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동상은 인천 상륙작전을 기념하기위해 인천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1957년 9월에 송학동 자유공원에 세운 높이 5미터의 청동 주조물이다. 망원경을 들고 인천 앞바다를 주시하는 듯한 맥아더의 동상은 여려번 철거 수모를 당할뻔 했었다. 맥아더 동상 철거를 누가 환영하는지는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은 대구 부산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던 북한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게 되었고 전세(戰勢)는 하루 아침에 뒤바뀌게 되었다.맥아더 장군은 6. 25북침 당사자인 북한으로써는 다 이긴 전쟁을 망가트린 장본인이 된셈이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담 뒤에는 맥아더 장군의 성격이 놓여있다.전장(戰場)에서 최고 사령관의 성격은 매우 중요하다. 맥아더 장군의 명석한 두뇌는 이미 정평이 나있었다. 그는 미국 육군 사관학교를 1903년 수석으로 졸업을 했는데 그때 그의 성적은 지금도 깨지지 못하고 있다. 용감성에 대해서도 그는 탁월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뒤 그는 일본 천황의 황복과 관련해 일본 아쓰기 비행장을 찾아갔는데 이 비행장은 일본 카미카제 대원들의 비행 훈련장으로써 그당시 카미카제 대원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던 중이었다. 맥아더의 참모들과 일본당국도 그의 신변안전을 위해 비행장 방문을 반대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투시에도 헬메트와 가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불리한 상황을 오히려 유리한 상황으로 판단하는 한 차원 높은 전략에 발휘되었다. 그 당시 합동참모부는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률은 5000분의 1로 보았다. 실패가 예약된 전략이라는것이다. 왜냐하면 인천은 간만의 차가 9m에 달하고 원거리 상륙으로 상륙용 선박이 부족하고 병력차출로 낙동강 방어선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아군이 어렵게 본다면 적군(敵軍)도 아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리라고 상상치 못할것이기에 상륙작전을 밀어부쳐야 한다고 판단한것이다. 군산에 상륙하는척 하면서 결국은 인천을 택해 밀어부쳐서 성공을 한것이다. 맥아더 동상이 인천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것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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