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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불가론

정동영 만큼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닌 사람도 없다. 정계 입문한지 짧은 기간동안 그 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사람도 없었다. 앵커출신으로 DJ에 발탁돼 총선때 고향 전주서 전국최다득표를 두번이나 했고 집권당 대선후보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를 40·50대 주부들이 유난히 좋아한다. 그의 깔끔한 외모에 넋을 잃고 '개나리아저씨'하며 반한 여자들이 한둘 아니었다.

 

누구나 부침이 있듯 그는 고속 출세해 대선 후보까지 갔다가 낙선해 지금 가파른 길을 걷고 있다. 언론으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플래시 세례를 안 받으면 금단현상 같은 게 생긴다. 대선에서 530만표 차로 떨어지고 서울 동작을에서 정몽준에게 패한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 때가 가장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정치인도 인기연예인처럼 주가가 떨어지면 끝장이어서 더 고통 받았을 수 있다.

 

정동영은 쉽게 정치를 해 콘텐츠와 참을성 부족이 단점으로 꼽힌다. 대선후보였기 때문에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때를 기다렸으면 오늘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그 한테 아쉬운 대목이 바로 이점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웅처럼 묵묵히 참고 견디는 모습이 부족했다. 자신의 때를 기다릴줄 아는 정치인 보다는 정치연예인 기질만 엿보였다. 미국서 꾹꾹 참고 기다렸으면 큰 기회가 빨리 왔을 것이다. MB실정에 따라 강력한 야당의 역할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 4월 어머니를 외치면서 전주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한 게 패착였다. 본인은 재기할 기회로 생각했을지 몰라도 세평은 그 반대였다. 그 때부터 골목대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담대한 진보를 외치면서 너무 좌클릭했다"며 불안한 사람으로 여긴다.

 

노무현대통령 시절 그는 여러차례 한·미 FTA를 지지했다. 2006년 3월 주한미국대사에게 "향후 50년간 한·미관계를 지탱할 두번째 기둥이라고 말한 그가 지금 FTA는 을사늑약이며 협상대표는 이완용"이라고 외쳤다. 자기 부정과 선동으로 모습을 바꾼 그는 자신이 만든 업보 때문에 덕진 출마를 접어야 한다. 국회의원 한번 더 한다고 대통령 될 것도 아니고 기대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자신을 통크게 비워 내려 놓는게 정권교체를 위해 바람직할 수 있다. /백성일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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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일 baiksi@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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