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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남전(藍田) 허산옥 - 조상진

전주가 '맛과 멋'의 고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뭘까. 아마 오래 전부터 판소리의 고장이었고 뛰어난 그림과 글씨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맛깔스런 음식까지 곁들여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전주가 예향으로서 맥을 잇도록 한 분 중 하나가 남전(藍田) 허산옥(본명 허귀옥·1926-1993)이다. 그녀는 자신이 출중한 화가였고 전주의 대표적 한정식집 행원(杏園)의 경영자였다. 그러면서 배포 큰 문화예술계의 메세나였다. 말하자면 남전은 40여 년 동안 전주 문화예술계의 대모(代母)였던 셈이다.

 

남전은 김제 부량의 가난한 집에서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16살에 남원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이곳에서 산옥(山玉)이란 예명을 받았다. 이후 예능활동은 전주에서 펼쳤다. 당시 권번은 가무와 시, 서화를 가르치는 종합예술학교였고 기생은 잘 나가는 아이돌 가수요, 탈렌트였다.

 

남전은 풍남문 옆에 행원을 개업했다. 일제 때 유명한 요정이었던 낙원의 건물 일부를 인수받아 문을 연 것이다. 이 즈음 남전은 전주 동광미술학원에서 이도영(나중에 서울에 올라가 홍익대를 설립)에게 동양화, 이응로에게 산수화를 배웠다. 또 개인적으로 허백련에게 산수화, 송성룡에게 서예, 이용우에게 기명절지(器皿折枝)를 사사했다.(전주대 송화섭 교수)

 

그러면서 화가들을 적극 후원했다. 당시 전주에는 효산 이광열이 한묵회를 조직하면서 변관식 이상범 장우성 허건 등 소위 '10대 작가'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뿐만 아니라 행원의 명성을 듣고 찾아 온 영화인이며 문인, 국악인들이 줄을 이었다. 남전은 이들의 후원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행원은 이들이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었다.

 

이들에게 잠자리와 술 밥을 풍족히 대접하고 이들이 그린 그림을 구입해줬다. 또 자신의 그림을 용채(用債)로 내놓은 경우도 빈번했다.(체육발전연구원 이인철 원장) 남 몰래 선행도 베풀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많이 주었다.

 

이같은 후원 역할에 그치지 않고 본인도 국전에 15번 입선하는 실력을 보였다.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도 역임했다. 남전은 1993년 전북예술회관에서 개인전을 준비하다 세상을 떴다.

 

지금이라도 그의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갖고 조그만 기념관이라도 마련하는 것, 그것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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