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당시 미 2사단장을 역임했던 러셀 아너레이 예비역 중장이 당시 사건에 대한 심경을 적은 책을 발간했다고 한다. 그는 여중생 사망사건이 좁은 도로에서 장갑차 운전병의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고임을 지적했다고 한다.
또 이사건 발생후 사단 공보담당 소령이 잘못하여 사죄하는 태도가 아닌 해명의 자세를 보여 큰 역풍을 초래하게 되었음을 아쉽다고도 했다. 그는 미국이 한국 전쟁에서 3만 3천명이 죽었고 10만 3천명이 부상하였음도 상기시켰다. 아무튼 미선이, 효선이의 죽음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우리에게 있어 미국의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을 재기시킨 것이었다.
반미(反美)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도 다양하다. 한미(韓美)간의 갈등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한국전쟁 휴전문제를 놓고도 일어났는데 미국은 휴전을 결정했으나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기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 북진통일을 외치기도 했었다.
1980년 이후 한국의 반미운동이 크게는 세단계를 거치면서 변화해왔다는 분석도 있다. 첫째는 정치적 반미 운동으로써 이는 광주 사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것이다. 미국이 광주사태를 방관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반발로 미문화원 방화와 점거, 친북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생존권적 반미 운동으로써 불평등한 한미동맹을 지적하면서 한미주둔 군지위 협정 (Sofa), 미군기지 환경오염, 사격장, 미군범죄, 수입 개방등에 대한 항의와 투쟁을 말한다.
셋째는 문화적 반미 운동으로써 88 올림픽 당시 한국문화에 대한 몰이해(沒理解)와 오만을 연출한 미국 방송과 선수에 대한 분노, 2001년 동계 올림픽 당시 한국 선수가 미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억울하게 빼앗긴데 대한 한국인의 항의, 그리고 2002년 주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신효순, 심미선 사망사건 이후 주한미군 지위협정 개정촉구를 위한 촛불 시위를 말한다.
1988년 올림픽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고양시키면서 해방 후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은 미국에 대한 속국의식에서 벗어나게 한것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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