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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폭탄주 - 이경재

연말연시엔 동창회나 직장, 각종 계 등 온갖 모임이 성시를 이룬다. 그리고 모임과 식사자리엔 술이 빠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성인 한명이 한해 마신 술의 양이 소주 71.1병, 병맥주 140여 병이다. 술 소비량도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음주가무에 특출난 한국인의 유전자를 인정한다 해도 '술 권하는 사회'에서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술자리엔 으례 폭탄주가 빠짐 없이 등장한다. 저자거리든 청와대든 폭탄주는 단골메뉴가 됐다. 맥주를 가득 담은 맥주잔에 위스키 잔을 떨어뜨려 맥주거품이 튀어오르는 형태가 마치 원자폭탄의 구름 같다고 해서 폭탄주로 불렸다. 지금은 맥주에 소주를 타 마시는 '소맥'이 대세다.

 

폭탄주는 짧은 시간에 취기를 높이는 위력을 갖고 있다. 또 잔을 돌려가며 예외 없이 마셔야 한다는 것도 큰 파괴력을 갖는다. 짧은 시간에 취기를 극대화한 술을 주량에 관계 없이 마셔야 한다면 술 못마시는 사람한테는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또 주사(酒事)와 설화(說禍)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1986년의 '국회 국방위 회식사건', 1999년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사건' 등이 모두 폭탄주에서 연유됐다.

 

하지만 폭탄주를 미화하는 측도 있다.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누구나 똑같이 한잔씩 돌려가며 마시는 건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폭탄주를 '민주지주'(民主之酒)로 부르기도 한다. 또 '중용지주'(中庸之酒)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큰 것(맥주잔)과 작은 것(양주잔 또는 소주잔)의 조화, 부드러운 것(맥주)과 독한 것(양주나 소주)의 조화는 곧 중용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용지주라는 것이다. 줄여서 '중용주'(中庸酒)로 부른다. 한국기자협회 세미나 뒷풀이 때 언론계 선배가 자신의 지론이라며 한 말이다.

 

폭탄주는 미국의 탄광·벌목장·부두·철강공장 등의 노무자들이 즐겨 마신 '보일러 메이커 (Boiler Maker)'가 원조로 알려져 있다. '온몸을 취기로 끓게 하는 술'이란 뜻이 시사하는 것처럼 생활고를 달래려 싼 값에 빨리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폭탄주다. 이런 술을 정치인과 법조인, 고위 관료가 즐겨 마시고 대중화되고 있다면 뭔가 분명 잘못된 사회다.

 

/ 이경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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