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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잊혀지는 6·25 - 장세균

 

지난 25일은 6.25 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 되는 때였다. 그만큼 세월은 많이 흘러 전쟁의 상흔(傷痕)도 잊게도 해주었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6.25를 먼 이야기처럼 의식한다.

 

통계에 의하면 6.25 전쟁으로 남북한 민간인 3백만명이 죽었고 남북한 군인, 약 100만명이 살상을 당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이었다. 전쟁은 물론, 북한의 도발이었다. 6.25 전쟁 원인을 놓고 여려 학설이 있다. 마치, 미국 남북전쟁을 놓고 여려 원인설이 있듯이 말이다. 음모설,충돌설,수정론이 바로 그것이다.

 

6. 25 전쟁 원인에 대해 미국의 커밍스(B ,C Cummings)라는 사람은 미국 고문단의 문서를 중심으로 내전론(內戰論)을 내세운다. '내전론'은, 6.25는 한반도 자체내의 문제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첫째는 토지개혁이다. 북한은 해방후 바로 토지개혁을 단행했는데 남한은 그렇지를 못해 남한의 토지개혁 완성을 위해 북한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웅진반도에서 남한과 북한의 잦은 충돌이 있었는데 1950년 6월 24일, 새벽에 남한측의 도발과 여기에 대한 북한의 반격이 비화되어 철원,금화,양양등 38선 전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고 하는것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 구(舊) 소련의 극비문서가 공개되자 6.25의 원인도 밝혀질수밖에 없게 되었다. 최신 공개된 소련문서에 의하면 6.25 전쟁 직전에 소련은 북한에게 차관 형식으로 약 5천만 달러에 상당하는 최신 소련제 무기와 장비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南侵)의사를 정식으로 표명한것은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 회의에서 였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서 스탈린은 여려 단서를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1950년 1월 17일에 김일성은 다시 남침여부를 스탈린에게 타진(打診)했고 얼마후 1월 30일에 남침 허락을 받았다.

 

그후 4월에 다시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은 극비회담을 가졌는데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전쟁에 유리해졌다며 남침에 대한 중국으로부터 승인 받기를 요구했다. 한달쯤 지나 김일성은 중국의 승인과 협조를 얻기위해 모택동을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미군이 참전하면 중국도 참전하겠다고 했다. 남한의 북침설은 설 땅이 없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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