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효는 고창의 향리로서, 근검절약하며 꽤 많은 재산을 모았다. 이것을 흉년이 들어 곤궁한 이웃들과 나누고, 국가적 대공사인 경복궁 복원사업에도 헌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광대 양성과 후원에 아낌없이 썼다는 점이다. 또한 스스로 판소리를 연구하고 집대성하면서 자신의 집을 판소리의 생활문화 공동체로 제공했다. 판소리는 17세기 하한담 최선달 등이 나와 틀이 잡히고 이후 8명창 등의 활동으로 공연예술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수준은 높지 못했다. 음악적인 세련미가 떨어지고 사설의 천박성 등으로 소위 상놈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신재효의 등장은 판소리가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의 박학한 지식과 음악을 보는 혜안 덕분에 사설의 천박성이 극복되고 음악성 또한 세련되게 고쳐졌다. 이러한 개작 과정에서 당시 기층민들이 이룩한 발랄한 현실인식이 보수적 지향이 강한 유가적(儒家的) 합리주의에 의해 상당부분 거세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일면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상하층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보편성은 커녕 판소리 자체가 지리멸렬하다 소멸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있어 판소리 향유가 양반층까지 확대되고 가객들의 사회적 신분도 상승하지 않았던가. 더불어 그는 판소리 이론의 지도자로서 수많은 명창들을 도와주고 키워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 발벗고 나서서 해야 할 일을 개인의 힘으로 해냈던 것이다. 이같은 신재효에 대한 대접이 판소리의 탯자리인 전북에서 너무 소홀한 것 같아 안타깝다.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학계의 활발한 연구와, 현장에서의 활용, 세계화 등이 더욱 활성화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전주세계소리축제 프로그램 팜플렛 '2012 광대의 노래, 동리-오동은 봉황을 기다리고'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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