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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반계(磻溪) 유형원 - 조상진

부안에는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 있다. 반계(磻溪) 유형원의 발자취다. 아니, 알려지지 않았다기 보다 발굴하지 못한 것이다.

 

반계는 조선 500년 역사에 있어 경세학(經世學)으로는 율곡 이이와 쌍벽을 이뤘고, 실학으로는 다산 정약용에 앞선 선구자다. 하지만 율곡이 기호학파의 머리로 추앙받고 다산이 실학의 최고봉으로 거론되는데 비해 대접이 너무 소홀한 편이다. 학계나 지역의 관심이 그만큼 적었다는 반증이다.

 

반계는 뛰어난 경륜에도 불구하고 평생 초야에 묻혀 지낸 인물이다. 본디 태생은 서울이나 인생의 황금기를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愚磻洞)에서 보냈다. 그의 호 반계는'우반동 계곡'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 우반동은 세종때 우의정을 지낸 그의 9대조 유관의 사폐지지(賜弊之地·왕이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땅)다.

 

반계는 벌죽한 집안 출신이다. 외삼촌 이원진은 높은 벼슬에 큰 학자였고 고모부인 김세렴은 호조판서에 학문까지 높았다. 이들이 어렸을 적 스승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상은 암울했다. 15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반계는 가족과 함께 강원도·경기도 등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또 당쟁으로 인해 참화를 입은 부친을 보고 벼슬길을 멀리했다.

 

32세에 부안에 내려온 반계는 52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1만여권의 서적에 묻혀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면서도 틈을 내 세상형편을 살폈다. 전국을 유람하며 민초들의 삶을 눈여겨 봤고 한때는 서울에 올라가 나라를 유린한 청(淸)을 치기 위해 군민을 단련시키기도 했다.

 

반계의 빛나는 업적은 그가 우반동에서 18년에 걸쳐 완성한 '반계수록(磻溪隨錄)'에 응축돼 있다. 26권으로 된 이 책은 조선사회를 구제할 개혁교과서로, 후세 실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사후 97년이 지난 1760년에야 영조에 의해 탁월한 저술로 인정받아 국가에서 간행하였다.

 

정인보는 "조선 근고의 학술사를 종합해 보면 반계가 1조(一祖)요, 다음이 이익, 그 다음이 정약용이다"고 말한 바 있다.

 

또 최근에는 새만금사업이 탄력을 받으면서 인문학적 접근으로 최치원과 함께 반계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때 (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가 11일 창립 20주년 기념으로 반계학술대회를 갖는다. 반계가 새롭게 조명되는 기회였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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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진 chos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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