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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채용신(蔡龍臣) - 조상진

"경자년(1900) 봄에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어 태조의 영정을 그리자고 논의할 때 전첨절제사 채용신이 명령을 받들어 경건히 그렸다."

 

석지(石芝) 채용신(1850-1941)이 어명을 받아 그린 여러 초상화의 전말을 담은 '봉명사기(奉命寫記)'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기서 임금은 고종이다. 고종은 1899년 여수 돌산진 수군첨절제사를 마지막으로 무관직에서 물러나 전주에 낙향해 있던 석지를 불러 태조어진을 모사토록 했다. 소림 조석진과 함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삼은 것이다.

 

이들은 태조어진을 완성하였으나 4개월만에 선원전이 불타버렸다. 그래서 태조어진과 함께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7조 어진을 다시 그렸다.

 

당시 석지의 놀라운 재주를 알아 본 고종은 다음 해, 자신의 어용을 그리게 했고 석강(石江)이라는 호까지 내려 주었다.

 

석지 채용신은 흔히 조선의 마지막 초상화가로 일컬어진다. 조상들이 원래 전주에 살다 할아버지때 서울 삼청동으로 이사했으며 석지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90 평생 중 40여 년의 세월을 전북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곳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오롯이 화폭에 담아냈다.

 

그가 그린 작품은 몇가지 특징을 갖는다. 하나는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는 점이요, 또 하나는 외모 뿐 아니라 내면에 숨겨진 정신까지 그렸다(傳神寫照)는 점이다. 그리고 종래의 전통적 기법에 서양화법과 새로 등장한 사진술의 음영을 더해 독창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석지는 1904년 충남 정산군수로 재임 중 최익현을 만난다. 그의 애국정신과 기상에 감화돼 이후 애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이하응 임병찬 전우 황현 김직술 김영상 기우만 서병완부부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들 외에도 일반인의 초상화와 무이구곡도 화조도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또 아들 손자와 함께'채석강도화소'라는 공방을 차려 전문 화가의 길을 걸었다.

 

석지의 그림에는 전통과 근대미술의 융합을 통한 독자적 기법과 민족적 주제의식이 묻어난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김은호보다 높이 평가하는 미술사가들도 있다. 이러한 석지를 기리기 위해 국립전주박물관은 '석지 채용신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라는 서거 70주년 특별전을 열고 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재평가의 기회였으면 한다.

 

/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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