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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조선왕조와 전주 - 조상진

전주가 조선왕조의 탯자리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주에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나중에 全州府로 개칭)를 두었고, 이러한 격상된 지위는 500년동안 이어졌다. 어향(御鄕)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인정한 셈이다.

 

오늘날 전주시가 지향하는 전통문화중심도시의 뿌리도 결국 이러한 조선시대 문화를 현대화 및 산업화하자는 발상이다.

 

하지만 창업주 이성계의 초년부터 전주와 밀접한 관계는 아니었다. 이미 고조부때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옮겼다가 다시 함경도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후 100여 년간 그곳에 살면서 원(元)나라의 벼슬까지 세습했다.

 

그러다 이성계가 고려에 내투(來投·와서 항복함)해 활동하면서 원래의 본향을 찾게 된다. 고려의 권문세가 못지않은 집안이라는 것을 내세울 필요가 있어서다.

 

태조는 개국하자 전주지역 청소년 26명을 특별선발해 입궐토록 했다. 이들은 태조의 동생이 통솔하면서 태조를 시위토록 했다. 이후 태종때인 1410년 전주에 진전을 지어 태조 어진(초상화)을 봉안했다. 세종은 전주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토록 했고 태조어진을 모신 진전을 경기전으로 개칭했다.

 

그 뒤 영조와 고종이 전주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영조는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의 묘가 건지산에 있다는 구전을 바탕으로 묘역을 찾다 실체가 없자 이 일대에 푯말을 박고 사냥과 땔감 채취를 금했다. 이어 조경묘를 창건해 이한의 위패를 모셨다. 또 불에 탄 전주부성을 개축해 남문을 풍남문, 서문을 패서문이라 했다. 여기서 풍패(豊沛)는 한나라 고조의 고향 지명으로 왕조의 본향을 가리킨다.

 

그리고 고종은 쓰러져 가는 왕조를 생각해서인지 선조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전주에 애착을 보였다. 조경단을 쌓아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나타냈고 오목대와 이목대에 친필을 내려 비와 비각을 짓게했다.

 

올해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은 이와 관련된 기념전과 학술행사를 대대적으로 가졌다. 또 4일은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한지 6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념해 6일 경기전에서 어진박물관을 개관하고 봉안 600주년 기념대제를 연다. 봉안행렬을 재현하고 왕가의 산책, 수문장 교대의식 등도 갖는다. 전통문화의 도시 전주의 뿌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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