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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황산대첩제 - 조상진

14~16세기 일본은 센고쿠(戰國)시대로, 막부(幕府)가 실권을 잃고 각 지방으로 분열된 시기였다. 일본 연안일대의 생활이 궁핍한 중소 무사나 농어민들은 해적이 되었다. 이들이 왜구(倭寇)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연안에서 주로 식량을 약탈했다.

 

한반도에서의 활동시기는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가 심했다. 이들은 선단을 이루어 연안마을을 습격했고 때론 내륙 깊숙이 쳐들어 오기도 했다. 그 중 고려 말 우왕 때가 가장 극심했다. 우왕 재위 14년간 침략 횟수는 무려 378회에 이르렀다. 제집 안방 드나들듯 하며 노략질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침략이 진포(鎭浦)해전이다. 이들은 우왕 6년(1380년), 지금의 군산과 서천 사이 금강일대에 500척의 배를 몰고 나타났다. 이들은 배를 밧줄로 엮어 병사들이 나누어 지키는 한편 육지로 올라가 약탈을 자행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이때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덮고 노략질한 곡식을 배에 실어 나르다가 땅에 버려진 쌀이 한 척(尺)이 넘었다"고 한다.

 

다행이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火砲) 덕분에 적선은 한꺼번에 불타버렸다. 왜구들 역시 태반이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남은 일부가 옥천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왜구들과 합류했다. 다시 전열을 정비, 상주를 거쳐 함양에 집결, 남원까지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 왜구 토벌작전에 나섰다. 양측은 운봉 넘어 황산 서북쪽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격전 끝에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물리쳤다.

 

처음에는 왜구의 수가 고려군보다 10배가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 살아 남아 지리산으로 도망갔고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에 달했다. 이것이 황산대첩이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주 오목대에 들러 종친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조선 창업의 뜻을 밝혔다.

 

이곳 운봉읍 화수리에는 1577년 황산대첩비가 세워졌다. 청일전쟁 때 일본이 이를 파괴했으나 정부가 1977년 새로 복원(사적 104호)했다.

 

이를 기려 운봉애향회가 1986년부터 황산대첩축제를 벌이고 있다. 광복절에 열리는 이 축제는 당시 전쟁을 현장감있게 재현,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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