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가 하루는 외출을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못보던 부채짐이 놓여 있었다. 청지기에게 "웬 부채짐이냐"고 물었더니 "부채장수가 부채를 팔러 왔다가 해가 저물어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해 객방에 들였다"고 대답했다. 그런가 하고 사랑채로 들어가 앉았는데, 그날 따라 심심한데다 부채에 글씨를 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청지기더러 그 부채짐을 마루에 들여놓게 하고는 부채를 한아름 꺼내 쓰고 싶은 글귀를 쓰기 시작했다. 이튿날 부채장수가 떠나려고 보니 주인 영감이 부채에 잔뜩 글씨를 써놓지 않았는가. 부채장수는 물건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며 탄식했다.
이를 본 김정희는 "추사선생이 쓴 글씨부채라 하고, 값을 몇곱절 내라고 하면 다 사갈 것이니, 자네 나가서 팔아보게나"하였다. 부채장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거리에 나가 일러주는 대로 하였다. 그랬더니 부채가 순식간에 다 팔리고 말았다. 재미를 본 부채장수는 김정희를 또 찾았다. 그러자 김정희는 "그러한 것은 한 번으로 족하지, 두 번을 해서는 안되네"하고 써주지 않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채는 크게 방구부채(둥근부채)와 접(는)부채(쥘부채)로 나뉜다. 방구부채는 부채살에 깁(紗)이나 비단,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부채다. 접부채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채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것이다. 전국적으로 접부채는 전주, 방구부채는 남원의 생산량이 가장 많다.
원래 방구부채는 중국이, 접부채는 일본이 역사가 오래되었다. 부채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견훤조'에 나온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자 견훤이 그 해 8월 공작선(孔雀扇)과 대화살(竹箭)을 보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전주는 그 만큼 부채의 역사가 깊다. 곧고 단단한 대나무가 많았고 무엇보다 질 좋은 한지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주사람들의 예술적 감각이 덧붙여졌다. 그래서 전주의 부채를 제일로 쳤다.
태풍과 폭우가 끝나자 무더위가 기승이다. 너도 나도 선풍기와 에어컨에 몸을 맡기면서 전력 수요에 비상이 걸렸다. 이런 때일수록 태극선과 합죽선 속에 잠들어 있는 바람을 불러오면 어떨까. 깊은 산골짜기나 푸른 강물에서 일어나는 서늘한 바람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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