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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유적의 진실

 

1971년, 일본에서 육조시대의 옛 문헌기록이 발견됐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관세음이 경험한 신비한 사례들을 모은 문헌이었다. 그런데 이 문헌에 백제 관련 기록이 담겨 있었다.

 

"무광왕(백제 무왕)이 '지모밀지(枳慕蜜地)'라는 곳에 천도해 새로운 건축물들을 많이 지었는데 제석사에 벼락이 떨어져 석탑이 무너졌다. 초석부분은 남아 사리함를 열어보니 그 안 유리병에 있던 사리가 없어졌다. 무왕은 발정이라는 스님에게 일러 참회법회를 보게 했는데 이후 다시 보니 사리가 다시 놓여있었다. 이에 감격한 무왕은 사찰을 건립해 그곳에 사리함을 모셨다"는 내용이었다. 역사학계는 이 내용에 주목했다. 지난 65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 수리때 발견된 푸른 유리병을 담고 있는 사리함과 '금강반야경 ' 등과 비교해 그 내용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무왕이 건립했다는 제석사와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는 유적은 불과 1.3Km의 거리. 왕궁터의 비밀을 밝혀내는 단서가 된 이 기록은 백제 말 '익산 천도설'을 뒷받침 해줄 중요한 근거 중 하나다. 학계는 '무광왕'을 '무왕'(재위 600-641), '지모밀지'를 전북 익산시 금마의 옛 지명인 '지마마지'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익산의 금마와 왕궁면 일대 역사유적지구에는 백제 왕궁 터와 삼국시대 최대 사찰인 미륵사지,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 그리고 현존하는 백제 석불 중 최대의 석불이 있는 석불사 까지 많은 백제 유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공간의 구조만으로도 왕궁터의 역사적 배경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음을 증명해줄 '익산 천도설'은 여전히 미완이고 수수께끼다. '관세음응험기' 말고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백제역사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다음 달에는 등재를 지원하는 추진단이 출범한다. 전북도, 익산시와 충남도, 공주시, 부여군이 함께 기금을 출연해 설립하는 이 추진단은 세계유산 등재 추진·지원뿐 아니라 등재 이후 문화유산의 보존·관리 업무까지 맡게 된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 잠재목록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본 등재가 목표다.

 

그런데 등재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왕궁터의 실체를 규명하는 일이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왕궁 터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긴 하지만 천도의 진실은 아직 명료하지 않다. 기록과 유물이 없는 역사는 야사로 묻히거나 설화로 남는다. 왕궁터는 기록도 있고 유물도 있다. 역사적 실체를 드러내는 일만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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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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