는 대선 내내 지역감정에 기대지 않고 통일의 이미지를 심으려 노력했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너무 없어, 백약이 무효였다. 이제 그는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최대의 시련에 봉착했다. 이를 어떻게 뚫고 일어설 지 관심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총선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갈렸다. 정치인에게 낙선은 '원숭이 이하'로의 추락을 의미한다. 그러나 패배는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드는 법이다. 승자에겐 겸손을, 패자에겐 용기를 권하고자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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