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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변산반도 국립공원

고려 중엽의 문호(文豪) 이규보는 변산을'나라의 재목(材木)창고'라 했다. 1199년 전주에 내려 와 벼슬을 했던 그는 벌목사(伐木使)로 3-4차례 변산반도를 찾았다. 그때 본 변산은 "층층 산봉우리와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줄기로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감탄했다. 그의 말대로 이곳 나무는 고려때 궁궐을 짓는 재목으로 사용되었다. 몽고의 일본 침략 때는 배 300척을 건조할 정도로 울창했다.

 

조선 후기 이중환의'택리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변산에는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다. 변산의 바깥은 소금 굽고 고기 잡는데 알맞고 산중에는 기름진 밭이 많아 농사를 짓기에 알맞다. 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을 하며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사지 않아도 될만큼 넉넉하다."

 

또 변산은 옛부터 좋은 피난처인 십승지지(十勝之地)중 하나로 꼽혔다.

 

이런 변산도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다. 1944년 일제의 대동아전쟁으로 숲이 남벌되었고 6·25때 공비소탕 작전으로 대부분 불타 버렸다.

 

하지만 그런 참화속에서도 변산은 산과 바다와 벌판이 어우러진 이상적인 국립공원으로 성장했다. 채석강 적벽강 직소폭포 낙조대 등 경관뿐 아니라 내소사 개암사 우금산성 호벌치전적지 유천도요지 등 역사·문화적으로 가치있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또 해안을 끼고 펼쳐지는 드라이브 코스는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풍성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변산반도는 1971년 중앙부만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어 1988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면서 그 범위가 대폭 넓어졌다. 당시 주민들은 살던 곳이 공원지역에 편입되면 혜택을 받는 줄 알고 너도 나도 공원지역에 넣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후 부안군 전체의 1/3을 차지하는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각종 규제에 묶여 개발이 제한되고 주민들의 재산권 침범 논란을 낳았다. 특히 변산해수욕장은 새만금방조제로 인해 뻘이 쌓이는데다 개발제한으로 사양길을 걸어야 했다.

 

마침 환경부가'국립공원 구역조정계획'을 내놓았다. 내년 말까지 전국 20개 국립공원에 대해 일부 지정을 해제하거나 새로 편입하는 등 경계선을 조정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국립공원의 본래 취지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재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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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진 chos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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